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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소년 예수(눅2:41-52) 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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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1-03 17:20 조회 14,835 댓글 0
 
                   열두 살 소년 예수(눅2:41-52)         2018. 12. 30 송년주일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의 성장기에 대한 기록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누가복음의 본문 밖에는 거의 없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예수는 헤롯의 핍박을 피하여 마리아의 품에 안긴 채로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의 도움을 받아 애굽으로 급하게 내려갔다. 그 후에 애굽을 떠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 마을인 나사렛에 올라가서 살았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인 무교절과 칠칠절인 맥추절과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는 하였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는 유대 남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신명기 16장 16절과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찾아가서 여호와를 뵙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곳은 광야의 성막이며 가나안 사사 시대의 실로의 성막이다. 솔로몬 시대 이후는 솔로몬의 성전이다. 절기를 지키는 남자들은 빈손으로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였다. 

예수는 어려서부터 경건한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이와 같은 절기 신앙을 배웠다. 모세의 법대로 하면 절기 신앙은 남자들이 지켜야하는 의무였으나 랍비 힐렐(Hillel)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도 다 같이 절기를 지키도록 하였다.

유월절을 마치고 제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던 무리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어버린 것을 뒤 늦게 알았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하룻길을 걸어간 후였다. 고향으로 향하던 하룻길을 되돌아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친척과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예수가 어디쯤에 있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은 예루살렘에까지 되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를 찾기까지에는 사흘이나 걸렸다. 오늘날처럼 각자가 핸드폰을 들고 다니던 때의 일이 아니었다.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어린 시절에 겪은 일화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착잡하고 고단하게 헤매며 찾아다니던 중에 사흘 만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다. 예수가 열 두 살이던 때에 있었던 일이다. “열두 살 소년 예수”이런 제목으로 본문을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되길 바란다. 


성전에 머물던 지혜로운 예수.
요셉과 마리아는 잃어버린 예수를 PC방에서 찾거나 만화방에서 찾은 것이 아니었다. 12살이던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있었다. 사흘 만에 예수를 만난 그 시간에 예수는 율법학자인 선생들 사이에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예수의 답하고 묻는 질문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가 다 그 지혜롭게 말하고 대답하는 내용을 듣고 놀랍게 여기고 있었다. 47절의 ‘놀랍게 여기더라’는 계속하여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통해서 질문되고 대답되는 그 모든 말씀들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놀라운 말씀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당시 12살이던 소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돋보이게 들어났는가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예수는 더 어려서부터 나사렛의 회당을 드나들며 모세의 율법을 배우고 공부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12살이던 예수의  지혜는 그 당시 유대의 그 또래의 그 어떤 소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지혜가 있었다. 그가 선생들 사이에서 묻고 답하는 것이 그러하였다. 여기 46절에서 말하는 ‘선생’이란 유대의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힐렐'(Hillel),‘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니고데모’(Nicodemus)
”등의 유명한 율법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짐작하건대 최소한 그들 중의 한 두 사람의 율법학자들과 예수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없지만 외경으로 전해지는 <도마 복음>에서는 그 때 12살이던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 다양한 어려운 주제의 학문적인 내용들을 가지고 대화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12살 때의 예수는 이미 그 어느 학자들과 대화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다방면에 지혜가 넘치는 대화의 상대였다. 

예수에게서 목격되는 그 지혜로움이란 무엇일까. 오늘 날로 하면 핸드폰을 개발한 것 지혜로운 일이다. 핵을 개발하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고 하는 일들이 모두 다 지혜로운 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드러나는 지혜란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그에게 임한 지혜였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맞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께 하나님의 온 갖 모든 지혜를 공급해 주셨다. 

예수는 마리아의 태를 빌려 아기로 왔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로 태어 나셨다. 예수는 곧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본문에서 대하는 12살 된 예수의 모습 속에는 그러한 예수의 남다른 면이 복합적으로 드러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학습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그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터득해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수는 전혀 달랐다. 

47절의 ‘지혜’(知慧)라고 번역한 헬라어인 ‘쉬네세이’(συνέσει)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인 총명(聰明)을 말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일컫는 것이다. 즉 이미 어린 소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하였다. 이미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온갖 신령한 지혜와 지식이 가득하였다. 이것을 골로새 교회에 편지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3절에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는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이 아들이든 딸이든 저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공급받는 자녀들로 자라나도록 양육하여야 한다. 명문대학 졸업하는 것도 중요하고 무슨 전공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매사에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참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할 때 주어지는 법이다. 

잠언의 그 많은 말씀의 강조가 바로 그러하지 않나. 잠언 1장의 시작이 무엇인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1:1-6)
잠언 4장 5-10절의 말씀은 이렇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동서고금에 뛰어난 인물이 많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을 먼저 꼽으라고 하면 미국의 벤저민 플랭클린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필라델피아 시내에 가면 벤저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박물관이 있다. 거대한 대리석 건물이다. 벤저민 플랭클린이 누구인가. 미국 건국 초기에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과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아버지는 보스턴에 살면서 비누와 양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벤저민은 17남매들 중에서 10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글 읽는 법을 배웠다. 그가 받은 정식 교육은 초등학교를 1년을 다닌 게 전부였다. 어려서 필라델피아로 이사 가서 살았다. 12살 때 그는 인쇄공인 형 제임스 밑에서 형의 일을 도우며 5년 동안 인쇄 기술을 익혔다. 그는 이것을 평생 동안 자랑으로 삼았다. 같은 기간에 그는 스스로 닥치는 대로 책을 열심히 읽었고 스스로 글 쓰는 법을 독학으로 배웠다. 독서에 남다른 열심을 가졌던 그는 형에게서 배운 인쇄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쇄업으로 거둔 첫 번 째 성공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지폐 인쇄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는 23살 때에〈지폐의 본질과 필요성에 관한 연구 >(A Modest Enquiry into the Nature and Necessity of a Paper currency)(1729)라는 논문을 써서 지폐 인쇄권을 얻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에 낙뢰(落雷)에 관한 피뢰침의 원리와 전기(電氣)에 관한 실험보고서와 이론은 유럽 과학계에까지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51살이 되면서 정치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딘 뒤 84세에 눈을 감기까지 30여 년 동안 미국 건국 초기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정치가로서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그 외에도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에는 프랑스의 경제와 군사 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하여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후 200여 년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얼굴 초상화는 미국 지폐 100불짜리에 실려 있다. 그를 연구한 블레인 멕코믹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12가지 성공 경영 원칙>이란 책도 있다. 그 내용 중의 첫째는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이다. 우리로 말하면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면 않 된단 말이다. 사람이 거창하게 시작하고 허풍 떨며 시작해 놓고는 흐지 부지 하면 누가 그를 신뢰하겠나. 조용히 과묵하게 묵묵히 일해 나가지만 분명한 생의 목표가 있어서 하려는 일을 올곧게 계속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의 지혜는 그런 정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지혜였다. 예수는 어려서부터도 그랬고 12살 때에도 그랬고 청년의 때에도 그랬다. 예수는 30살까지 고향 집을 지키며 자기의 어린 시절을 돌보아 준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아버지의 목수 일을 배워서 가정을 꾸려 나갔다. 예수의 지혜는 가족을 부양하는 정도의 지혜가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내는 대속자(代贖者)의 지혜요 구세주(救世主)의 지혜로 덧입혀져 있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 광야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신 예수. 그 후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가시는 곳마다 천국을 비유로 교훈해 주시던 예수를 기억한다. 그러나 예수는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아기 때와 어린 시절과 소년의 때와 청년의 때에 한 결 같이 그의 생각과 마음에는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였다. 

요즘이야 어느 대학 출신이냐를 갖고 도토리 키 재기 하지만 인류의 긴긴 역사로 하면 대학의 역사는 그리 역사가 깊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이다. 모든 동물의 세계에 저들의 생태계가 갖고 있는 본능적인 것들이 어미 동물과 아비 동물을 통해서 새끼들에게 내려 흐른다. 인간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이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무엇인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지정의(知情意)가 담겨 있다. 모든 진(眞)과 선(善)과 미(美)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온갖 지혜가 인간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여 불순종하고 타락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다. 뱀의 속임이며 사탄의 술책이다. 

사실 동서고금의 각계  각 분야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을 돌아보라. 저들의 한결 같은 특징이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지혜를 공급받으며 살아온 인생들이 아닌가. 우리가 흔히 예로 드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이나 상대성 이론을 체계화 하여 널리 알려진 알버트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이 명문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인가. 알버트 아인쉬타인은 수학과 과학 이외의 과목은 지극히 평범한 실력이었다. 사실 수학과 과학 외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런 그는 츄리히 공과대학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였다. 독일에서 전기 회사를 경영하던 유대인 가정이었던 그의 부모는 주일이면 어린 알버트 남매를 데리고 성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가톨릭 신자였다. 지극히 평범한 성장기를 가진 알버트 아인쉬타인이 42살에 노벨물리학상을 탈 정도의 시대적인 저명한 학자로 발전할 줄로 예견한 사람은 그 주변에 그 누구도 없었다. 

지혜 중의 지혜는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덧입지 못한다면 영생에 대한 질문을 갖고 예수를 찾아 왔으나 예수의 말씀 앞에 근심하며 돌아가 버린 부자 청년과 같은 생을 살고 말 것이다. 예수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소리치고 아무리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는 가장 어리석은 자요 가장 불행한 자 일 뿐이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참 지혜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의 주인공처럼 살다가 죽고 말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형과 유산 분배하는 일에 대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가 아니라고 대답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비유로 해 주신 내용이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다. 한 부자가 그 밭에 농사가 잘 되었다. 더 이상 쌓아 둘 창고가 부족하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7-21)

그 당시나 오늘날이다 마찬가지이다. 예수 오래 믿고 교회 오래 다니면서도 ‘내가. 내가. 내가.’하면서 모든 것을 매사에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며 교회 중심, 예수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시간과 경험과 재주와 재물을 헌신하지 못하며 재물 몇 푼에 발발 떨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도 없지 않다. 

예수께서 한번은 성전의 헌금 궤 앞에서 무리가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지켜보셨다. 부자는 많이 넣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 넣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3-44)

그렇다. 하나님 안에서 참 지혜로운 성도는 시간 사용이 다르고, 재물 사용이 다르고, 돈 사용이 다르고, 들고 나는 출입과 그 관심사가 다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란 주님 모르고 세상 낙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도 그 삶의 질이 한참 다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라면 생의 목적이 다르고 살아가는 이유가 다르다. 


부모를 받들며 순종하던 예수.
예수는 효자의 생을 사셨다. 하늘 아버지께도 순종하였지만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도하였다. 예수는 평생을 이 땅에 보냄 받은 사명(使命)을 이루기 위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한 길을 걸어 가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자신을 낳아 양육해준 어머니 마리아와 자신의 세상 아버지 역할을 잘 감당해 주신  요셉을 향하여 받들어 순종하는 장남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예수가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유월절에 가족과 함께 다녀 온 그 후에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요셉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간 후에 요셉이 하던 목수 일을 계속하였다. 평소에 요셉이 살아 있을 동안에 하던 목수 일을 어깨 너머로 배웠고 그 기술과 그 솜씨를 갖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나갔다. 야고보를 쓴 야고보, 유다서를 쓴 유다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남편 요셉을 통하여 낳은 예수의 동생들이었다. 저들 동생들도 형님 예수 안에서 초대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 배후에는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장남 역할을 순종함으로 잘 감당하였던 예수의 모범이 있었다.

순종(順從)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잘 감당해 나가는 모습이다. 사무엘 상 15장 22절에 보면 순종은 양과 송아지와 염소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제사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며 살아가는 순종은 숫양의 기름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 왕을 꾸짖으셨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책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도 인생을 버리신다고 경고하였다. 왕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면 불행해 지고 만다. 

알고도 행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죄다. 밝아 올 새해 2019년에는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된 응답의 삶을 간증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던 예수.
예수는 자기를 찾느라 사흘 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부모와 함께 고향 나사렛에 내려가서 늘 사랑 받는 나날을 지냈다. 예수는 사흘 만에 그를 만나 반가워하기도 하고 근심스러워 하기도 한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 말을 부모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 모든 말들을 어머니 마리아는 마음에 두고 지냈다. 49절의‘내 아버지 집’이란 원 뜻은 ‘내가 하여야 할 일’(business)이란 의미이다. 이는 예수가 머물던 공간으로서의 성전 즉 건물이 아니라 사명에 관한 고백이며 선언이다. 실로 예수는 자신이 해야만 할 일 즉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자의 생을 사셨다. 49절에 12살 된 예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표현한 이 표현은 예수의 생애에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예수는 한 해 한 해 점점 그 지혜가 더 해갔고 키도 쑥쑥 자라났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사랑을 받고 주목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랑을 받았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누가복음 2장 40절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강하여지고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예수 위에 있었다. 이는 예수의 성장기에  육체적으로도 그러하고 지적으로도 그러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영적인 면에 있어서나 그 어떤 면 하나라도 흠 잡을 것이 없이 균형 있고 존경 받을 만한 성장기를 보낸 것을 말씀한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죄가 없으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죄 많은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에도 죄의 환경에 물들거나 빠지지 아니하고 죄를 다스리고 죄를 이기고 궁극적으로는 죄와 사망을 이기는 십자가의 승리를 인간에게 선물해 주셨다. 이것이 부활의 권세이며 능력이며 축복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神性)과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사람의 아들로서의 인성(人性)을 골고루 갖고 살아가셨다. 누가복음 2장 52절의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과 앞 부분인 누가복음 2장 40절의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예수의 어렸을 적부터의 영혼육의 모습이 얼마나 균형 있고 안정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이었나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는 <소망의 숫자 3:16>(The Number Of Hope)에서 자신이 세 딸과 아내와 함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살던 때에 길 찾기에 고생하던 일화를 소개한다. 300년된 역사를 지닌 그 곳의 길 사정은 어려웠고 낯선 이들이 골목 골목읓 찾기에는 힘겨웠다. 네비게이션 개발 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700미터 코르코바도 산 꼭대기 언덕의 38미터 높이의 팔 길이만도 30미터이고 얼굴 상 크기만도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예수상을 쳐다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작은 골목 안에서도 깨닫게 해 주는 경험을 말한다. 맞다. 예수를 바라보라.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받던 넘쳐나는 사랑이 골고다 언덕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흘려 넘쳐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 입는 아들딸의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 

성탄절 후 첫 주일을 맞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순종의 삶이 가득차고 넘쳐흐르는 주님 안에서의 나날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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