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면 II (빌4:8-13) 2019. 09. 22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을 지난주일 예배 때에 묵상하였다.
잘 훈련된 용감한 군인같이 주 안에서 굳게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멍에를 같이 하라
복음에 함께 힘쓰라
복음 전파에 힘쓰는 동역자들을 도우라,
서로의 이름이 생명책이 있는 자답게 귀히 여겨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너희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깝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로 하라
너희가 구하는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는 빌립보서 4장의 앞부분의 내용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교훈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9절에서도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라고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어떤 믿음 생활을 할 때에 이런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될까.
성도된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 백성이 되고 은혜의 상속자(相續者)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지 수양이나 도덕이나 쌓은 선에 의해서 그 어떤 무엇을 성취하려는 종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활실천 강령이 반드시 요구된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면’이 무엇인가. 평강의 하나님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각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와 체험과 고백 가운데 살아가려면 먼저 그런 은혜와 그런 축복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 갈 때라야만 그런 평강이 주어진다는 선언이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8절에 보면 “끝으로 형제들아......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여덟 가지의 덕목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만하며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무엇에든지 ‘참되며’(ἀληθῆ)”
여기 참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나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고 영이시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영이시다. 거짓이 없는 영이시다. 참된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원하는 자는 참된 영으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가 없다. 로마서 3장 4절에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요즘 나라 돌아가는 것과 지도자 행세하는 그 누군가를 보면 깎아도 또 깎아도 거짓이 계속 깎여 나아고 벗기고 또 벗겨도 계속하여 거짓이 양파 껍질 벗기듯 계속하여 벗겨져 나오는 거짓으로 똘똘 뭉쳐진 거짓 덩어리의 한 사람과 그의 가족사가 벌거벗겨지듯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 그게 본래 인간의 모습이다. 학문과 교양과 권력과 사회적인 지위와 재물과 탐심의 겉옷으로 가리고 또 가려서 잘 안 보였든 것뿐이지 인간의 실체가 사실은 그런 악 덩어리이다. 다시 로마서 3장 4절을 보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이게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이다. 그런 거짓되고 허물 많고 악한 인간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참이다. 참되며 라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변화되길 기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근본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속성을 가지고 계시니 말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와 진리를 동격화 하셨다. 맞다. 예수는 참된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계셨던 것이다. 그 분은 유일한 진리의 참된 한 길이시다. 그 분은 죄악과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참된 영을 덧입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새 사람이 되려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다시 지음을 받아야 한다. 의와 진리를 소재로 하여 3D 프린팅이 되어야 한다. 의와 진리를 소재로 하여 정교하게 흠과 티가 없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의와 진리로 페인트칠을 조금씩 화장 하듯 하고 하나님의 자녀인양 그런 척하며 모양만 내고 시늉만 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질문하신 거듭남이다. 이것이 중생이고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자녀의 권세를 덧입는 순간이다.
물론 구원의 완성은 주 안에서 거룩한 길을 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 말에 오해가 있으면 안 된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인생은 누구나 온전치 못하다. 매 순간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가운데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다.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순식간에 평생의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은 심각한 신앙의 숙제이다. 우리가 주의 은혜로 자녀가 되고 구원 받은 것이 맞지만 날마다 매 순간 마다 무엇이 참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끝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생각하라” 이런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 살아가길 원하는 성도라면 끝으로 이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부탁이며 강조이다. “무엇에든지 참되며”(whatever is true)라는 것은 무엇이 참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란 말씀이다. 참되며 라는 상태는 거짓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무흠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경건(σεμνά)하며”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뜻이다. 즉 코람데오(Corom Deo)의 삶의 자세, 신전의식(神前意識)의 삶의 자세를 경건이라고 한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사실 신앙인이 경건을 잃게 되면 비신앙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만날 때나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나 무슨 생각을 할 때나 무슨 일을 할 때나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하나님 앞에 있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경건이다.
창세기의 요셉은 경건한 사람의 대표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인마님의 유혹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히브리 노예인 청년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주인마님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볼 때마다 눈짓을 했다. 동침하자고 요구하였다. 그 때 요셉은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8:9) 그런데도 바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노예인 요셉에게 청하였다. 그 때마다 요셉은 주인마님을 피하여 다니며 집안 살림을 돌보았다. 바로 왕의 친위대자인 보디발의 집에는 요셉 말고도 그 집을 관리하는 다른 노예들이 여러 명 있었을 것이다. 집도 넓고 정원도 넓고 손보고 돌볼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요셉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주인마님의 눈을 피하여 가며 종노릇을 하였다. 그래도 살림을 하다 보면 주인집의 집 안에 안 들아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 큰 집에 주인마님과 자기 밖에 없는 것처럼 인기척이 뜸한데 주인마님이 요셉의 겉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유혹했다. 깜짝 놀란 요셉이 도망쳐 나가다가 그만 겉 옷자락 하나를 빼앗기고 말았다.
나중에 주인 보디발이 집에 돌아 왔다. 주인마님은 남편에게 “이 옷자락의 주인인 히브리 노예 요셉이 며칠 전에 내 방에 침입해서 나를 겁탈하려 하기에 내가 큰 소리를 질렀더니 이 옷자락을 흘리고 도망쳐 나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요셉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라는 말씀은 이런 것이다. 경건하게 살아가려다 보면 억울한 일도 있고 누명 쓸 때도 있고 오해 받을 때도 있고 따돌림 당할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자 하면 하나님이 아신다. 그 요셉을 나중에 하나님이 존구하게 높이시고 오래도록 쓰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경건하게 살아가야 한다. 예수 믿는 성도라면 무엇에든지 경건하게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굽어보시되 특별히 성도의 삶을 주목하여 지켜보고 계시다. 특히 교회의 일꾼들은 더욱 경건하여야 한다. 디모데전서 3장 8절과 11절에 보면 남녀 집사들은 경건해야 한다고 하였다. 거기 ‘정중하고’ ‘정숙하고’라는 말씀이 곧 경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디도서 2장 2절에서는 늙은 남자들이 특히 경건해야 한다고 하였다. 잘 늙어가다가 주책 부리지 말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한단 말씀이다.
“무엇에든지 옳으며(δίκαια)”
옳다는 말은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바른 것 즉 정의(正義)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법률의 잣대로 하든 모세의 율법으로 하든 도덕적으로 옳아야 한다. 재물 앞에 이성 앞에 권력 앞에 출세의 기회 앞에 크고 작은 일들 앞에서 옳아야 한다. 꼼수와 편법과 불의한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려 하면 안 된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면 안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살면 안 된다.
왜 지난밤에도 몇 만 명의 젊은이들과 대학생들과 각계각층의 시민들의 촛불을 치켜들고 광화문에 모이고 서초동 검찰청 앞에 모여 든 것인가. 옳지 않는 것은 옳은 것과 같이 할 수 없는 법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여기서 ‘옳으며’라는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 일치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다고 인정하실 수 있어야 옳은 것이다. 사울은 40년 동안 왕이었지만 말년에 하나님이 저를 옳지 않다고 여기셨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들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게 여기셨다. 그들의 나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옳은 것은 영원하다. 옳지 못한 것은 끝이 다르다.
“무엇에든지 정결하며(ἁγνά)”
정결이란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한 결 같이 깨끗한 상태를 말씀한다. 마음과 생각과 뜻과 성품과 입의 말과 행실이 깨끗한 것이 정결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네팔 선교 현장에 간 적이 있다. 수도인 카투만두 뿐만 아니라 시골까지 온 나라가 쓰레기 천지다.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정결하며 란 그 반대의 상태다. 것만 깨끗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속이 깨끗한 상태다. 속이 깨끗하고 의도가 깨끗하고 과정이 깨끗하고 열매와 결과가 깨끗한 상태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무엇에든지 정결하려면 무엇을 버려야 할까.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라고 했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추구해야 무엇에든지 정결한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προσϕιλῆ)”
영어성경에서는 “whatever is lovely”라고 했다. ‘lovable’(사랑스러운) 혹은 ‘attractive’ (사랑의 마음을 끄는) 상태를 말한다. 나를 사랑해 달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해 주실만한 상태를 말씀한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 창세기의 요셉은 열 명의 형들에게는 미움을 받았지만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로 살아갔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인 주인마님이 유혹하는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을 뿌리쳤을 때에 감옥에 갇혔다. 2년 후에 바로 왕 앞에 나갔고 왕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바로 왕의 총애를 입도록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가신 것이다. 그런 요셉이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을 잘 다스리는 명 총리로 자리매김하였다. 하나님은 요셉을 30살부터 11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까지 애굽의 바로 왕이 새롭게 바뀌도록 오래 오래 도록 하나님의 사랑 받을 만한 인생으로 존귀하게 이끌어 가셨다.
이는 다니엘도 마찬가지 에스더도 마찬가지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한 자들로 살아갔다.
남편과 국회의원의 공통점이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는 내가 골랐지만 정말 싫다.
둘째는 바꾸려면 절차가 복잡하다.
또 하나는 자기가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εὔϕημα)”
그 뜻은 정중하고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이라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칭찬이란 것이 입술에 담은 겉 치례의 칭찬 말고 진심이 담긴 칭찬일 때 칭찬다운 것이 아닌가. 높은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것보다 나보다 아랫사람이 칭찬하는 것이 더 무게가 있다.
기업의 회장을 그를 늘 가까이에서 대하는 자가용 운전기사가 칭찬한다면 그게 진실한 칭찬일 것이다. 왕이나 왕비를 그 곁에 가까이에서 수종을 드는 신하들이 칭찬할 수 있다면 그런 게 참다운 칭찬일 것이다.
성도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 앞에서 칭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주변 사람이 그 어떤 신분의 그 누구이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가장이라면 아내나 자녀들로부터 좋은 말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가족들로부터 좋은 말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게 사는 것”이다.
아들 딸이 아빠를 평할 때에 “우리 아빠는 돈은 잘 버는데, 출세는 했는데, 사회적으로 지위는 높은데, 세상에서 꽤 유명해지기는 했는데 내가 볼 때에는 아니다. 우리 아빠는 교만하고 거짓되고 이중인격자이고 감정의 기폭이 불안정해서 사고뭉치다. 문제가 심각하다. 문제 인물이다.” 이런 평을 받는 다면 비참한 것이다.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 엄마는 “명문대는 나왔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씩이나 하는데 완전히 이중인격자이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불의와 거짓과 악의 화신이다. 내가 봐도 우리 엄마는 문제가 심각하다. 아직 감옥에 안 들어 간 것이 신기히다.” 이쯤 되면 갈 때까지 다 간 것이 아닌가.
예수 당시에 대 제사장 가야바가 그런 인물이었다.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도 마찬가지다. 본디오 빌라도가 그랬다. 세례 요한의 목을 쳐낸 헤롯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제자 행세하던 가롯 유다가 그런 인물이었다. 자기편이 없는 게 아니었지만 역사적을 보면 칭찬 받을 만한 인생으로 산 자들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출세하고 성공하지 못할 지라도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게”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무슨 덕(ἀρετή)이 있든지”, “무슨 기림(ἔπαινος)이 있든지”
(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
라고 했다. 이 말은 그 신앙 인격과 사람의 됨됨이가 주 안에, 복음 안에, 말씀 안에 성숙해서 존경 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고 인정받을 만하고 추앙 받는 것을 말한다. 칭송이 자자한 향기로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행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다. 네 가지 각기 다른 동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한 하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아가려고 씨름한 것처럼 자기 곁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부탁하는 것이다.
러시아와 터키 중간에 위치한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의 기독교 지도자 일리아 2세(조지아어: ილია II, 1933-)는 현직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Catholicos-Patriarch)이다. 27살 때인 1960년에 모스크바 성직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조지아로 돌아와 바투미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1963년에는 주교 수품을 받았으며 1977년에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에 선출되었다.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에 오늘 날 조지아를 국민의 85%가 예수를 믿는 기독교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그는 86세의 고령이지만 존경 받고 사랑 받고 칭송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노년기를 살아가고 있다. 1977년 50교회, 70명 성직자였던 조지아의 교회를 오늘 날은 2000곳이 넘는 교회에 3000명이 넘는 성직자가 섬기는 나라로 부흥시켰다. 그는 자신을 쓰셔서 “오늘 날 조지아에 400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탄생되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린다.”고 말하였다.
능력 주시는 분 안에 거하라.
“나는 못해, 나는 않되,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소용없어, 나는 별수 없어” 이렇게 자신을 비관하지 말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신앙 고백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다.
바울 사도의 간증이 무엇인가. 슬픔 많고 고통 많고 고난 많고 환난과 역경과 시련이 끊임이 없는 세상이지만 자신이 주 안에서 크게 기쁨을 갖고 살아가는 것처럼 환경을 이기며 주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궁핍도 비천함도 풍부함도 배부름이나 배고픔이나 풍부나 궁핍이나 그 어떤 형편에든지 적응하며 견디며 이기며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노 사도의 고백을 만나보게 된다. 바울 사도는 순교 당하는 순간까지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끝까지 푯대를 향하여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 말하였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그 때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그러자 천사는 떠나갔고 일 년 후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아름다운 계절!
말씀 안에서 성숙한 신앙을 지켜 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