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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마지막 소원(히13:18-25) 201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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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4-02 15:07 조회 11,644 댓글 0
 
                      마지막 소원(히13:18-25)           2019. 3. 31
   

토요일이었던 어제, 2019년 3월 30일 오후 2시 30분경에 구파발역 지하도 2번 출구 바깥 계단 입구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는 중에 김병규 씨가 내 앞에서 멈추어 서서 먼저 말을 건네 왔다. “목사님이 여기서 뭐하세요.”그를 알게 된 것은 2010년 가을쯤이니 벌써 9년 전 일이다. 진지하게 마음이 담긴 대화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그는 나와의 대화를 꺼려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수 사랑교회의 건축과정과 건축 이후의 사역을 반대해 온 주인공 중에서 앞장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사하고 악수를 청하면 “내 이름 부르지 마세요.”하고 나를 거부하고, 악수는커녕 대화조차 이어가길 꺼리던 그와 어제 처음으로 악수도 나누었다. 그가 미소 띤 표정을 짓는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봤다. “네 제가 토요일이면 이곳에서 전도합니다.”,“아 그러세요. 오늘 날씨도 추운데 고생하시네요.”그와 짧은 몇 마디를 나누면서 전도지와 물티쉬를 건네면서 “지하철 안에서 읽어 보세요.”하고 말했더니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바로 뒤 따르던 청년이 우리의 대화 광경을 지켜보기에 아마 아들인가 보다하고 여겨서 “아드님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요즘 TV에서 만나보는 곱고 예쁘장한 모습에 20대 후반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닮지 않은 것이 신기하였다. 

아들에게도 전도지를 건네주었더니 따로 받아 들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고“자네 아버지와 내가 여러 해 째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이다.”하고 설명했더니 “우리 아파트 앞 교회의 목사님”이라고 김병규씨가 자기 아들에게 나를 소개까지 하였다. “아 네 그러세요. 예수사랑교회 목사님이세요.”하면서 그들 부자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살다 보면 이런 순간도 있네...” 하고 생각하며 한 시간 가까이 전도를 하였다. 

늘 말하지만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 분명하지 않다. 사도 바울, 아볼로, 본문인 히브리시 13장 22절에서 ‘권면의 말’을 했다는 근거에 의해서 권면과 위로의 사람 바나바, 의사 누가, 아볼로에게 성령에 관하여 가르칠 정도의 성경 실력이 있었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던 브리스길라 아굴라, 바울과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실라,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스데반 순교 후에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립 집사 등이 거론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분명한 증거를 입증할 수는 없다.

23절에,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전해 주는 것을 보면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와도 관계를 갖고 지내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본문에서 여러 차례 ‘너희’라고 말하는 히브리서를 받아 읽게 된 수신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 동안에 살펴 본 내용으로 하면 히브리서는 유대교인들 중에서 예수를 믿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 가 버리는 이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쓴 편지이다. 또한 고난과 박해를 견뎌 내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며 쓴 편지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만 구원과 죄 사함과 영생이 주어지는 복음의 절대성에 대하여 교훈한 말씀이다.

지난 3월 1일에 히브리서 1장 첫 부분을 묵상하기 시작해서 오늘 13장의 마지막 부분을 대하게 되었다. 31차례에 나누어 묵상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좀 더 자세하게, 좀 더 깊이 있게, 좀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묵상하고 대할 이유가 충분한 성경 중의 한 곳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우리는 그 동안 히브리서를 통해서 “나에게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하는 질문에 답하게 하는 소중한 성경의 말씀들을 구구절절이 대하여 왔다. 

히브리서의 저자를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본분에 보면 18절에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래서 혹자들은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공동으로 저술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만 같고 그렇게 추정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왜냐하면 19절이나  22절에 보면, ‘내가’라는 일인칭으로 다시 바꾸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과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수신자들을 향한 소원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하는 인사말로 히브리서는 끝난다. 그 전반적인 내용은 히브리서 저자의 소원을 담고 있다. 무엇을 원한다고 하였나.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이처럼 기도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기도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는 기도 부탁 내용이 무엇인가.

그는 모든 일을 선하게 행하려 하고 있다. 선한 양심을 갖고 모든 일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태도로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18절과 21절에 보면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선한 양심, 모든 선한 일에’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맞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칫 ‘자기 의’에 빠져 들거나 ‘자기 의’로 세상을 왜곡되게 대하면 안 될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주변 사람은 불의하고 하는 식으로 섣불리 판단해도 안 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기도를 부탁하는 바탕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각과 마음과 양심을 다스림 받기를 원하는 태도가 분명히 있다. 그런 면에서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자기 자신은 불의한 생각을 갖고 있고 악한 일을 이루려고 꿈꾸고 구상하고 있으면서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큰 범죄를 꾸미고 있으면서 이 일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려고 가신 장면이 나온다. 36절에는 11제자들과 함께 가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다. 그 후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셔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기도를 시작하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다. 이 장면을 유심히 보면 처음에는 가롯 유다가 떠난 11제자에게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저만치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셔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부탁을 따로 하셨다. 그리고 조금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를 시작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얼마 후에 제자들에 와서 보니 자고 있었다. 그 때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0-41)

그 후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세 번 반복하셨다. 기도 후에 와서 보니 제자들이 여전히 자고 있었다. 예수는 잠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대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금방 생각을 바꾸셔서 “일어나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밤, 마지막 기도 장면을 보면 고독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다시 히브리서 본문을 보자. 그 당시에는 로마의 박해가 극심해져 가던 때였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성전도 그 때 완전히 파괴 되었다. 그 이전 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동물 제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주후 49년에 로마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주후 64년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네로 황제의 큰 박해가 있었다. 그런 정황들을 볼 때에 네로의 박해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를 전후한 때에 쓰인 편지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핍박과 박해와 고난과 심지어는 순교를 각오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히브리서 저자가 어디서 이 편지를 썼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도를 부탁하고 있고 디모데가 풀려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이들 곁에 속히 돌아가서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19절에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는 간곡한 기도 부탁의 장면을 보면 그 당시 상황이 느껴지지 않나.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각자 진지하게 기도 생활을 하되 서로에게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부탁하는 기도의 동역자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진지하고 진실하게 서로를 위하여 기도의 관계를 지속하는 사순절 기간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뜻과 기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다. 20절과 21절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는 기도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렇다. 이것이 기도다운 기도가 아닌가. 

예수를 양들의 큰 목자라고 하였다.
예수를 우리 주라고 했다.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 주신 분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우리가 13장 분량을 대하는 동안에 히브리서에 예수의 부활을 표현한 부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이란 이 표현은 이 곳이 처음이다. 물론 예수에 대하여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묘사한 부분이 여러번 있었지만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셔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본문의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성도 가운데서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신다.
이 모든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시기를 원한다.

이렇게 정리 해 보면
우리가 늘 ‘주여 주여’ 하며 아뢰는 우리의 각양 어려가지 모양의 기도 제목들이 그 내용이 어떠해야 하나의 기틀을 발견하게 된다.

정리 해보면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각양의 주어진 은사를 조화 있고 균형있게 하셔서 부족함이 없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믿는 자들 가운데서 행하신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21잘의 이 말씀보다 더 소중한 말씀은 없다. 우리가 그 동안 3월 한 달 내내 히브리서를 대하였다.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여쭙고 찾아 나가는 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든 그 누구이든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부모형제자녀 혈육이라도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성도들의 연합도 마찬가지이다.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 모든 것 안에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신자의 기도생활,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생활이 아닌가. 

히브리서는 어린아이처럼 젖만 먹지 말고 단단한 음식도 받아 먹을 만한 신앙의 성숙과 온전함을 추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동안 히브리서를 대하면서 부담스러우리 만큼 분명한 권면의 말씀들을 구석구석에서 대하였다. 히브리서 저자가 22절에서 언급하는 바가 그것이다.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오늘 날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나에게 권면의 깨달음이 온다. 그 때 그 권면의 말씀과 교훈과 훈계와 깨달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성숙을 향한 과정이 될 것이다. 

본문을 읽다가 보면 히브리서를 쓰는 저자와 디모데와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수신자들인 성도들이 서로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끈끈한 관계가 느껴진다. 23절을 보면 그렇다.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재회의 순간을 고대하고 있다. 221장 찬송 가사 그대로이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구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지난 화요일 오전에 시내에서 교정선교회 임원회가 있었다. 5월 달에 경북제일교도소 수형자 합동 세례식을 하려고 한다. 버스로 돌아오던 길에 세문안 교회에 들렀다. 본당 십자가의 그림자가 배 모양이었다. 1885년 4월 5일, 헨리 아펜젤러 부부와 호레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배를 타고 선교사로 도착한 것을 형상화 한 이미지였다. 

저들이 낯설은 땅에 찾아 와서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기 원하시는 선한 일들을 이루려 했던 선교의 사람들이 아니었나. 우리 가운데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시기를 기도하자. 


모두에게 은혜가 있기를 원하노라.
편지의 마지막은 주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하는 말이다. 인도하는 자들, 모든 성도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 저들 서로가 서로에게 골고루 문안하며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요즘 새벽마다 거의 날마다 “은혜로다”라는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곤 한다.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나 충만하네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나 충만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은혜로다 주의 은혜
변함없는 진실하신 주의 은혜

그렇지 않나.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이 감사이고, 모든 것이 주님의 복 내려 주심이 아닌가. 주 안에 이런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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