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이신 예수(요10:11-21) 2020. 2. 9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삯꾼 목자’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삯꾼은 삯꾼일 뿐이지 목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 목자는 단지 한 분뿐이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시다.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14)“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의 앞부분에서 자신은 목자이며 절도나 강도와 다른 점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교훈을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다.”
“문을 통하지 않고 양의 우리 안에 들어가려는 것은 절도나 강도다.”
“양은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양은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
“목자는 우리 안에 있던 양을 우리 밖으로 내놓은 후에 양들보다 앞장서서 간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서 간다.”
“내가 양의 문이기 때문에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내용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특징이 무엇인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
선한 목자의 첫째 특징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이 똑같은 강조를 11절과 15절과 17절과 18절에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왜 그랬을까. 이와 같은 강조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이 땅을 구원할 구세주로 보냄을 받아 그를 믿는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다. 목자이신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목자의 자기 양과 같은 인생들을 구원하셨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신 것은 목자로서 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대속(代贖) 사건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소개할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어린 양으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어 죽임당하셨다. 그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죄 사함과 구원을 선물해 주시고 영생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였다. 이사야 40장 11절에 보면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하였다.
목자이신 하나님의 이 사랑,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은혜를 모르는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점을 보고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고 박수와 무당 앞에 가서 굽신 거린다. 사이비와 이단의 앞잡이들에게 가서 맹종한다. 저들을 신처럼 섬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돌아 보면 인간처럼 어리석은 경우가 없다. 꼭 맞다. 양이란 존재가 그렇게 어리석인 짐승중의 대표다. 양이 염소처럼 뿔이 있나 곰이나 사자나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있나 거센 발톱이 있나. 치타처럼 빨리 달릴 수가 있나. 여우처럼 약기를 한가. 두더지처럼 쉽게 어디로 숨을 수가 있나. 그렇다고 새처럼 공중으로 날아다닐 수가 있나. 사슴처럼 자랑할만한 멋진 뿔이 있나.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자랑할만한 날개가 있나.
게다가 양은 눈도 어둡고 앞의 양이 가면 그 뒤를 아무 생각 없이 줄줄 따라 다니기만 한다. 그러다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를 한다. 조금만 주변을 둘러 보면 뜯어 먹을 풀도 많건마는 양은 먹기 시작한 그 한 곳에서 풀뿌리가 다 뽑히기 까지 한 곳에서만 집중해서 풀을 뜯어 먹는다. 아에 주변이 페허가 될 정도로 한 군데서만 뭉갠다. 다른 동물, 다른 짐승들은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지만 양들은 목자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씀은 사실이며 진리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세상에 목자 없이 살 수 있는 양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로 만나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있고 그래야 살 길이 있고 그래야 영생의 길이 있다.
과거에 불교에서 큰 스님이라고 말하던 성철이 죽어 가면서 “내가 80년 포교한 것은 헛것이다. 나에게는 구원이 없다. 나는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으로 간다”고 절규했다고 하지 않나. 오래도록 앉아서 지내고 잠도 앉아서 자고 삼천배를 삼천번을 해도 해결 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가 구원의 문제이다. 다른 종교를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구원은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렇게 얻는게 아니다.
요한복음 10장의 양과 목자의 비유의 핵심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구원을 받는 길은 유일한 방법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으면 누구든지 구원의 길이 열린다. 예수를 통해서 들며 날며 영생의 꼴을 얻게 된다.
양떼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의 목적은 양으로 생명의 꼴을 얻되 풍성히 얻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지신 목자 길 잃어 버린 양 찾도록 찾으며 부르소서”라고 찬양하지 않나.
맞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 오늘 날로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믿고 따르고 섬기며 경외하는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의 선한 목자이시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이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긴 하지만 자신의 목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친히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 삼으셔서 존귀한 지도자로 삼으셨다. 시편 78편 70절부터 72절까지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양의 우리에서 다윗을 택하셔서 그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기르고 지도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유능하고 존귀한 목자로 삼으셨다고 했다.
이사야 6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과거에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이 가능하게 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기적은 하나님이 모세를 ‘양떼의 목자’로 삼아 쓰신 경우라고 했다.
맞다. 하나님은 친히 택한 백성들의 선한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마다 하나님이 택하신 종들을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의 목자로 삼아 쓰시고는 하셨다. 모세가 그런 인물이고 다윗이 그런 인물이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12절과 13절에서 삯꾼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 말씀하는 삯꾼이란 주인의 양 떼를 맡아서 일당을 받고 잠시 돌보는 품삯을 받고 일하는 품꾼이다. 유대인의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에 보면 저들 품꾼으로 주인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삯꾼의 책임에 대한 한계를 정해 놓았다. 가령 주인의 양떼를 돌보는 중에 한 마리의 이리가 달려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리를 물리치고 주인의 양떼를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두 마리 이상의 이리가 달려들면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양떼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도 그 책임을 묻지 않게 되어 있다. 이것이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삯꾼의 한계이다.
그 당시 양 떼를 치는 품꾼인 삯꾼의 일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과 삯꾼을 비유로 설명해 주신 것이다. 삯꾼은 위험하고 곤란한 경우가 되면 주인의 양떼를 돌보지 않고 버려 두고 달아나지만 양 떼의 주인인 목자는 어떤 위험, 어떤 상황에서라도 양 떼를 지키고 돌보기 위해서 목숨이라고 버린다고 하였다.
이것은 장차 예수께서 주님을 구주로 믿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자신의 목숨을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시도록 내어 주실 것을 비유로 교훈하신 말씀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을 쓰고, 돈을 쓰고, 재물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 주는 경우란 흔한 경우가 아니다.
19년 전인 2001년 1월 26일은 고려대 무역학과를 휴학하고 일본 동경에 유학 중이던 27살 이수현 청년이 지하철 역 철로에 술에 취한 채로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살려 내려다 기차에 치여서 목숨을 잃은 날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그는 그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 의로운 일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이 일었었다. 7초의 순간적인 판단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우였다. 고인의 빈소에는 일본 시민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고 각지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금이 이어졌다. 이수현 군의 부모는 일본인들이 모은 1억원이 조금 더 되는 조의금을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기부했다. 2008년에는 이수현 군을 소재로 한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개봉되기도 했다. 이 기금을 토대로 고인의 이름 영문 약자를 딴 ‘LSH 아시아 장학회’가 설립됐다. 일본 방송국인 NHK는 “고인은 한일 양국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며 일본으로 유학을 왔었다. 고인을 기리는 조의금 등으로 만든 장학회를 통해서 그 동안 유학생 960명이 지원을 받았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그에게 일본국민 훈장을 추서하였고 대한민국도 국민훈장을 추서하였다. 자라나면서 이수현군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신 후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그 날 이후 그는 일본을 좀 더 잘 알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결심하고 떠났던 유학 중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죄 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서로를 아는 관계.
품삯을 받고 주인의 양떼를 맡아서 돌보는 삯꾼은 양을 잘 모른다. 양도 그 삯꾼을 잘 몰라 본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제 주인인 목자를 안다. 이것은 막연하게 아는 관계가 아니라 온전하게 아는 것이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친밀하게 알고 지속적으로 아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안다는 ‘기노스코’라는 표현은 객관적으로 알고 순간적으로 아는 관계가 아니라 경험으로 알고, 제대로 알고, 전부 다 알고, 모든 것을 알고, 지속적으로 아는 관계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10:15)라고 하셨다.
이는 마치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과도 같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이런 관계가 서로를 아는 관계이다. 예수는 자신을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고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룩하실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셨다. 이런 관계야말로 서로를 아는 관계인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우리가 왜 기도하나. 왜 하나님을 찾나. 왜 ‘주여 주여’하며 살아가나.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310장 찬송 가사의 후렴이 뭔가.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맞다. 그렇다.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나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나의 괴로움도 아시고 답답함도 아시고 외로움도 아시고 고독도 아시고 우울도 아시고 속 상한 것도 아시고 억울한 것도 아시고 내가 숨기고 싶은 과거도 아시고 내 속속들이 형편을 어쩌면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께 하소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니 내 삶의 주인이 나지. 뭘 밤낮 예수께 시시콜콜 기도하며 살아간다고 말하나”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아는 이 관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요즘 결코 그 값이 싸지 않은 비싼 상담 사무소 운영이 잘 되는 이유가 뭔가. 누군가가 귀를 기울이고 내 답답한 인생의 이야기를 좀 들어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좀 알아줘 달라는 요구가 아닌가 말이다. 상담치료, 심리 상담 등 뭐 별의 별 상담과 심리 치료가 골고루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은 음악치료, 미술 치료, 자연 치료, 아로마 테라피, 요가 치료 등등 별의 별 치유 과정이 다 많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보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나를 알아 주시고 내가 예수를 바로 아는 관계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은혜와 복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
살다 보니 자식 잃고 살고. 남편 잃고 살고. 재산 다 날리고 살고. 사기 당하고 살고. 남편 병들고. 아내 병들고, 남편이 날 무시하고, 아내가 날 괄시하고, 부모가 날 버리고,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고, 일이란 일마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고, 답답하고, 괴로워 미쳐 버릴 것만 같고, 막막하고 끝이 보이질 않는 세상, 사는게 사는게 아닌 것만 같은 세상을 살면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심장이 두근 두근 거리고 잠을 좀 자려고 해도 잠도 제대로 오지 않고 시댁 가족들은 나를 무시하고 친구들은 나를 따돌리고.....이게 인생이라면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고....그럴 때 나의 마음을 알아 줄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 남들은 쉽게 세상을 희희 낙낙하며 잘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우리 집구석은,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고 또 꼬이고 점점 답답해져만 가는걸까.
그러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나는 선한 목자다. 아무개야 내가 너를 알고 너도 나를 아는 것이 마치도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은 거다. ”라고 내 마음에 속삭여 주고 계시는 거다.
우리 “나 같은 죄인 살리신”(305장)이란 곡으로 “아시지요 아시지요”라고 함께 찬양해 보자. 이렇게 찬양하고 찬송하고 경배하고 하소연하고 기도하고 아뢰고 나의 삶의 문제를 주께 고할 때에 내 마음에 성령이 임하신다. 주의 손길이 느껴진다.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진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안아 주시고 나를 손 붙잡아 주시고 나를 어깨에 올려 주신다.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해 주신다.
다른 양들도 인도하기 위해 오신 목자.
1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이 이 세상이 보냄을 받아 오신 목적을 다시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지금 자신을 반대하고 못 마땅히 여기고 안식일 논쟁으로 어려움을 겪게하고 죽여 없애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도 예수의 음성을 듣고 구원 받는 한 무리가 되길 원하고 계시다. 거기서 더 나가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의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민족들일지라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시다.
이는 마치도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욥바에서 머물며 선교 여행 중이던 베드로가 정오 기도 중에 비몽사몽간에 보고 들었던 환상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는 한 낮에 시장하고 배가 고팠지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서 지붕 위에 있는 기도처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때에 황홀한 경험을 하였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왔다. 큰 보자기 같아 보였다.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다 그 안에는 땅이 있는 각종 네발 짐승들이 가득했다. 기어 다는 것도 골고루 있었다. 새들도 있었다.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하는 음성이 들렸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대답했다. 그 때 두 번째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이런 똑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 후에 그 그릇이 하늘로 올려져 갔다. 베드로는 이게 도대체 무슨 환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가이사랴에서 보냄을 받은 백부장 고넬료의 심부름꾼들이 베드로가 머무는 곳에 도착하였다. 베드로는 저들을 집 안으로 맞아 들였다. 하루를 묵고 다음 날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하였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승천 직전의 예수의 말씀이 점점 실현되어 가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
오늘 날 우리의 사역이 그런 사역이 되길 원한다. 나를 통해서 나의 가족 친척 친구 세상 동료 선후배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를 믿어 구원 받게 하자.
104세를 살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신 방지일 (方之日, 1911-2014) 목사의 간증이다. 그는 평북 선천에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어머니 일찍 잃고 할머니 손에서 컸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평양숭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과 함께 목사 안수받았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 시절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였던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며 당시 원로목사였던 길선주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총회 파송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 산둥성에서 21년간 선교사로 일했다. 당시 일본은 대동아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일본인 목사들은 방목사를 비롯한 한국인 선교사를 비방하고 고발하였다. 1957년에 중국 당국은 그를 북한으로 추방하려고 하였는데 서방 언론에 그가 중국에 남은 마지막 기독교 선교사라고 알려져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한 그 해 영등포교회에서 22년간 사역하였다. 중국선교사로 활동 당시 중국내 독립군, 학도병 및 징용자 등 교포를 수십차례 귀국시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오늘날 그의 후손 85명이 나라 안과 밖에서 훌륭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뭘 먹을까 뭘 마실까 뭘 입을 까 그런 염려에 갇혀 살지 말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그리함으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자자 손손 열방을 향하여 복음 들고 나아가는 복음 전파의 용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