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가려느냐(요6:60-71) 2020. 1. 26
평소에 예수께서 설파하시는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수도 늘어 나고 있었지만 반대로 믿을 수 없고 따를 자신이 없어 예수의 곁을 떠나가 버리는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이셨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 건너편의 디베랴로 가셨을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찾아 나섰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던 때였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무리들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 불리 먹게 하는 표적을 행하셨다. 먹고 남은 것만도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거기에 모여 있던 무리의 수는 오천 명쯤 되었다.
그 후로 더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가시는 곳곳마다 따라다녔다. 백성들은 예수를 임금 삼자고 의논했지만 예수는 저들을 피하여 혼자 산에 가셔서 지내셨다. 아마도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것이다.
저물어 가는 저녁 시간에 제자들끼리 배를 타고 갈릴리 맞은편 가버나움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밤에 큰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베드로나 안드레나 야고보나 요한 등의 어부 출신 제자들이 있으니 배의 노를 저어 가며 십여 리를 더 가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높은 풍랑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다가가셨다. 제자들은 어둠 속에 유령처럼 나타난 주님을 몰라보고 두려워하였다. 그 때에 주님은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아보고 기쁘게 배 위로 영접하였다. 배는 안전하게 그들이 가려던 가버나움 해변에 도착하였다.
그 이튿날 예수를 찾아 몰려든 무리에게 가버나움 회당에서 해 주신 말씀의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요6:53-58)
예수께서는,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살을 먹지 않고 나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런 이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그것은 내 살이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으나 이것은 그런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런 말씀을 차근 차근 말씀하셨다.
그 때 예수의 이런 심각한 말씀을 듣던 무리들의 반응이 아니라 제자들이 반응이 오늘 읽은 본문의 앞 부분에 실려 있다.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에서 여럿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반응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제자란 12제자뿐만 아니라 평소에 예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과 기사와 이적을 수 없이 표적으로 체험하며 나름대로 주를 믿고 따르던 이들을 포함하는 말씀일 것이다. 가령 12제자 말고 70명의 제자들을 따로 부르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이 점점 믿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에 어려워지자 하나씩 둘씩 더이상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흩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66절에 보면,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 물으신 질문이 이것이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이런 대답을 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팔아 버릴 가롯 유다를 마귀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의 말씀을 받기는 받았으나 결국은 그 마음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길가와 같고 돌짝 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아서 열매를 결실하지 못한 불행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이런 두려운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교훈을 못 알아듣고 못 깨닫고 못 믿고 수근거리는 제자들에게 “이 말이 너희들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다시 몇 가지의 교훈을 깨닫기를 원하시며 더 설명해 주셨다.
이전에 있던 곳과 이곳.
예수는 세상 창조 이전에 하나님 안에 계시던 성자이시다. 이것을 설명하는 말씀이 요한복음 1장 1절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말씀이신 예수께서 세상 창조 이전인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이신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만 이해하지 말고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깨달음과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요한복음 말씀에서 교훈하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그를 살리리라.”(요6:54)는 교훈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살을 먹는다’ 혹은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육체의 살과 피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영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교훈한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척 공허해지고 만다.
예수는 “이전에 있던 곳에서 이 곳”에 와서 활동하셨다. ‘이곳’이란 이 세상이고 ‘이전에 있던 곳’이란 ‘하나님의 나라’즉 천국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성탄이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잠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다녀가신 것 뿐이시다.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함께 존재하셨다. 그곳에서 즉 이전에 계시던 곳에서 이 땅에, 이곳에 와서 계셨다. 이곳에 계신 동안에 우리와 똑같은 몸의 성정(性情)을 가지고 지내셨다. 배고파 하시기도 하시고 목말라 하시기도 하셨다. 잠을 이기지 못해서 배 타고 이동하시던 중에 갈릴리 호수에서 뱃고물을 베고 잠이 드신 적도 있으셨다. 친구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다. 불의한 현장을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과 비둘기를 팔로 동전을 바꾸는 자들을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기도 하셨고 동전궤를 뒤 엎기도 하셨다.
그 예수께서 기회만 있으면 교훈해 주시고 깨닫게 하길 원하셨던 곳은 “이전에 있던 곳”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비교하여 말씀하신 교훈이다.
그래서 첫 대지를 ‘이전에 있던 곳과 이곳’이라고 정한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교훈을 못알아듣고 떠나가 버리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장차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담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곁으로 되돌아 가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크리스마스 즉 성탄을 믿는다면 예수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과 부활과 승천도 믿어야 한다. 재림의 약속 또한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지극히 편파적이며 지엽적이며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구원과 영생의 복음과 상관없이 이방 종교나 우상 숭배처럼 늘 세속적인 기도 제목을 갖고 “주여 주여”하다가 끝날지도 모른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장사 잘 되게 해 주세요.
직장 안정되게 해 주시고 승진하게 해 주세요.
아들 낳게 해 주세요.
좋은 대학 합격하게 해 주세요
시집 장가 가게 해 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출세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뭐 이런 식의 기도 말이다.
물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것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하나님님의 뜻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잘 되고, 예수 모른 채 형통하고, 나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상관이 없이 승승장구하려는 것은 결코 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의 신앙의 바탕과 근본은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앞에 각자가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권력과 명예와 인기를 누리고, 뭐 이런 것에 갇혀서 연연하며 살아가려는 것이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의 전부라면 지극히 동물적이고 세속적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물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되고 복되고 형통하고 번성하는 것 좋다. 아브라함도 그런 언약 속에 출발한 것 맞다. 그러나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밟는 땅마다 다 내 소 유가 된들 그것이 어찌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얻는 인생의 영원한 대답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며칠 전에 우리나라 근대역사 중에 기업의 신화를 이루었던 한 기업가가 99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우리가 돈을 번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처럼 벌 수 있을까. 우리 중에 누가 돈을 벌어 빌딩을 짓는다면 과연 누가 123층짜리 빌딩을 지을 수 몇 채나 지을 수 있을까.
그런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면 ‘이 곳’ 즉 이 세상에서의 꿈이란 것이 지극히 상대적이다. 물론 노력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고, 도전해야 하고, 새롭게 도약해야 하는 것 맞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신대륙을 발견했겠으며 누가 미국과 같은 세계적인 연합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겠나. 누가 달나라에 다녀오고 누가 우주선을 수 없이 쏘아 올릴 수 있었겠나. 누군가가 연구하고 노력하고 창의적인 사고에 붙잡히지 않았다면 오늘 날과 같은 최 첨단 과학 문명의 혜택을 누가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겠나. 오늘 새벽 인터넷 뉴스에 잠시 보니까 영국의 런던대와 요크대 연구진은 CT 로 스캐닝하고 3C 프린팅에 의해서 3000년 전 미라의 목소리를 복원했다고 발표하였다.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정도의 차원에 머무는 말씀이 아니셨다. “예수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는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이걸 깨달아 알고 믿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것이다.
오죽 답답하면 예수께서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까지 하셨겠는가.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예수의 승천>를 그린 그림이 있다.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그 곳에 예수승천기념교회가 건립되 있다.
예수의 승천을 지켜 본 열한 제자가 성령 받고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의 길을 걸어 갔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곳에 살지만 예수께서 이 전에 계시던 그 곳으로 올라 가셨고 때가 되면 이 땅에 심판주로 다시 오시리라는 재림의 대한 믿음도 분명하게 갖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믿음이 있기를 축원한다.
영과 육.
이어서 해 주신 교훈이“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이시다. 여기서 영과 육을 대비해서 말씀해 주셨다. 어떤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우리 중에 어린 아이들은 장수 시대니까 100번쯤 아니 120번쯤 구정을 맞으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구정 명절을 천 번 만 번 지낸 이가 있나. 우리 중에 무두셀라처럼 살 수 있는 이가 있나. 무두셀라는 31년이 모자라는 1000년을 살았던 성경의 최장수 인물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드셀라처럼 천년 가까이 산들 만족이 있을까. 내가 알던 친구나 동료들 다 죽고 나는 오백년, 아니 구백년 후대에 태어난 자손들 곁에서 꼬부라진 허리로 꼭 1000년을 채우며 살아봐야 만족하게 되겠나.
육체의 만족이란 그렇게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란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꽉 들어찬 끝 없는 욕심 속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채우고 또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질 않는다. 인간의 죄는 히틀러처럼 유대인 600만명 이상을 죽여도 멈추지 않는다. 김일성 삼대 세습처럼 저들을 우상화하는 동상 5만개를 세워도 만족이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무익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였다. 그리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부활 후 사십일을 이 땅에 더 계시다가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그 주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나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고 생명이다.” 맞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영의 말씀을 하시고 영생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는 제자들조차도 예수의 하시는 말씀을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결국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반응하며 많은 제자들조차도 예수의 곁을 영영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심각한 말씀이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처럼 복음의 핵심, 진리의 근본에 관한 설교를 하면 대개의 성도들의 반응은 “오늘 설교는 어렵다. 오늘 설교는 못 알아듣겠다. 오늘 설교는 재미가 없다. 좀 쉽게 할 수 없나. 좀 듣고 좋게 할 수 없나”하고 수군거리며 자리를 비우고 떠나갈 수 있다.
61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제자 행세하던 이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질문하시면서 조목 조목 해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어떤가. 오늘 혹시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중에 이 말이 걸림이 되고 있지는 않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다. 육체의 욕망에 끌려서 살아가는 것은 지난 2019년에 있었던 버닝 썬 게이트에 관련된 자들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술 주면 술 마시고 국 주면 국 마시고 밥 주면 밥 먹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동물적이고 세속적이고 본능적인것이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지 아니하고 영의 요구룰 따라서 살아가는 성도라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가 주일 날 교회에 오면 습관적으로 “지난 한 주간 주 뜻 대로 살지 못한 것을 제발 눈 감아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이런 식의 신앙 생활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생활하는 것이어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예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상하셨으면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는 말씀까지 하셨겠나.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장면은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가롯 유다를 마귀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끝난다. 심각하지 않나. 우리는 가롯 유다처럼 사는 불행한 인생이 아니라 성령 충만 받고 초대 교회의 바탕을 이룬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마태 등과 같은 열한 제자들과 같은 길을 걸어 가야만 할 것이다. 사도행전 1장의 가롯 유다 대신에 재비 뽑혀서 빈 자리에 보충된 새 제자 맛디아도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의 길을 걸어갔다. 믿는 자의 길을 걸어갔다.
맛디아는 70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주신자, 하나님의 선물’이란 이름 뜻을 갖고 있다. 그는 부활 신앙을 갖고 주님 곁에, 12 제자 곁에 함께 다니다가 천거 받고 제비 뽑혀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에디오피아에 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나무에 달려 목이 졸려 죽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12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꾸준히 복음의 사람들 곁에서 동역할 줄 알았다. 그런 그의 성실과 겸손이 눈에 들어 왔고 그는 11사도의 천거를 받았다. 나중에도 충성된 사도의 길을 걸어 갔다. 그는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 서로 못 믿겠다고 하고 떠나가 버리던 때에 그는 예수를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주를 따르다가 예수 승천하신 후에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끝까지 지켜간 역사적인 사도가 되었다.
올 2020년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해가 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