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을 알리노라(사42:1-9) 2020. 1. 19
본문은 이사야서에 들어 있는 네 편의 종의 노래 중의 첫째 분량이다. 이사야서 42장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왜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종’이라고 하셨을까. 여기서 말씀하는 종이란 메시아로 보냄을 받을 아들의 신분을 낮추거나 비하려고 쓴 표현이 아니다. 이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자발적으로 전 인류를 그 죄와 악과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순종의 모습을 드러내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이다.
그렇다. 예수는 1절에 계속되는 말씀의 내용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시다. 여기서 예언하신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요단강에서 하늘 문이 열리며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께 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께 대하여 “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는 선언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순종하는 아들로 구별하셨고, 그 머리 위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셨다. “보라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이란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는 1절의 선언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여기 ‘정의’는 ‘미쉬파트’라는 히브리 말인데 ‘공의, 심판, 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씀의 예언은 장차 예수께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죽임 당하심과 부활의 복음이 유대인은 물론이고 열방의 모든 이방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선포되게 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소중하고 분명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때가되면 이루신다. 성경의 내용이 이를 증언한다. 9절의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애굽의 고난의 역사가 후대에 모세 때에 가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출애굽이다. 모세 때에 광야에서 예언하신 말씀이 여호수아를 앞장 세우신 하나님의 때에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신 후에 가나안 정착과 사사 시대의 역사로 이룩하셨다. 바벨론의 포로 예언이 고난의 긴긴 세월동안 입증 되었다. 때가 되니 하나님은 고난받던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 놓아 주셨고 예루살렘에 되돌아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민족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그처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는 9절의 예언은 7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탄생하시므로 성취되었다. 이사야 42장은 그런 예언을 담고 있는 ‘종의 노래’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 그의 택한 사람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택하셔서 구원의 계획을 어떻게 이룩해 가고 계신가.
의(義)로 부르시고.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의’(義)로 말미암은 것이다. 6절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이라는 말씀이 그런 내용이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권력이나 그 어떤 강한 힘이나 폭력이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공의이며 정의이며 진리 그 자체이시다. 세상 권력은 그 권력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 법을 제 멋대로 요리하려 하고 편법이 난무한다. 그래서 그 법을 잘 아는 이들이 법망을 피해 권력을 수단으로 삼고 기 싸움을 하고 세 싸움을 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거짓 뉴스로 백성들을 우민화하려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체제와 권력만 계속 유지하고 정권만 이어 갈 수 있다면 백성들의 억울함이나 상대 편의 요구는 얼마든지 묵살하고 역사의 진실 뒤편에 숨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의로 행하신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시만 하리려는 일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성취하신다. 그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넉넉하셔서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신다.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그는 언제나 한결 같이 진실과 정의를 실행하신다.
하나님은 하시려는 일을 끝까지 이루신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시며 낙담하지 아니하신다.”때가 되면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신다. 4절 끝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구원 계획은 때가 되면 종처럼 부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한 순종으로 이룩하게 하시되 그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복음이 세상 만방에 퍼져 가게 하신다.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한다는 말씀은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인류가 대대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를 앙망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놀라운 구원 계획을 의로 부르신 한 사람,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셨다. 교회력으로 요즘은 주현절 기간이다.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란 ‘주님이 나타나신 날’이란 뜻이다.
“‘주현' 또는 ’공현', ‘신현'이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神性)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을 뜻한다. 이를 서방 기독교에서는 동방 박사가 예수를 찾은 때로 본다. 그러나 동방 기독교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때로 본다. 이 때로부터 예수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주현절의 절기 색은 ‘흰색’이다. 흰색은 “흠 없는 순결, 거룩함, 완전, 위엄, 영광, 즐거움을 상징하는 신성의 색”이다. 눈 여겨 보면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흰색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강단보와 양초의 색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이는 흰색으로 출발해서 주현절 기간 동안에 “성장과 소망과 생명과 성결과 영원히 불변하는 거룩함”을 상징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 없는 나의 삶을 상상하여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나의 일상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 부르셔서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손을 잡아 보호(保護)하시며.
6절에 보면, “내게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신 후에 수 없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셨다. 심지어는 고향 마을인 나사렛 사람들 조차도 그를 회당에서 끌어내서 나사렛 마을의 낭떠러지로 끌어다가 밀쳐 죽이려고 하였다. 요즘 요한복음을 날마다 묵상하고 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뎃스다 연못 곁에서 만난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셨다. 그런데 이 일 후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행했다고 시비하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5장 16절과 18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고 죽이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려 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그렇게 시작해서 예수는 가는 곳곳마다에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미움의 대상이었다. 저들은 호시탐탐 예수를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때 그 때 마다 하나님은 예수를 손 잡아 보호해 주셨다. 우리는“그러면 제자 가롯 유다에게 배반을 받고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하여 죽음 당하시도록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버리셨나. 왜 손 붙잡아 보호해 주지 않으셨나” 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셨다. 거기 예루살렘에 예배하려고 온 이들 중에 헬라인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예수의 제자 빌립을 찾아 왔다. 그리고 “예수를 뵈옵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빌립은 그 상황을 안드레에게 말했고 안드레와 빌립이 함께 예수 곁에 가서 그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3-28)
그 순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예수 곁의 제자들과 무리들은 “천둥이 울었다” 혹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반응하였다.
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이 붙드시고 기뻐하시고 택하신 종을 통하여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려고 아들 예수를 손 붙잡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헤롯의 칼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셨다. 나사렛에서 성장기를 갖기 까지 매 순간 예수의 손을 붙잡아 보호하고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과 그 뒤에 부활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위하여 그 모든 순간 순간마다 예수를 손 붙잡아 주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기 전날 밤, 밤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이 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구원의 밀알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 한 알의 밀알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죄 사함과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선물해 주셨다.
우리는 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기를 품에 안아 키운다. 젖 먹여 키운다. 그 아기가 독립된 인격으로 장성하기까지 손 붙잡아 키운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 아들, 그 딸로 하여금 무엇을 기대하나. 하나님이 나의 가정에 맡겨 주신 그 한 생명을 손 붙잡아 보호하고 양육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성장하도록 키워 내야 하는 것이 주를 믿는 성도의 가정의 사명이 되어여 한다.
오늘 유치부와 유초등부 어린이들이 오후에 “파브르의 꿀벌나라 대 모험”이란 뮤지컬에 초대를 받아서 간다. 파브르(Jean Henri Fabre, 1823-1915)가 누구인가. 프랑스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너무 집이 어려워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서 얼마간 지냈다.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이 역사적인 인물 장 엥리 파브르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중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교사로 지냈다. 그는 식물 뿐만 아니라 특히 곤충 연구에 했다. 거미, 벌, 딱정벌레, 메뚜기, 귀뚜라미 등등 그의 관찰이 시작되면 그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못하던 일들이 관찰되고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92년을 산 그는 30여년 동안에 <곤충일기>라는 제목으로 10권의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오늘 오후에 어린이들이 뮤지컬로 보게 될 <꿀벌나라 대모험>이란 작품의 내용도 어린이들에게 상상력에 불을 붙여 주는 그런 내용이 전개될 것이다.
벌들의 세계만 관찰해도 그 속에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한 창조의 신비가 담겨 있다. 하물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손 잡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셔서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온전한 구원 대업을 완성하셨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며 부활 복음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손 잡고 보호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을 손 잡아 붙들어 인도해 주시길 원하신다.
올 한해 주님께 손 붙잡혀서 승리하는 범사가 되길 축원한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라는 찬양을 부르자.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 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 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백성(百姓)의 언약(言約)과 이방(異邦)의 빛이 되게 하신다.
여기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하나는 ‘백성의 언약’이란 말씀이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 민족 삼으셨다. 그러나 번번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막대기와 채찍으로 동원하셔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연단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영원히 언약을 파기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언약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을 대신할 자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사42:8) 여기서 ‘여호와’라는 말씀은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역사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계신 창조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을 대신할 자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과 찬송을 보존하신다. 하나님은 영광의 본체시며 영원히 찬송 받으실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눈 먼 자의 눈을 밝히신다.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신다.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신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회복과 치유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늘을 창조하고 펴신 분이 누구신가.
땅과 그 소산을 내신 분이 누구신가.
땅 위에 있는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이길 자가 있는가.
하나님은 절대로 쇠하거나 낙담하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러므로 진실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고 완전하시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올해도 우리 각 사람 안에 찾아 오셔서 새 일을 행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살아가는 범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이방일 수 있다.
당신의 부모가 이방일 수 있다.
요즘 기도하고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 딸이 이방일 수 있다.
교회 다니자 예수 믿자고 권하면
“여보 내가 알아서 해요. 신앙 문제 만큼은 선을 넘지 맙시다.”
“어머니, 아버지, 내가 알아서 할께요. 나한테 교회 다니냐 예수 믿자 그런 말씀만은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그렇게 반응하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그 가족의 마음 속이 이방일 수 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냄을 받으신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라”고 언약의 성취와 완성을 선언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방의 빛”이 되게 하셨다.
올 한해 가족들의 마음에 일일이 이 구원의 빛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길이 길이 찬송하는 기쁘고 즐거운 일이 가정마다 가득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