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지막 분부(마28:16-20) 2020. 6. 7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말을 남긴다. 평균적으로 사람이 한해동안 하는 말을 다 글로 옮겨 적으면 400페이지 분량의 책 132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읽을거리, 남길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가 숙제이다.
역사에는 유명인사들의 그런 말들이 전해진다. 가령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파스칼,“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히포크라테스. 이처럼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남긴 마지막 말은 더욱 더 그 상대방을 상징한다. 슈베르트는 31살에 죽었다. 37년 세월이 흐른 후에 그의 친구가 슈베르트의 마지막 작곡하던 미완성의 교향곡을 발견하여 발표하였다. 그것이 잘 알려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석가모니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을 마지막 말로 남겼다고 한다.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불교의 성철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 않나.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는
“내게 최고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라는 말을 남겼다.
요즘 우리는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서 모세가 120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남긴 세 편의 설교 말씀을 차근 차근 묵상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운명하셨다. 그리고 부활 40일 후 승천 하시기 전에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이 임하고 권능 받아 땅끝까지 증인되는 삶을 살라고 분부하셨다.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하던 120여명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
성령 강림 주일 다음 주일인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중에 마태의 관찰을 묵상하려고 한다.
사복음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부터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를 다룬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사 복음서들 마다 그 마지막 장면의 기록이 거의 같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한결같이 예수의 승천 장면을 다룬다.
요한복음의 끝인 21장은 어떤가. 일곱명의 제자들이 부활 예수 만난 후에도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그물을 내려 고기 잡으려 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배 오른 편에 그물 내려라 그리하면 잡으라라” 는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이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았다. 예수께서 그 새벽에 갈릴리 해변에 숯불을 지펴 놓으시고 생선과 떡을 구워 제자들로 하여금 먹게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차례의 질문과 대답을 들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다. 요한복음의 끝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그 기록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얼마나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는가를 강조한 표현이다.
오늘은 교회가‘삼위일체주일’로 지킨다. 오늘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의 마지막 말씀을 대하시는 중에 은혜가 되기를 원한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를 경배하던 11제자들의 모습과 여전히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마태는 꼭 집어 언급하고 있다. 여기 의심했다는 뜻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부활 이후의 예수의 모습이 부활 이전의 모습과 다르고 너무나 성스러워서 의심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 하나는 예수의 부활 사실을 의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보면 예수의 부활 이후의 모습을 오백여 형제가 동시에 목격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를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의 부활 시실을 의심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못 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고 만져 보게 하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오늘 날 우리는 어떤가. 나는 신구약의 하나님이 행하시고 예수께서 행하신 그 많은 기사와 이적을 그대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가.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을 믿는가.
신약 성경에는 ‘의심’했다는 표현이 이곳과 마태복음 14장 31절에 단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에디스타산’이란 이 단어의 뜻은 불신앙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주저하다, 망설이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한 밤중에 예수께서 풍랑이 심하게 이는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배 안에서 고생하는 제자들 곁으로 다가 가셨다. 어둠 속에서 유령인가 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만일 주여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요청하였다 . 그 때에 예수께서 ‘오라’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물 위로 내려 서서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몇 걸음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바람과 풍랑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그리고 베드로의 손을 잡고 예수께서 배 위에 오르시자 바람이 잔잔해졌다. 그 밤 중에 배 위에서 만난 예수께 제자들은 절을 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의심이 무엇인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뭘 의심하게 되는가. 어떤 경우게 주저하고 어떤 경우에 망설이고 어떤 경우에 불신앙에 휩싸이게 되는가. 우리가 찬송은 찬송대로 부ㄹ고 의심에 휩싸일 때에는 정신 없이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에 갇혀서 지내다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라는 찬송가 1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에 순간마다 일어나는 의심과 불신앙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기며 사는 승리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예수의 선교 명령 4가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선교 대위임령’이라고 한다. 무슨 내용을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은 아들 예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 마태복음 4장에서 대하는 대로 40일간 금식하신 예수께 마귀가 찾아왔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네게 주리라”는 마귀의 유혹은 이미 하늘과 땅의 권세를 위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시험거리가 될 수 없었다. 예수는 마귀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대적하여 물리치셨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무슨 명령을 하셨는가. 네가지 내용이다.
-가라.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지난 이천 년 기독교의 역사, 교회의 역사는 이와 같은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 이들에 의해서 이룩되어 온 역사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의심 많던 도마를 포함하여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숨고 하던 베드로와 그 모든 제자들이 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거룩한 죽음과 순교의 피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어 온 것이다. 그 누가 그런 죽음을 원하였겠는가. 그러나 열방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려던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맛디아를 포함한 12제자들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거룩한 희생 위에 오늘날 이만큼의 세계 복음화와 그 수 많은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 135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 이룩된 거룩한 일이란 없다.
어제가 현충일이었다. 나라도 그렇지 아니한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 안정을 찾고 발전한 나라가 이 땅 그 어디에 한 국가라도 있는가. 이는 개인, 가정, 기업, 국가 다 마찬가지이다. 1941년 2월 9일 영국 수상 처칠의 BBC라디오 연설의 내용처럼 “피와 땀과 눈물과 노력”(Blood, Toil, Tears and Sweat)이 없이 발전한 경우란 그 어디에도 없다.
예수 믿어 복을 받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 우린 그런 정도의 복을 사모하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부활 복음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며 죄 사함과 구원과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그 부활 복음의 영광을 증거하며 전파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임 당하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 네로의 핍박 아래 목 베임을 당하였다.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화형 당하여 순교하였다.
세배데의 아들 야고보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아 죽임 당하였다.
빌립은 몹시 채찍에 맞은 후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마태복음의 기록자인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선교하다가 창에 찔려 죽임 당하였다.
또 다른 야고보는 구타 당하고 돌에 맞아 죽임 당하였다.
가롯 유다의 빈 자리에 제비 뽑혀 제자가 된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매질 당하고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저들이 섬기는 우상인 세라피스를 기리는 거대한 종교 의식을 행하는 날에 몸이 찢기는 처형으로 순교 당하였다.
도마는 인도 선교 현장에서 창이 몸을 관통하는 처형을 받고 죽임 당하였다.
바돌로매는 십자가 처형으로 순교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의사 누가는 그리스의 우상숭배하는 이방 제사장들에게 붙잡혀 감람나무에 목 매달아 죽이는 죽임을 당하였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 당하였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마땅한 일로 여겼었다.
자기 밭을 팔아 베드로와 사도들 앞에 갖다 바쳤던 바나바도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의 현장을 누비다가 붙잡혀 주후 73년 경에 순교 당하였다.
그처럼 부활 복음의 전파는 가치가 있고 영원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신구교의 선교 초기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거저 된 복음 전파의 현장이 있는가. 거저 큰 겨자나무처럼 자라난 교회가 있는가. 아니다. 누군가가 희생하고 누군가가 헌신하고 누군가가 자기 몸을 아까지 않고 불사르고 누군가가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앞장 서서 섬겼기에 이렇게 우상 숭배가 강하고 이단과 사이비가 들끓는 세상 중에서 왕성하게 부활 복음이 전파되어 왔고 전파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잔치 자리에 목 베임을 당하여 쟁반 위에 그의 머리가 담겨 나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33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죽은 자 사흘 만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 시키시고 부활 후 40일 만에 하늘 나라로 불러 올리셨다. 승천하신 예수는 그의 승천을 본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모든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 성도다운 믿음이다.
일본은 기독교인의 수가 많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 초기에 순교 당한 기독교인의 수는 우리나라의 순교자들 수보다 훨씬 더 많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교회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였으니 말이다.
나도 그 누군가의 영혼 사랑과 전도에 의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처럼 할 수 만 있으면 누군가에게 다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의 제자 삼고 물 세례와 성령 세례 받도록 돕고 주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임하고 권능을 받아 복음 전할 땅 끝이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가 낳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일 수 있다. 지리적인 먼 곳이 땅끝이 아니라 복음 앞에 마음 문을 꼭 닫고 있는 내 가족 중의 그 누군가가 땅끝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 삼고 세례 받게하고 주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양육자의 희생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올 여름을 맞이하며 전도의 열매를 거두는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시는 예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님을 믿는 내 안에 임재 하신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그런 믿음으로 살았다.
지난 이천년 기독교 복음은 이방 종교의 박해와 핍박과 대립 속에서도 한결같이 이 부활 복음의 확신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리라는 주님의 약속 안에서 살아 왔다. 마스크를 벗고 살 수 없은 이 비대면의 시대, 거리 두기의 난세에 마음 만은 더욱 가까워지고 사명 만은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 지는 복음의 역군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