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가르치라(시127:1-5) 2020. 5. 3 어린이 주일
가정을 잘 세워나가는 것은 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하다. 아들딸을 낳아서 잘 가르치는 것은 거대한 왕국을 통치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물론 “국가가 없는 가정이 무슨 소용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하나님은 나라나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가장 먼저 가정을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가정이 되고 자녀가 탄생되면서 이 땅에 인류의 역사가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국가보다 교회보다 가정이 우선이다. 아들딸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제대로 잘 키워 내는 것은 나라를 발전시켜가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일이다.
한 아기를 훌륭하고 유능하게 잘 키워 내면 그 아기가 자라나서 왕국이라도 건설하고 위대한 국가를 세워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한 아기가 삐뚤게 잘못 자라나면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뭇솔리니나 김일성이나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처럼 인류 역사에 큰 해악을 끼치는 심각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태어난 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 인물로 자라나는 법이다. 가르침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이 없이는 변화와 성숙과 성장도 없다. 물론 깨달음이라는 것은 학교의 교실 안에서만 얻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삶과 환경 전체가 인생의 학교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그 무엇인가 교훈과 영향을 주는 스승들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서로를 대하면 모든 주변 사람이 다 나의 스승이고 협력자이고 인생 순례의 소중한 동반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그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무릎 위에서 컸다. 마리아의 남편이 된 요셉의 돌보심 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사렛 마을에서 살아가던 어머니 마리아와 그 남편인 요셉이 집안에서 이야기해주는 날마다의 가르침이 있었다. 평범한 것 같은 가정과 마을과 나사렛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할 때 마다의 경험들은 어린 예수의 성장기에 사람 사는 세상을 배우는 학교였다. 예수는 그런 환경에서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점점 사랑을 받는 주인공으로 성장해 갔다.
시편 127편은 솔로몬의 고백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었다. 열왕기상4장 32절 이하에 보면 그는 3,000잠언을 말하였다. 1005편의 노래를 지었다. 풀과 나무와 짐승과 새와 땅 위에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 등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열왕기상 4장에 보면 천하 모든 나라의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의 말을 들으러 금은보화와 향품 등 값비싼 조공을 약대에 싣고 찾아 왔다. 수 많은 신하들을 보내서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고 배워 오도록 하였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스바의 여왕은 친히 수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엄청난 금은과 보석과 향품을 낙타에 싣고 솔로몬을 방문하였다. 스바 여왕은 직접 솔로몬을 만나본 후에 소문에 듣던 것보다 갑절의 지혜가 넘친다고 찬하하며 놀라워하는 감동을 숨기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이요 딸이며 그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로 태어난다. 고아라도 부모 없이 태어나는 인생이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인물은 없다. 누구나 다 가르침을 받고 지혜를 터득하고 양육에 의해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에스더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촌 오빠였던 모르드개는 부모를 일찍 잃은 여동생 에스더를 친딸처럼 돌보며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양육하였다.
모세도 어머니가 낳았고 사무엘도 다윗도 다 어머니가 낳았다. 솔로몬도 아기로 태어났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린 누구나 다 어머니가 태 중에 임신기간을 거치고 피를 쏟아가며 심한 산고를 겪어서 낳았다. 이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이고 예수의 성령으로 인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잉태와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솔로몬은 스무살에 왕이 되었고 사십년동안 왕이었다. 지혜시로 구분되는 시편 127편은 그런 그가 언제 쓴 시편인지는 모른다. 다면 이 시편을 대하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육해야 할까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여호와를 알고 믿는 자.
‘0’은 아무리 그 수가 많아도 ‘0’일 뿐이다. 그러나 몇 개의 ‘0’이든 그 앞에 ‘1’이란 숫자가 붙는 순간에 ‘0’은 더 이상 ‘0’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의 상태는 아무리 세상의 지식을 통달하고 여러 개의 박사 학위를 받고 수십 권의 책을 썼다고 해도 아무것도 아니다. ‘0’과 같다. 물론 그 만큼의 전문 분야에 대한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남들이 꽤나 알아주는 지위를 누리며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산다고 해도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고 믿기 전에는 그 모든 것이 마치도 ‘0’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다. 별게 아니다. 그 자랑하고 우쭐대며 교만하며 뽐내던 것들이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만다. 이 땅에 추구하는 것들 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이다.
4월에 우리의 눈길을 끌던 그 아름다운 봄꽃들이 지금 다 어디로 갔나. 5월이 되면서 새롭게 피는 꽃들이 며칠을 가겠나. 일 년 내내 시들지 않는 꽃이 있나.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고 하지 않나. 지위와 권력과 명예와 부와 지혜가 대단하기로 하면 동서고금에 솔로몬 왕만한 인물이 그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솔로몬이 무어라고 고백하고 있나.
무엇이 헛되다는 말인가. 어떤 경우, 어떤 상황이 헛되다고 말하고 있나. 집이란 몇 명의 가족이 서로 더불어 사랑하고 의지하며 마음을 모아 더불어 살아가는 최소한의 인간관계가 아닌가. 가정은 혈연 공동체이다. 피를 나눈 가족들이 살아가는 곳이 집이다. 성(城)이란 왕이 왕족과 신하와 백성들과 더불어 성곽을 쌓고 그 성 안의 주민이 십만 명이든 백만 명이든 자신의 최고 권력을 갖고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 성(城)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그 생활이 헛되다고 느끼게 되나.
최근에 무슨 글에 보니까 한반도에만도 1,000개가 넘는 성곽이 있다고 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은 남한과 북한을 나누는 휴전선이 성곽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반만년을 이 땅에서 살아온 선조들은 이 넓지 않은 땅에서 서로 처처에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자기들만의 왕국 건설을 꿈꾸어 왔던것이다. 우리가 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그 정도 말고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팔도의 처처에서 산과 계곡마다 성곽을 쌓았다. 크고 작은 왕국 건설을 꿈꾸며 죽고 죽임당하는 살육전을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뭘 교훈하고 있나. 집을 세우는 일이나 성을 지키는 일이란 것이 여호와께서 세워 주시고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가 다 헛것이 되고 만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과로에 지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살고 부지런히 뛰고 달리며 앞만 보고 달릴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는다면 다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걸 아들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깨닫게 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최선을 다하고 도전하고 개척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다 필요하다. 좋다. 중요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은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노력과 수고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아들딸들을 가르칠 때에 어려서부터 이걸 깨닫도록 가르쳐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재주와 실력을 키우는 것 다 좋지만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한다는 신앙 고백 말이다.
요즘 날마다의 묵상분량으로 대하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강조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가 오직 유일한 여화와이시니”라고 가르쳐야 한다. 비싼 돈 주고 학원 과외만 시키려고 하지 말고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계속하여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인생이 헛되다는 탄식이 나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고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 내야 한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2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자”란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인생으로 키워 내면 안된다. 여호와께서 이 땅에 인생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도록 자라나게 하면 안된다. 노아시대의 백성들이 그랬다. 창세기 6장의 내용이 그런 교훈을 준다. 그 당시에 인류가 번성하였다. 시집가고 장가갔다. 외모에 취해서 살았다.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이란 용사요 명성있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나라마다 더 빨리 달려가고, 더 크게 더 높게 짓고, 더 멀리 날아가려고 무한 경쟁을 벌여 왔다. 요즘 인천 공항 뿐만 아니라 나라들마다 공항이 텅텅 비어 있다. 하늘길이 멈추어 섰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19바이러스가 70억 인류의 모든 일상을 멈추어 세웠다. 큰소리치고 떵떵대던 미국이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다.
요즘 TV 볼 시간이 없이 지낸다. 신문도 잠간만 보며 지냈다. 주말에 신문 잠깐 보니까 JTBC 의 ‘부부의 세계’라는 주말 드라마의 줄거리가 해설된 것을 보았다. 과거에 ‘스카이 캐슬’이란 드라마를 연출한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세상의 0.0001%의 상류층의 삶을 들여다 보는 드라마들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다. 노아 시대의 백성들이 그랬다. 특히나 네피림의 일상은 더했다. 네피림이란 장부라는 뜻이다. 남들보다 키가 더 크고 어깨가 더 넓고 더 멋있고 더 늘씬하고 더 잘생겼고 더 가졌고 더 유능하고 더더더의 착각과 환상 속에서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앞만 바라보고 달려 가던 시대가 노아시대였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노아 홍수가 무엇인가. 왜 그렇게 되었나. 창세기 6장 5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5-7)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8-9)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사는 자의 삶이란 이런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다. 잠이 무엇인가. 왜 잠이 안오나. 물론 갱년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면 갱년기(更年期)란 무엇인가. 그동안 젊어서 쓰던 신체의 상태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노년기를 살아갈 준비를 하도록 신체의 리듬을 재 구성하시는 기간이 아닌가.
잠을 주신다는 말씀은 평안을 주시고 안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감사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잘 나가는 남들만 부러워하지 말고 날마다의 일상 속에서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로 자라나도록 키워 내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하다. 아니 제일 중요하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공부 공부 한다고 다 서울대학교 가나. 다 유명한 스타가 될 수 있나. 다 대통령 되나. 그러면 주민 센터의 대민 업무는 누가 맡아 보나. 다 장군이 되나 그러면 최 전선에서의 싸움은 누가 싸우나. 다 대기업의 CEO가 되나. 그러면 24시간 생산 현장의 그 많은 수고는 누가 다 맡아서 하나. 우리는 단지 심고 물주는 일만 하면 된다. 그것이 자녀를 가르치는 일이다. 하나님 안에서 심고 물주다 보면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다.
“예수사랑 하심은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563장 ‘예수사랑하심을’)
이런 찬송을 부르게 하고 이런 찬송이 자신의 신앙고백이 되는 아이들로 자라나도록 자르쳐야 한다.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게 우리 각 사람과 우리들의 자녀와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기대하심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기드온, 드보라, 사무엘, 에스더, 에스라,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엘리야, 엘리사, 사도 요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의 오라비 나사로 저들 모두 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잠을 주시던 자들이다. 베드로, 야고보, 바돌로매, 도마 등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등은 순교의 두려움도 하나님 사랑, 예수의 부활 복음을 사랑하는 힘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여호와의 기업이요 상급인 자.
“무자식 상팔자”란 말이 있다. 반대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아들딸 여럿을 잘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어찌 부부의 선택인가. 남편의 결정인가 아내의 판단인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아들딸이 태어나고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나. 자식은 내가 낳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다. 상급으로 주시는 것이다. 기업(企業)이란 말은 ‘선물’(膳物)이란 말이다. 상급(賞給)이란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恩惠)’란 뜻이다. 그렇지 않나.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란 말이 있다. 낳는 수고도 귀하지만 진자리 마른자리 거두어 가면서 아들딸을 낳아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잘 길러 내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딸을 낳아 기르는 일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교훈해 주셨다. 맞다.
아들딸 낳아서 훌륭하게 신앙으로 잘 키워 내면 교회의 일꾼, 사회의 일꾼, 나라의 일꾼, 시대의 일꾼, 열방의 일꾼, 역사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요즘 시끄러운 n번방 사건의 조주빈도 그의 엄마가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를 낳은 어머니나 아버지 앞에서 여호와의 기업이요 여호와의 상급 인생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왜 ‘여호와 여호와’ 하며 자라나도록 키워야 하나. 왜 ‘예수 예수’ 하며 자라나도록 양육해야 하나. 왜 ‘주여 주여’ 하며 성장하도록 붙들어 주어야 하나. 아브라함처럼 나이 백세에 낳은 아들도 복이지만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은 자”들이다.
야곱은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대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그러나 야곱이 받은 복이 무엇인가. 야곱은 낳은 열 두 아들이 열두 지파의 족장이 되었다. 물론 그 많은 아들들 중에는 별의 별 아들들이 다 있다. 이 시간에 그걸 일일이 나열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삭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에서 야곱의 때에 창성하게 이루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야곱이 열한번째로 낳은 라헬을 통한 아들 요셉이 그의 가문의 역사를 바꾸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17살에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갔다. 그러나 그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떠나질 않았다. 요셉은 그야말로 여호와의 기업, 여호와의 상급인 인생을 살아갔다. 그런 아들 하나만 있어도 역사가 바뀌는데 생각하여 보라.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127:5) 잘 난 자식들이 화살통에 가득하게 되면 성문에서 원수를 만나 담판하게 되어도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된다.
그런 아들딸들이 자라나는 가정, 그런 아들딸을 키워 내는 가정, 교회, 나라, 민족이 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바라고 원하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바라고 원하고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복된 가정의 달 오월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