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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시116:1-4)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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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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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22 23:46 조회 9,967 댓글 0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시116:1-4)      2020. 4. 26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제 나름대로 기도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기도하는 상대가 누구냐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우상 앞에서 빈다. 피조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기도 한다. 

지금이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이다. 라마단이란 무슬림들의 아홉 번째 달 이름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을 무슬림이라고 한다. 며칠 전인 4월 24일부터 5월 23일까지 한달 동안이 올 2020년 라마단 기간이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타는 듯한 더위와 건조함’을 뜻하는 ‘라미다(ramida)’ 또는 ‘아라마드(arramad)’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뜨거운 태양 볕으로 인해서 마르다 못해 좍좍 갈라진 땅바닥과 같은 상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라마단 기간 중에 낮에는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빈속으로 느끼는 타는 듯한 갈증과 고통을 의미한다.

이슬람교에서 라마단은 코란이 계시된 신성한 달로 여겨서 한 달 동안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금식한다. 담배도 피지 않는다. 부부 생활도 멀리한다. 세계의 16억 이슬람 인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야야만 한다. 단, 어린이, 여행자, 군인, 임신부, 병자는 예외이다. 남자는 8살, 여자는 7살 때부터 라마단 금식에 참여해야만 한다. 

라마단 기간 중 무슬림은 타라위(tarawih)라 부르는 저녁 기도를 강조한다. 이것은 20개의 연속적인 기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달 동안 전체 코란을 공동으로 암송한다. 무슬림들은 이 기간에 마호메트가 히라산에서 명상하던 중 첫 계시를 받았다고 믿고 기도한다. 특히 27일째 되는 밤 첫 계시를 받은 것으로 믿고 이때를 '능력과 거룩한 밤'(Laylat al-Qadr)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날은 밤새 깨어서 축복과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따라서 헌신적인 무슬림들은 마지막 10일 동안 아주 높은 영적인 열정을 갖고 기도한다. 27일째 밤에는 밤을 세워가며 기도하고 코란을 암송한다. 그리고 이때 환상이나 계시가 임하면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신으로부터의 계시라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무슬림의 이러한 강한 훈련과 공동체 형성이 무슬림을 어느 종교인들보다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는 저들의 그 열심과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만큼은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마다 나름대로 기도와 금식과 고행을 강조하는 계율이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믿는다. 이 세상에 종교가 다양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각 사람을 택하여 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크나큰 은혜이고 복된 일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기도는 그 어떤 타종교인들의 기도 생활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또한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시편 116편은 기도문이다. 누구의 기도인지는 알 수 없다. 혹자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나서 왕궁을 비우고 피신하며 어려운 날들을 지내던 중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쓴 기도문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군가가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과 은혜를 체험하며 기도한 내용이다. 기도 하던 중에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구구절절이 고백하였다.   

시편 기록자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지난 주일에는 “찬송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베드로전서 말씀을 묵상하였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정하였다. 시편 기자는 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심으로.
그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직장의 선후배 혹은 동료이든 그 누구이든 내 목소리를 알아봐 주어야 고맙고 반갑지 않나. 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요청을 하면 상대방이 그 요청에 대하여 반응을 해야 좋지 않나. 내 요청에 대하여 가타부타 어떤 응답이 주어져야 마음이 시원하지 않나. 그런데 벽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대방이 묵묵부답이거나 전혀 반응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김춘수(1922-2004) 시인의 시 중에 ‘꽃’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그의 이름’이란 각 사람의 존재를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 꽃이 무슨 꽃이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꽃들은 그 어떤 꽃이든 그 자체로 꽃이기 때문이다. 꽃의 모양이 화려하든 그렇지 못하든, 향기가 진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모든 꽃은 꽃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나.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라고 표현하는 그 상대방 그 자체로서 하나의 꽃이며 독립된 인격이며 각자가 ‘모두 그 무엇’인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과 같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을 그렇게 대해 주시길 원하실 것이다. 문제는 이 세상의 각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대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요즘처럼 맑고 좋은 공기의 필요성을 절감한 때가 언제였을까. 공기 속에 떠다니는 비말 중에 만약에 코로나 19 바이러스 세균이 내 호흡기에 들어오는 날에는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면 한 모금의 숨을 들이 쉬고 한 모금의 숨을 내 쉬는 이 동작이 얼마나 거룩하고 신성한 동작인지 모른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왜 기도하며 살아가나.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며 살아가나. 우리는 무슨 내용을 기도하며 살아가나. 지금 시편 기자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하였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늘 TV에서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어서 현직 대통령의 목소리를 안다. 그러나 내가 그와 전화 통화할 기회도 없겠지만 만약에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에 “접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그가 어찌 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아들딸들은 아버지와 통화할 때에 전화가 연결되자 마자 금방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것이다.

우리 각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관계이다. 그런 관계여야 맞다. 하나님은 그런 관계이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음성을 아신다. 마치도 목자가 양의 모양과 생김새와 목소리와 장단점과 특징과 체질을 아는 것과 같다. 선한 목자는 각각의 양의 특징을 섬세하게 살피고 자세하게 돌본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도 각각의 양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목자와 양과의 관계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의 기도 생활이란 것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일방적으로 늘 기도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묵묵부답이면 되겠나.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음성도 아시고 내가 기도하는 제목과 내용도 아시는 관계가 되어야 정상이 아닌가. 지금 시편 기자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는 밤낮 간구하고 부르짖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내게 아무 응답이 없으시다면 누가 하나님께 기도하겠는가.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끓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시다. 엘리야 선지자 때처럼 바알이여 바알이여 하고 한 나절 동안 몸에 피가 나도록 상처를 줘 가며 목이 터져라 불러 봐도 바알은 응답하는 신이 아니다. 죽은 신이다. 우상이다.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돌을 다듬어 만는 우상이 어떻게 응답할 수가 있나. 금과 은을 녹여 부어 만든 우상이 어떻에 응답할 수 있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계시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 우리는 그분을 여호와라 부른다. 김춘수의 시 내용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내게 와서 꽃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면 그 분은 내 음성을 들으시고 나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3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사망의 줄, 스올의 고통,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도 기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꼭 드라마의 대서처럼 “살다 살다 참 별의별 꼴을 다 겪으며 산다.” 그러나 두 무릎이 흔들리고 턱뼈가 덜덜 떨리는 고통과 충격과 두려움과 고통과 환난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더 있나. 기도할 수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죽음의 순간이 찾아 온다고 해도 그렇다. 헨리 나우엔(1932-1996)은 “죽음은 영원한 치유다”라고 말했다. <빙점>의 저자이고 100여권의 소설을 쓴 일본 기독교계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미우라 아야꼬(1922-1999)는 “죽음은 나의 마지막 사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나.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져 있는 동안에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며 살아간다. 이런 생각도 하고 저런 생각도 하며 살아간다.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며 살아간다. 이런 음식도 먹고 저런 음식도 먹으며 살아간다. 이런 것도 마시고 저런것도 마시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단 죽음의 순간이 찾아 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이날 까지 이 순간까지 나에게 이 땅에서의 생명을 부여해 주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이다. 

그렇지 않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생이 다만 이 세상의 생 뿐이라면 이처럼 환난과 고통이 극심하고 ‘사망의 줄과 스올 즉 지옥의 고통’이 날아드는 화살처럼 엄습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평안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음성을 아시고 나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그렇게 불쌍한 생을 살아가 끝나는 인생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7-58)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나의 음성도 아시고 내 간구에 응답하시리라는 소망을 갖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내 기도에 귀 기울여 주셨음으로.
2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은혜로운 간증인가. 그렇지 않나. “난 밤낮 기도해도 하나님께 응답된 기도가 단 하나도 없다.”혹시 그런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쩌면 그런 기도의 생활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 

예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기도 생활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지 않았는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는 고백과 선언에 보면 이 시편 기자는 평소에 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응답해 주신 간증이 넘쳐나는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답답하고 우울한 이 때지만 여전히 소망을 갖고 깨어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가 내 영혼을 건지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전능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여호와여 여호와여”하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어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아도 아신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크고 비밀한 일들을 응답해 주시는 자상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며 무어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여호와여 주께 간구합니다. 내 영혼을 건져 주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있다. 맞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간구하면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증거가 넘쳐 나게 해 주실 줄로 믿는다. 

7절 끝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간구하면 인색하게 응답하시는 마음씨 나쁜 의붓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되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벌써 사월이 다 지나가고 오월이 다가 오고 있다. 올해는 네 달을 코로나 19의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 가운데 지낸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다가오는 오월부터 사회적 안전 거리 지키기와 보건 수칙을 잘 준수하면서 이전보다 더 열심을 갖고 주님을 따르고 믿고 섬기며 은혜로운 간증의 주인공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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