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골3:1-4) 2020. 4. 12 부활주일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에도 부활이란 없다. 불교는 윤회설이다. 돌고 돈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서 적선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다음 생에 가서 존귀하게 태어난다고 믿는다. 잘못하면 다음 생에 가서 개나 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인간답게 사는 길을 교훈하는 도덕, 윤리의 강조일뿐이다. 공자, 맹자, 노자 등의 가르침이란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교훈할 뿐이다. 이슬람의 내세관은 어떠한가.
이슬람의 내세관은 매우 강력하다. 이슬람은 내세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에 대한 약속을 강조하고 가르친다. 거룩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성전(聖戰) 즉 ‘지하드’에 참가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이슬람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알라의 종이 된다. 저들은 금으로 만든 집을 보상으로 받는다. 그리고 풍성한 음식과 함께 고급술을 하사받는다. 미소년들의 시중을 받아서 영원한 젊음을 누리면서 72명의 아름다운 여인들(후리스)과 함께 백 명의 남자의 정력을 받아서 영원히 살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알라를 볼 수 있다고 쇄뇌한다.
왜 많은 무슬림들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지하드에서 헌신적으로 자신을 불태우는가에 대한 대답이 이것이다. 그들은 이 엄청난 복을 받기 위해서 다양한 전략적인 지하드를 실시하고 있다. 평화적 단계, 준비 단계, 공격적인 단계, 확장단계로 진행된다. 각 단계마다 각각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각 단계마다 해당되는 지하드가 각각 다르다.
그들은 개인의 영적인 다툼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칼을 들고 상대방을 정복하는 힘의 지하드까지 각기 다른 전술과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지하드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테러 사건이 지난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미국 뉴욕 맨하튼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건물을 비행기 공격으로 테러한 사건이다. 그 양태나 방식이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이슬람은 아직까지는 평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지하드의 진행방향으로 일정하게 흘러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러한 이슬람의 지하드의 경로를 파악해야만 한다. 지금은 비록 그 세력이 미약해서 평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지하드로 나갈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지금의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이단, 사이비의 폐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포교 전략을 미리 알고 준비해서 이슬람의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이슬람의 지하드와 내세사상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한 후 이를 기독교들이 제대로 알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성경적인 내세관과 비교해서 이슬람의 교리가 얼마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것임을 알리고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도록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
물론 무슬림 중에서 성경적인 내세관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슬람의 내세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한국교회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인 내세관을 알고 이슬람의 내세관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이것은 그냥 올해도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을 맞았구나 하고 지나가는 정도의 신앙 가지고는 곤란하다.
몰라서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색출해서 없애려고 혈기 등등하던 자가 사울이다. 그 사울이 다메섹의 변화를 체험한 후에 예수의 부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강력한 전도자가 되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부활 신앙에 대하여 어떻게 교훈하였는가를 오늘 보활주일에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되기를 축원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는 신앙.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 무슨 말인가.
이 원래의 표현은 ‘세례’를 말씀한다. 오늘 어린이가 세례를 받는다. 여러분은 언제 세례를 받았는가. 이 세례라는 것이 예수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 나를 다스리시는 거듭남의 사건, 신앙의 고백과 함께 평생 내 안에 주께서 내주하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삶의 출발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영접된 자라면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까를 말씀하는 것이다. 다 같이,
“예수 부활 내 부활”
이런 구호를 아무 생각 없이 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사건이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과연 이천 년 전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부활 사건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 한 개인의 부활 신앙에 어떻게 접목되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삶을 날마다 순간마다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위의 것이란 “선, 진리, 의, 생명”을 말씀한다. 위의 것의 반대는 아래의 것 즉 땅의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믿음의 사람을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자꾸 땅의 것이 생각난다. 생각이 나면 그 생각이 그 사람을 그 생각으로 끌고 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말로 말이 행동으로 행동이 습관으로 습관이 인격으로 결정되는 법이 아닌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한다. 5절 말씀이 그런 내용이다. 땅의 지체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우상 숭배”라고 했다. 8-9절에 보면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등이다.
요즘 조주빈의 성범죄 사건인 N번방 사건으로 관련된 공무원이 파면되었다 관련된 20대 젊은이가 목숨을 끓었다. 아마 계속 파헤치면 끝도 없이 그 악의 실체가 드러나고 또 드러날 것이다.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쫓아 살면 그 끝이 너나 나나 다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살아가야 한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추구하는 생활이다. 위의 것이란 하나님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것, 성령의 것들을 말한다.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잘못될 인생이 있겠는가.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며 증명된 말씀이며 누구에게나 믿는 자에게 증거가 되는 말씀이다.
성도가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 안에 사는 성도들의 지향점은 분명한 것이다.
성북동에 가면 30개국 이상의 대사들이 그 곳 경치 좋은 곳에서 산다. 물론 낮에는 시내의 대사관에 출근하지만 저들은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지낸다. 대사란 이 땅에, 이 나라에 와서 있지만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이 땅에 와서 머무는 자들이다. 가령 그들 중에 우리나라보더 더 잘살고 더 강력하고 더 힘이 있고 물론 문화란 것이 생대적이지만 문화적으로 더 우수한 나라의 대사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우월감과 긍지가 대단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살면서 이 세상, 이땅에 것에 지나치게 매여 살면 이 땅의 것에 붙잡혀서 위의 것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은 잠시 살아다가 갈 나그네 처소이다. 우리의 본향집은 저 천국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는 생활이다. 이 세상 탐욕에 갇혀 사는 세상 사람들처럼 허접하게 끌려 다니면서 살면 안된단 말이다.
예수는 수치를 당하고 비참하게 죽임 당하였지만 부활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기셨다. 부활은 모든 것의 대답이다.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대답이고 죄를 이기를 대답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열심히 다 헛것이다. 부활이 대답이고 부활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항상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 가야만 한다.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신앙.
이 말씀은 신비한 말씀이다. 우리가 부활절 달걀을 서로 나눈다. 달걀이란 것이 상징이다. 이 작고 둥근 껍질 속에 생명이 있으면 즉 유정란은 3주만 품으면 병아리가 탄생된다. 지금 우리 믿음의 성도의 상태란 나는 내 안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배아된 상태와 같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 생명 즉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부활 생명을 품고 살면 그 생명이 때가 되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어렸을 적 도라지 꽃이 너무 아름다운 기억이 나서 베란다에 심었다. 도라지 씨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나서 몇 년 땅 속에 뿌리를 내리면 인삼처럼 굵게 자라난다. 도라지의 보라색 꽃이 군락으로 피어 나면 너무나 아름답다. 그 색이 여성들의 브라우스 색으로 재현될 수 있다면 아주 세련된 색의 부라우스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에게 세례 받을 기회를 갖게 한다.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키우길 원한다. 우리 각 사라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삶을 하루 하루 살아가다 보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요 그리스도의 영화를 누리고 증거받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찾아 올 것이다.
올 한해도 코로나 19와 싸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과 죄와 싸워 이기면 날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한 해가 다 가기까지 일어나 빛을 발하는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는 신앙.
지금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삶을 살지만 때가 되면 성도의 각 사람의 믿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오늘 4절의 짧은 본문의 중요한 강조는 ‘함께’라는 단어어 숨어 있다. 1, 3, 4절에 ‘함께’라고 했다. 맞다. 신앙 생활이란 나 혼자 외롭고 고독하게 독야청청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씨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부활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예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함게 하신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이 마지막 절인다. 그 끝도 ‘함께’라는 임마누엘로 끝난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위해서 매진하는 신앙 순례가 흐트러짐이 없이 날마다 순간마다 계속되시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