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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새끼 나귀를 타신 왕(마21:1-11) 20200405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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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4-21 22:20 조회 9,739 댓글 0
 
               새끼 나귀를 타신 왕(마21:1-11)           2020. 4. 5 종려주일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인 감람산 벳바게 마을 입구에 도착하셨다. 거기서 두 제자를 마을로 들여보내시며 부탁하셨다. “매여 있는 나귀와 새끼 나귀를 보거든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다. 

많은 무리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펴며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의 앞뒤로 수많은 무리들이 앞서기도 하고 뒤 따르기도 하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시자 무리들은 “이는 누구냐”고 서로 물으며 크게 소동이 일어났다. 

예수는 백마를 탄 왕이나 여러 마리의 힘센 말들이 끄는 화려한 병거를 타신 왕이 아니셨다. 그렇다고 예수는 낙타를 타거나 거대한 코끼리를 타신 왕도 아니셨다. 예수는 거대한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를 건축한 왕도 아니었다. 예수는 만리장성을 쌓은 왕도 아니었다. 예수는 많은 군대를 거느린 왕도 아니었다. 예수는 늙지 않아 보려고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주변 신하들을 힘들게 하던 왕도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만을 위해서 치부하거나 친인척들을 출세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왕도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 지지자들에게 밥 그릇 챙겨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그런 왕이 아니셨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사업을 몰아 주기 위해서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왕도 아니셨다. 예수는 장기 집권하려고 무력을 사용하는 왕도 아니셨다.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무리와 로마의 병정들은 왕이신 예수의 옷을 벗겨 제비 뽑았다. 왕이신 예수의 얼굴을 때리는 자도 있었다. 예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기도 했다.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 왕이신 예수의 이마에 가시관을 씌웠다. 빨가벗겨진 예수는 수없이 채찍에 맞아서 피범벅이 되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극심한 고통을 다 겪으시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아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려내셨다. 예수는 부활하여 죄와 사망을 이기고 다스리시는 영원한 평화의 왕이 되셨다. 영원히 승리하신 왕이 되셨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며 자주 고백한 교독문 중의 일부가 이것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2-1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이고 주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백성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다. 구원은 많은 군대로 얻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힘이 센 용사라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자란 단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만이 구주이시다. 예수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허락하시는 왕중 왕이시다.  

각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본문은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왕”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다시 대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겸손하신 왕.
세상의 왕이나 통치자는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 겸손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나면 자세가 바뀐다. 요즘 4월 15일에 뽑힐 300명의 국회의원 후보들이 길거리 유세를 시작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인도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큰 절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언제까지 계속되나. 일단 당선되고 나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목에 힘이 들어간다. 국회의원만 되도 그렇다. 더군다나 왕이랴. 

요즘 같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권력자도 그러한데 과거의 왕이란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의 최고 권력자였다. 왕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지 아무나 왕이 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왕은 자칫하면 교만하게 되고 주변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예수는 겸손하고 온유하셨다. 예수는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 등을 통해서 겸손하신 왕으로 예언되었다. 

마태복음 21장 5절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는 말씀은 스가랴서 9장 9절에 예언된 말씀의 인용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왕으로 오셨다. 뿐만아니라 겸손하신 왕으로 사셨다. 겸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생애에 경험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 갈때에 새끼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다. 

‘시온의 딸’이란 ‘예루살렘 주민’을 일컫는 표현이다. 예수는 장수와 용사를 태우는 백마를 타신 왕이 아니셨다. 과거에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도 백마를 탔다.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백마를 탔다.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도 백마를 탔다. 얼마 전 북한의 김정은이 러시아에서 들여온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는가. 왜 백마인가. 최고 최대 권력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 백마를 탄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말로가 다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교만과 거만의 끝은 패망이다. 

그러나 예수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짐을 실어 나르는 나귀를 타셨다. 그것도 짐을 실어 날라 봤거나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셨다. 어린 새끼 나귀가 예수를 등에 태우고 뒤뚱거리면 걸었을 모습을 상상하여 보라. 예수는 평소에 늘 스스로에 대하여도 그렇게 교훈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그렇다. 예수는 평생토록 겸손한 삶을 사셨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 증거가 무엇인가. 겸손하여야 한다. 거만하거나 교만하면 안된다. 

겸손이 참된 힘이며 용기이다. 성숙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다. 성숙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하고 주변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지도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큰 소리 치지 않는다. 잘 익은 감은 입에 달다. 그러나 설익은 감은 떫어서 먹을 수가 없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것은 설익은 상태이다. 

로마의 정치가요 로마 황제의 스승 역할도 했던 세네카(Seneca, B.C4-A.D65)는 “용기와 힘을 갖춘 사람은 결코 교만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참된 힘을 가진 사람은 겸손하게 세상을 섬기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세상은 주먹이나 많은 군대나 엄청난 무기나 핵폭탄의 힘을 자랑한다. 돈이나 재력이나 그 어떤 권력이나 힘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참되게 다스리는 진정한 힘은 겸손으로부터 나온다. 예수는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그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하였다. 

예수는 어딜 가나 누구를 만나든지 겸손하셨다. 그는 군림하는 왕, 잘난 척 하는 왕, 섬김을 받으려는 왕,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요 겸손한 왕이시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영원한 평화의 왕이시다. 

잠언 22장 4절에 보면,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였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다. 우리는 왜 겸손하게 살아야 할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겸손해야 한다. 

토기와 같은 인생이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겸손해야 하지 않겠나. 부딪히면 금이 가거나 깨지고 병들면 약해지고 무너지는 것이 토기와 같은 인간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은 그 어떤 높은 권력을 가진 통치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뿐이다. 

사람은 그 어떤 높고 높은 권력을 자랑하는 왕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야 할 죄인일 뿐이다. 인간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죄인이고,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죄인이고, 아무리 많은 명예와 화려한 경력을 쌓았어도 죄인일 뿐이다. 아무리 젊었어도 죄인이고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워도 죄인일 뿐이다. 수백만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뿐이다. 수천만 명 아니 수억 명씩 자기의 노래나 공연에 열광하는 인기를 누리는 가수나 배우나 그 어떤 분야의 스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뿐이다. 

예수는 겸손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겸손을 이루셨다.(빌2:8)

“하나님은 예수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의 유명하고 대표적인 신학자이며 종교 개혁가였다. 그런 그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료 때문에 무척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그는 스위스의 산 위를 산책하다가 매우 인상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길은 겨우 한 마리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았다.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래쪽에서 올라가는 염소가 길 위에 눕자 다른 한 마리가 그 등을 딛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누워 있던 염소도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다. 그런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쯔빙글리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니 모든 일들이 평안해 지고 상대방과 불편하던 관계도 평안해졌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호산나 찬송을 받으신 왕.
‘호산나’라는 뜻은‘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예수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것은 ‘메시아’란 말이다. 예수는 이 땅에 메시아(Messiah)로 오셨다. 그리스도(CHRIST)로 오셨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란 말은‘왕(王)이시며 제사장(祭司長)이시며 선지자(先知者)’라는 뜻이다. 예수는 영원한 평화의 왕이시며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 땅 백성들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전파해 주시는 선지자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호산나 찬송을 받으실 왕이시며 전능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호산나 찬송은 몇 번 부르다가 사라질 찬송이 아니다.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 찬양은 사실 종려 주일에만 잠깐 찬송하고 말 찬양이 아니다. 날마다 찬양하고 어디서나 찬양해야 할 가장  경건하고 가장 은혜로운 찬양 중의 찬양이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올려 드릴 찬송은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하는 찬양뿐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호산나 찬양을 부르는 생활이어야 한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라는 찬양을 부르자.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 주시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 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보네
내 맘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들 앞에 자기를 높이고, 자기 자랑하고, 자기 잘 난 것에 도취되어 살아간다. 자기 치적, 자기 공로, 자기 능력, 자기 경력, 자기 역량, 자기 이력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랑하던 것을 모두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부활 신앙을 전파하고 증거하는데만 매진하였다. 자신은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라고 겸손하게 낮추었다. 

그러므로 호산나 찬양은 입술로만 부르고 목소리만 높여서 부를 찬양이 아니다. 호산나 찬양은 우리의 신앙 고백을 담아서 진심으로 진정으로 찬양해야 할 찬양이다. 호산나 찬양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높여 드리고 또 높여 드리는 경배의 찬양이 되어야만 한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살아 왔는데 불행해진 인생이 있는가. 언제 어디서나 호산나 찬양을 부르며 살았는데 잘못된 인생이나 가정이 있는가.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를 찬미하며 살았는데 영영 불행해진 나라나 민족이 있는가.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고 자신이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할 때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매순간마다 남을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살아가는 생활이어야 한다. 남의 티를 보며 시비하지 말고 자신의 눈의 들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주변을 섬기는 범사가 되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고 오직 주님만 높여야 한다. 

그래야 학문도, 기술도, 재물도, 권력도, 예술도 오래 간다. 예수가 대답이다. 예수가 전부이다. 예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옷 벗김을 당하고 부끄러움 당한 몸으로 채찍에 맞고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셔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승천하신 영원한 우리의 주님이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능력과 영원하신 권세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범사가 되길 축원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9절의 이 내용은 시편 118편 26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시편에 보면“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런 인사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던 순례객들이 서로를 축복하던 인사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맞다. 예수는 스스로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이 그를 그렇에 이 땅에 보내셨다. 그는 마굿간에서 나셨다. 말구유에 누이셨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다. 양을 치던 베들레헴 목자들의 경배도 받으셨다. 헤롯 왕이 베들레헴 근동의 사내 아이들을 다 죽이려 하자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나중에 나사렛에 찾아가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예수는 우연히 유대인의 혈통을 따라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야말로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누군가가 상대편 국가의 정상의 특사로 상대편 국가를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들은 그를 맞이하는 국가의 예우가 다르다. 미리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빈틈이 없는 경호와 보안을 책임지려고 한다. 예수는 이 땅에 그렇게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함부로 대했다. 십자가에 죽였다. 정오에 해가 빛을 잃고 천지가 어두워졌다. 땅이 진동하였다. 무덤 문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나병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예수를 대하는 대제사장들이나 총독이나 심지어는 제자들이나 로마의 병사들조차 그 어느 한 사람도 예수를 존귀하게 대하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함부로 취급 받아서는 안되는 분이셨다. 그분은 새끼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무리들이 함성을 지르던 그대로였다. 예수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셨다.” 오늘이라도 이제라도 그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나에게 찾아 오시는 왕 중 왕”으로 모셔 들이자. 평화의 주님이 평생토록 나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다. 각 사람이 그런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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