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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 여호와(렘33:1-3) 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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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9-20 22:01 조회 8,602 댓글 0
 
                          그의 이름 여호와(렘33:1-3)        2020. 9. 20


물체의 이름은 그 대상이 어떤 것인가를 규정한다.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거나 듣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가 순간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간다.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신 내용이 담겨있다. 성경에서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여 소개하신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하나님, 주님, 혹은 여호와여 라고 부르면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의 생각과 마음에 다가오시는가.

밝은 대낮에 꾸는 꿈을 백일몽(白日夢)이라고 한다. 실현 불가능한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팀 켈러 목사는 맨해튼에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 건물이 없이 오전과 오후에 이곳과 저곳의 학교 강당 예배로 큰 부흥을 이루고 평생 사역의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그의 말씀 묵상 중에 우상숭배에 대한 정의가 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것 같지만 마음 한 구석에 백일몽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것만 가지면 좋겠다. 이것만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그것이 곧 우상이고 우상 숭배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갖는 선한 목적의 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백일몽을 꿈꾸는 것과 같은 그런 헛된 꿈에 사로 잡혀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우상 숭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발전이 아닌 멸망을 거론해서 아쉬움이 있지만 역사의 교훈이니 또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멸망한 후 135년 세월이 흐른 후에 남 왕국 유다도 망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했고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망했다. 말과 군대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다. 병사가 없고 별을 단 장군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다. 싸울 무기인 칼과 창과 방패가 없어서 망한 것도 아니다. 왕궁에 은과 금이 없어서 망한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도 그러하지만 유다 멸망의 원인은 우상 숭배이다. 

우상 숭배는 멸망의 시작이다. 지금 건재하지만, 지금 여전히 잘 나가고 있지만, 지금 부족함이 없지만 내 속에 우상 숭배가 있다면 그것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우상숭배이다. 지금 여전히 예배하고 있고 지금 여전히 ‘주여 주여’ 하고 있지만 내 마음에 목젖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 숭배일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배척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기울어져 가는 남 왕국 유다에는 그 당시에 예레미야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다. 그 한 사람의 존재는 그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러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왕궁 감옥인 시위대 뜰에 가두었다.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고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을 포로로 지낼 것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미워한 왕 시드기야가 그를 왕궁 시위대 뜰에 가둔 것이다. 유다가 멸망하기 한 해 전이니 주전 587년의 일이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여전히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그에게 임하였다. 이 시간 그 내용을 자세하게 묵상하려고 한다.

2절에 보면,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그냥 이런 내용을 스쳐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신 곳이 출애굽기 3장 14절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자이니라.”이 말씀이 곧 ‘여호와’라는 뜻이다.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즉 자존자(自存者)란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스스로 계시던 자존하는 영이시다. 창조의 근본이시다. 그가 말씀하시니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우주가 창조되었다. “빛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창조되었다. 엿새 동안의 말씀으로 인한 창조의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으시다.

그 하나님이 오늘 예레미야 33장 2절에서 자신의 이름인 ‘여호와’를 세 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곳은 성경 신구약에 이곳이 유일하다. 

이미 시작된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난의 땅에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유다 땅과 예루살렘 성으로 되돌아 오게 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선포하고 또 선포하고 다시 또 선포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그의 이름 여호와’라고 정하였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시면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무엇인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소개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일을 행하신다’는 뜻은 ‘만드신다’는 용어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때에 창조를 시작하셨다. 빛의 창조로부터 우주 공간에 해와 달과 별들과 지구 상의 모든 것들을 일일이 지으셨다. 하늘 위의 각종 새들, 땅 위의 기고 달리는 모든 짐승들, 물 속의 각종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지으셨다. 땅 위의 각종 풀과 꽃과 나무들을 지으셨다. 엿새째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

창조 이전의 상태란 흑암 그 자체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차근 차근 우주삼라만상을 창조하셨다. 그 하나님이 지금 바벨론 포로 70년을 명하신 후에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다”

맞다. 하나님은 이 땅을 만드신 여호와이시다. 원어 성경에 보면 “나는 이 땅을 지은 여호와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밟고 사는 땅은 제한적이다. 내가 밟고 출입하는 이 땅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신 분이시다. 토기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가을이다. 지난 여름이 길었다. 비도 꾸질 꾸질 많이 오고 여름내내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여느해 보다 더 신선하다. 교회 앞 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벗 나무 이파리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다. 아침 저녁으로는 창문을 열고 있으면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된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누가 만들었나. 낮과 밤은 누가 만들었나. 하늘과 이 땅의 산과 바위와 계곡과 강과 바다와 넓은 들판과 그 모든 것들을 누가 만들었나. ‘일을 행하는 여호와’라는 말씀은 ‘이 땅을 만든 여호와’라는 뜻이다. 

사람도 창작력이 있어서 무엇을 만든다. 그것이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인들은 거대한 빌딩, 엄청난 다리와 터널, IT 공학의 발전, 의학 기기의 혜택, 우주항공 산업, 방위 산업, 핵의 개발, 각종 신 재생 에너지의 개발, 전기의 사용, AI 인공지능의 상용화, 3D 프린팅 기술의 발전, 각종 로봇의 개발과 사용 등 비약적인 발전과 창의적인 열매들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모든 분야에 인간의 한계도 없지 않다. 최근에 중국 쓰촨성에서는 그린 아파트 826가구 분양을 마쳤다. 그러나 정작 입주하는 이들은 10세대에서 멈추고 말았다. 도심 안에 그림 같은 녹지 공간을 빌딩으로 조성하고 보니 온 도시의 모기 떼가 소문을 듣고 그리로 다 모여 들었다. 살수가 없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공학의 한계란 이런 것이다.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녹색 공간으로 지으면 꿈처럼 누릴 줄 알았으나 어림 없는 일이었다. 모기 떼의 습격을 그 누구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하는 일에는 이렇게 실수도 있고 한계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으시다.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셨다. “나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다.”, “나는 이 땅을 만든 여호와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신걸까. 지금 예레미야가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데 하나님은 의연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의미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못 이루실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우리가 왜 예배하며 살아야 하나. 예배 시간은 이 땅을 지으신 창조주의 현존 앞에 서는 엄숙한 시간이다. 세상 정부는 이걸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정부의 이념이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다. 그러나 회막에서 만나길 원하셔서 성막을 지으라 하신 하나님을 회막에서 뵈옵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 체험을 끊어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공산당 주체 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들은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몇 해 전에 평양의 서점에서 10불을 주고 <김일성 그이는 하나님>이란 책을 사 갖고 돌아온 남한 목사의 진술에 따르면 북한은 ‘사도 신경’을 바꾸어서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을 신으로 고백한다고 한다. 

“전능하사 당과 인민을 영도하시는 김일성 주석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김정일 동지를 믿사오니 이는 공산당으로 잉태하사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고 저리로부터 인민을 해방하러 오시리라...”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면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만 같다. 예레미야 때에 유다 백성들이 그랬다. 왕과 방백과 심지어는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앞장서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고 또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들 그렇게 살다가는 망한다. 바벨론의 밥이 되고 만다. 70년동안 끌려가서 지낸다.”그런데 예레미야는 왕궁 시위대 뜰에 가두어 두고 자기들은 배를 뚜드리며 상 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서 먹고 마시며 태평성대를 꿈꾸었다. 이것이 백일몽 아닌가. 그런데 그 다음해인 주전 586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요즘 날마다 예레미야를 묵상한다. 어느 속회는 속도원들과 매일 예레미야를 한 장씩 필사해서 속도원 카톡방에 공유하는 말씀 묵상 운동과 말씀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는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나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다. 그런 하루 하루가 쌓여서 한 해가 가고 일생이 가고 각 사람의 이 땅에서의 생애가 끝나는 것이다. 

이 좋은 계절 날마다 시간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고 경배하고 묵상하고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의지하는 출입과 범사가 되기를 축원한다. 

일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벌려 놓기만 하고 이룩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일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기도 하시지만 그 시작하신 일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시다. 

구라파 문명 즉 유럽 문명의 바탕은 기독교이다. 미술, 음악, 노래, 건축, 문학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기독교 정신, 성경의 말씀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는 문명이다. 물론 세속화되고 성경에서 벗어난 세속 문화에 심각하게 빠져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구라파 문명의 힘은 하나님 신앙이다. 그 중심에 히브리 사상이 배어 들어가 있다. 헬라 문화가 수평적인 것이라면 히브리 문화는 수직적이다. 수평적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현란한 것들이다. 그러나 수직적이란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룩한 것들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중세의 천재적인 미술가들의 업적의 밑바탕에는 저들을 그 시대에 사용하신 하나님의 영감이 절절히 느껴진다. 
음악은 어떤가. 헨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수난곡, 미사곡을 비롯한 그 다양한 교회 음악들을 보라.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집안은 음악가만 50명 이상 배출된 루터교회의 명문가였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드으이 고전파 거장들이 모두 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냥 돈 벌어 나 한 사람, 내 가족끼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세계 여행 다니고 풍요를 누리다가 죽는 것은 너무 동물적이다. 

네팔 포카라 지역에서 현지인들을 돌보며 섬기며 사는 한국 청년이 있다. 35살의 청년 신홍철 씨다. 그는 20대 중반에 군 제대 후 아프리카 우간다 난민들의 실상을 보고 받은 충격을 안고 네팔에 자리 잡고 지낸다. 우간다 난민들은 월 평균 2불과 옥수수 한 자루와 식용유 한 병으로 한 달을 버티며 살아간다. 살아 있지만 죽지 못해 연명하며 살아간다. 거기서 받은 충격으로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오지의 산간 마을 네팔 포카라에 머물며 그곳의 아이들을 섬긴다. 빈민 구제 사역을 한다.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고 집 지어주며 지낸다. 그의 별명이 ‘네팔 포카라의 보스’다. 외모도 보스같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도 갑상선 수술을 받은 환자다. 약한 몸으로 파김치가 되도록 현지인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그의 소문이 나면서 지난해에는 KBS 다큐 공감에 소개된 적도 있다.

우리 교회가 코로나로 잔뜩 움크린 교회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식지 않는 열심을 갖고 비대면 환경을 극복하며 속회원들과 만나고 교제하고 기도 제목을 나누고 속회 헌금도 속장 혼자 하지말고 속도원들을 독려해서 매주일 속회 헌금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모아서 모두 다 선교지에 매달 보내지 않나. 내 용돈에서 매주 얼마씩 속회 헌금을 꼭 모으길 바란다. 속장이 무소식이면 속도원들이 나서서 속장에게 연락하고 나도 속회 헌금 내겠다. 선교사 후원하겠다 해야 한다. 이번 10월에 언라인 2020선교리바이벌을 하려고 한다. 저녁 마다 언라인 부흥회를 시리즈로 날마다 하려고 한다. 우리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지의 선교사님들을 언라인으로 초청해서 실시간 부흥회를 준비하고 있다. 비대면 시대의 특별한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일을 만들고 성취하는 여호와의 손길에 붙잡힌 이들이 130년 전부터 이 땅에 속속히 도착해서 서울, 평양, 원산, 해주, 신의주, 만주,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처처에 걸어다니고 자전거 타고 노새 타고 말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오늘 날이 되었다. 학교를 세웠다. 병원을 세웠다. 세브란스 한 사람의 도움으로 아예 광혜원을 세브란스로 개명하였다. 오늘 날은 세브란스 병원의 의사, 간호사, 직원 수만도 8000명이다. 세계적인 병원이 되었다. 그 시작은 미약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큰 겨자나무가 되었다. 

그런 공동체를 이루자. 그런 교회로 세워가자. 내가 교회와 가정과 일터와  세상에서 신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복음의 전사들이 되자. 예레미야는 반대자가 많았다. 그 당시에 제사장도 다른 그 어떤 거짓 선지자들도 왕도 방백도 예레미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 하나님이 씨신 선지자는 예레미야였다. 

나는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가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명품 지니고 살아서 예레미야인가. 아니다. 그에게는 그 당시에 20대로부터 50여년 간을 계속해서 그에게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 앞에 여호와의 임재를 체험하는 나날이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는 지금 왕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시대에 하시려는 말씀을 그를 통해서 하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화려한 제사장의 의복을 차려 입고도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리 저리 흔들리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에게는 오히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자. 여호와의 말씀에 민감하자. 요즘 친구 목사가 보내 준 짧은 영상 중에 두세살 짜리 여자 아이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래서 도망가려다가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 어린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성인아동으로 살아가면 않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고 믿고 따르고 경외하는 여호와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우리 아파트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면 라디오 전파가 안 잡힌다. 처음부터 건물을 그렇게 지었고 해결하지 않고 지낸다. 어떤 때는 들을만한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듣던 중에는 건물 밖에서 남은 방송 내용을 경청할 때가 있다.

요즘같은 비 대면의 시대일수록 보이지 않으시나 분명하게 나의 삶의 현장에 현존하시는 여호와의 임재 앞에 마음 깃을 여미고 서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시는 여호와.
예레미야 33장 3절은 기도의 공식과 같다. 하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유명한 기도 준칙이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더 이상 우상 앞에 빌고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께 부르짖지 못해서 그렇지 
지금보더 좀 더 구체적으로 주께 부르짖고 간구하다 보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크고 은밀한 일들을 체험하며 누리며 간증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무슨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가.
요즘의 그 기도 제목이 장래의 나의 삶의 모습이 되어 갈 것이다.
뭐 먹을까 뭐 마실까 뭐 입을까만 궁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자.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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