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9:8-14) 2020. 9. 6
선지자란 자신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선지자’를 다른 말로 ‘예언자’ 혹은 ‘대언자’라고 한다. 요즘 날마다 예레미야서를 계속하여 묵상하고 있다. 오늘의 짧은 본문 중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된다. 맞다.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의견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령 예레미야 1장 4절을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고 하였다. 11절에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고 하였다. 2장 1절에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무슨 말인가. 52장 분량의 이 방대한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견해나 주장이 아니라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의 기록이란 말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
거짓 예언에 미혹되지 말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나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하셨다. 누가 꿈을 꾼 이야기를 할지라도 그 꿈 이야기를 함부로 믿고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시지도 않은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되게 예언하는 거짓된 예언에 미혹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가 9월을 맞아 매일 새벽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조금씩 묵상해 가고 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27장까지 묵상하였다. 어제 묵상 분량인 28장에 보면 ‘하나냐’라는 이름의 거짓 예언자의 예언이 나온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이 통치를 시작한지 제 4년 다섯째 달에 있었던 일이다. 주전 594년의 일이다. 선지자 하나냐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들으라고 말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
이미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군대가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 성전의 빼앗아 갔던 모든 기구들을 2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게 될 것이다.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바벨론에 붙잡혀 끌려 간 여호야긴 왕과 함께 끌려 간 포로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냐의 이러한 예언은 모두가 다 거짓 예언이었다. 오늘 날 이단과 사이비의 앞잡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거짓 예언하는 자들이다. 성경을 제 맘대로 곡해하고 자기들 편한대로 잘못 해석해서 따르는 자들을 미혹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말을 듣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셨다. 이것이 그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예언이었다. 그런데 하나냐는 자칭 하나님의 선지자 운운하면서 2년 안에 이미 빼앗긴 성전의 기구들을 다 되찾아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붙잡혀 간 여호야긴 왕도 곧 되 돌아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와 같은 예언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짓 예언이란 말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을 들은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메고 있던 나무 멍에를 빼앗아서 꺾어 버렸다. 그리고 성전에 모여 있는 제사장들과 모인 백성들이 보고 듣는데서 큰 소리로 말했다. “하나님이 이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보리리라 하셨다.”
그 때 예레미야는 더 이상 하나냐는 상종할 사람이 못된다고 여겨서 자기 길을 가고 말았다. 이 사건 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네게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열어서 하나냐에게 예언하게 하셨다. “네게 금년에 죽으리라” 그런데 그 해 일곱째 달에 하나님의 예언대로 하나냐는 죽고 말았다. 이것이 예레미야 28장 전체에 담긴 사건의 내용이다.
인간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이 세상에 누가 흥하기를 원하지 망하기를 원하겠는가. 이 땅에 누가 번성하기를 원하지 쇠망하기를 원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다. 이제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이다. 칠십년의 때가 차야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참 예언인 것이다.
자, 그러면 왜 북왕국 이스라엘은 망하고 왜 남왕국 유다는 멸망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까지 우상을 들여다 놓고 숭배하는 죄를 범하였다.
오늘 본문인 29장의 내용 중에서 우리는 8절부터 읽었다. 읽지 않은 앞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서 읽히게 하였다. 5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끌려간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농사도 하고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번성하며 나름대로 주어진 자유의 범주 안에서 평안하게 살아라. 너희가 그 바벨론 땅에서 낳을 아들 딸들도 다시 시집 장가가서 아들 딸 낳고 번성하며 식구를 늘리며 살아라. 너희 후손의 수가 바벨론 땅에서라도 수가 줄어 들지 않게 하여라. 그 살게 될 성읍의 평안을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니 그러하다.”
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포로의 땅에 끌려가서 장차 이러한 삶을 이어가도록 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바벨론을 풀무불과 같은 연단의 기회로 삼으셔서 언약 백성들인 저들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절대로 믿고 따르고 섬기는 민족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요즘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에 거짓 뉴스가 난무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워져만 간다. 이처럼 혼탁하고 어수선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서 공의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며 우리의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온갖 미혹의 손길과 유혹 앞에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담대하게 진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가꾸어가는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알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 택한 가정, 택한 민족을 사랑하시고 위하신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족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의 밭에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의 출입과 범사를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그의 후손을 언약의 자손되게 하셨다. 이는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 전부터 언약하신 내용이다. 맞다.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때가 되면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하나님이 택한 개인과 가정과 민족을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
11절을 다 같이 함께 읽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셨다. 지금 바벨론의 침략이 이미 시작되었고 점점 남 유다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되어 가고 있지만 지금 유다 백성들이 겪는 재앙과 같은 고난과 시련이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의 끝이 아니란 말이다.
생각하여 보라.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들이 고생하고 병치례하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힘겨워하고 속상해하고 밤 잠을 설치고 괴로워하는 것을 즐거워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고난과 시련과 속알이와 환난과 역경과 마음 고생의 순간 순간이 쌓여서 담대하고 독립심이 있고 세상을 세상답게 바라보고 그 어떤 폭풍한설이 몰아칠지라도 굳굳하게 극복하고 이겨 내는 믿음의 장부가되어 가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 칠십년은 심각한 위기와 고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광로와 같은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금처럼 귀한 믿음의 사람들로 연단하길 원하셨던 것이다.
그렇지 않나. 누가 기쁨을 버리고 슬픔을 택하겠나. 누가 평안을 버리고 고난을 택하겠나.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별의 별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슬픔과 괴로움을 다 겪으며 이겨 내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더군다나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우리 각 사람의 삶을 들여 다 보면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만사가 다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 어느 나라이든 대통령이 되는 일은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다. 기대하고 표도 주고 응원도 했다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가 되는 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세상 지도자의 모습이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여하튼 대통령을 새롭게 선택하는 일은 나라마다 거국적인 일이며 특히 미국 같은 나라의 경우는 세계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올 11월에 미국 대통령을 새로 뽑는다. 조 바이든(Joshep Biden, Jr, 1942-)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올해 78살이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1946-) 대통령보다 네 살이나 더 많다. 생각하여 보라.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한 권력 지향의 정열이 식지 않고 있다. 이것이 사람이란 존재다.
조 바이든은 28살에 델라웨어 주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31살에 상원 의원이 되었다. 7선 의원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경선을 한 바 있다. 그런 인연으로 오바마 대통령 곁에서 8년 동안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그는 미국의 다음 대통령 경선의 선두에 서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이 조셉(Joshep) 즉 요셉이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그의 경력이 화려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는 결혼 생활 6년 차 때에 교통사고로 아내와 한 살짜리 딸을 잃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어린 두 아들은 중상을 입었다. 상원 의원에 당선된 얼마 후에 겪은 불행이었다. 아내와 한 살 짜리 딸을 장례한 그는 중상을 입은 어린 두 아들 곁을 지키며 늘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상원 의원 선서도 의사당이 아닌 두 아들을 돌보아야 하는 병실에서 했다. 나중에 큰 아들은 장성하여 델라웨어 주 법무장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도 5년 전에 46살 나이에 먼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작은 아들은 지금 변호사이다. 조 바이든은 아내와 어린 딸을 하늘나라로 앞서 보낸 후 5년 후에 재혼하였다. 재혼한 아내 애슐리 바이든이 지금 39살 된 막내 딸과 함께 그의 선거전을 응원하고 있다.
미국에 프란시스 챈(Fransis Chan, 1967-) 이란 목사가 있다. 중국인인 홍콩 계의 부모에게서 1967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27살 때인 1994년에 30여 명으로 시작한 코너스톤 교회는 6년 만에 2000명, 15년만에 5000명 이상이 주일마다 모여 예배드리는 거대한 공동체가 되었다. 그가 43살이던 지난 2010년에는 그 큰 교회를 사임하고 아내와 함께 자녀들과 샌프란시스코의 빈민가를 드나들며 가난 한 자들을 섬기고 있다. 요즘은 교회가 아닌 가정 마다에서 모이는 ‘평신도 소그룹 제자훈련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는 그의 엄마가 그를 낳다 말고 돌아가셨다. 새 엄마가 그를 키웠다. 새 엄마도 그가 아홉 살 때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가 12살 때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혼자 남게 된 그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신세를 지며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싸웠다. 어느 날 아내와 다투던 작은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를 권총으로 쏴서 죽였다. 그리고 본인도 자살하였다. 그런 충격적인 일들을 보며 어린 시절과 십 대 시절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아들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다. 그의 책 중에 <크레이지 러브>라는 책이 있다.
<크레이지 러브>(Crazy Love)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말하다. 그는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한낱 우리 같은 자를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랑’으로 반응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흠 하나 없이 완벽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를 지독히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맞다. 내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마태복음 13장 44절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비유의 주인공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팔았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이처럼 미친듯한 사랑으로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반응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지금의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지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미래와 희망을 주시길 원하신다. 장래의 희망을 품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지금보다 더 좋은 믿음의 미래의 나, 지금보다 더 분명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장차의 모습을 하나님은 늘 기대하신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보다 돈과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살아간다. 코로나19의 현상 중의 하나가 해외여행 못 가는 대신에 명품 가방, 명품 옷, 명품 악세사리, 값비싼 보석 사재기가 이전보다 훨씬 늘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야구, 농구, 축구, 골프, 승마 등과 같은 스포츠에 열광하며 거기에 시간과 재물과 관심을 집중하며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중독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재산을 탕진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스포츠에 너무 빠져서 죄악으로 치닫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스포츠계의 타락상이나 부끄러운 사건의 현실을 보라.
예수는 우리가 미지근한 태도로 예수를 따라와도 좋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교인들은 입에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원하시는 헌신은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좋은 것, 귀한 것을 요구하고 받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다. 진정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원한다면 삶의 모든 행동과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지독히도 힘든 일이다. 오죽하면 예수께서도 그 길은 좁은 길이라 찾는 이가 매우 드물다는 말씀까지 하셨을까. 하지만 오늘 날도 세계 처처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하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시 본문을 보자.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고난과 고통과 시련과 억압 가운데 있을 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미래와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다. 할렐루야
너희는 내게 부르짖고 구하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음을 갖고 늘 깨어 기도하여야 한다.
“목사님 우리 집은 별로 기도할 제목이 없어요. 가족 모두 건강하고, 돈도 잘 벌리고, 자식들도 잘 자라고 있고, 우리 집은 두루 두루 평안합니다. 너무 그렇게 기도, 기도 하지 마세요.”라고 반응하시는 성도들의 가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이다. 그 때야 말로 헌신할 때이다. 그 때야 말로 주의 일에 매진할 때이다.
지금 건강한가. 지금이 충성할 때이다. 병들고 나면 충성하고 싶어도 못한다.
지금 재물이 있고, 지금 돈도 있고, 지금 재산이 있는가. 지금이 충성할 때이다. 돈과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있을 때 충성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도 젊을 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늙고 나면 마음에 원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뭐든지 있을 때 충성하는 것이다. 돈도 있을 때, 재물도 있을 때, 재산도 있을 때, 시간도 있을 때, 건강도 있을 때, 힘도 있을 때, 능력도 있을 때 충성하는 것이다. 기도도 부르짖을 만한 기운이 있을 때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평안하다고 기도할 제목이 없나. 깨어 일어나 감사하며 기도하여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나. 광야에서 모세 때에 성막을 건설하였다. 그 성막 재료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허리에 띠를 띠고 가족과 함께 급하게 양고기를 잡아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양고기를 밤새 구워 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출애굽하였다. 그 때 급하게 꾸린 보따리 안에서 금도 나오고 은도 나오고 해달의 가죽도 나오고 청색실 홍색실도 나왔다. 제사장의 의복을 직조할만한 모든 것들이 출애굽하던 날 밤에 급하게 꾸린 그 보따리 안에서 다 나온 것이다. 그만 가져 오라고 할만큼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셨나. 다 같이 화면을 보고 큰 소리로 읽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하나님은 기도하면 들으신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교훈들도 한결같이 그런 내용이 아닌가. 기도하면 주님은 때를 따라 응답하신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이렇게 찬송하지 않나. <기도할 수 있는데>를 부르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끓고 간구해 보세요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전심으로 주께 기도하면 들어 주시고 찾게 되고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나중에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기도하였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14절 말씀이 무엇인가.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다.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좇아 내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너희들을 모아 들일 것이다.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미래에 희망을 품고 기도하는 기도의 승리자들이 모두 다 되시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