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사55:1-5) 2020. 8. 2
올해 91세인‘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Warren Buffett, 1930-)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자기와 점심 식사 약속을 하는데 큰 돈을 받는다. 그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 것이 아니라 늘 좋은 일에 전액 후원금으로 내어 놓고는 한다. 지난 2019년에는 그와 점심식사를 하는 대가로 무려 465만 달러를 쓰겠다고 나선 사람은 가상화폐 트론의 설립자인 저스틴 쑨(Justin Sun)으로 확인됐다. 우리 돈으로 55억 8000만원이다. 점심 한끼를 먹는 값이다. 부자니까 뭐 그럴 수 있다. 늘 있는 흔한 일이 아니니까. 추억 거리가 될 수 있고, 화제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55장에 보면 하나님은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거저 마시라”고 초청하고 계시다.
이사야 55장은 “하나님의 초대장”이라고 불린다. 누가 나를 잔치 자리에 초대하는 초대장을 보내오면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예의이다. 가령 영국 국민들 중에서 엘리자베스 12세 여왕의 초대장을 받는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의 국민들은 영광스러워할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55장의 내용은 하나님이 나를 초대하시는 초대장이다.
누구에게 오라고 하셨나.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라고 하셨다. 초대하시는 대상에 예외와 차별이 없다. “너희 모든 자들아”오라고 하셨다. 그대신 어떤 상태의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신가. “목마른 자들아”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려면 하나님께 대하여 목마른 자들이어야 한다.
세상의 풍습과 세상의 욕망에 목마른 상태에서는 자꾸만 세상으로만 눈을 돌리고 세상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아 보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목마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목마른 자들이어야 하나님을 찾게 된다. 여기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라고 하셨다. ‘물’이란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물이란 구원과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공급원이다. 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은 물을 필요로 한다.
이사야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요7:38)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약속하셨다.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마시라고 하였다. 개역 개정 성경인 오늘 본문에는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번역하였는데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돈 없는 자도 와서 포도주와 우유를 거저 마셔라.”고 번역하였다. 맞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다. 돈 없는 자, 빈털터리, 가난한 자, 망한 자, 실패한 자라도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포도주와 젖을 맘껏 마시라는 초청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포도주와 우유는 생명에 활기를 주고 영양을 골고루 공급하는 풍성하고 다양한 구원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이 생명과 구원을 상징한다면 포도주와 젖 즉 포도주와 우유는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서 누리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통한 양식을 일컫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물, 포도주, 젖 즉 우유 이런 내용들은 육의 양식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누리는 구원의 영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초대를 받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잔치자리에 둘러 앉아서 어떤 혜택과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일까.
듣고 또 들으라.
2-3절에 보면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성도들은 “내게 듣고 또 들을지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고 반복하여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예전 성경에 보면 “듣고 들을지어다”를 “청종하라”고 번역한 것을 본다. 그 원래의 표현은 “매우 주의깊게 들어라. 부지런히 들어라. 나에게 들어라 들어라” 이처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초청하신 자리에 나아온 성도라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요즘 날마다 로마서를 대하고 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에서 다시 찾아 읽어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듣는데서 생기고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바이타민 제를 날마다 일정한 분량씩 섭취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일마다 때마다 계속하여 일정하게 꾸준히 접하고 또 접하는 생활은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시나.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주변을 둘러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나. 여기서 은을 달아 준다는 말은 돈을 투자한다는 말이다. 돈을 쓴다는 말이다.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고 하였다. 왜 헛수고하며 살아가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어제 잠깐 일을 보기 위해서 운전 중에 라디오 대담을 들었다. 대한민국의 성매매 산업에 대한 백서를 가지고 대담하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남성 일인당 60만원씩을 성매매하는 일에 쏟아 붓고 있다고 한다. 어림 잡아도 일년에 15조가 넘는다. 그래서 n번방 사건처럼 그 계통에 혈안이 되어 불나방처럼 돈을 벌려고 달려 든다. 거기서 음성적으로 성 매매와 성구매 행위가 계속된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남성들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 성매매 순위 7위 국가라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료를 찾아 보았다. 여성 가족부가 지난 6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남성들 중에서 42.1%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성매매 혹은 성구매에 관련된 적이 있다는 연구 자료를 발표하였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카카오 톡, 페이스북, 인터넷 게임 등을 통한 성 매매나 성 구매 행위를 비롯해서 실제 뒷골목의 성 매매 여성을 통해서 성을 구매하는 데 가담한 경우가 그러하다고 한다.
심각하지 않나. 하기야 시장, 도지사나 의사, 대학 교수, 기업체의 간부, 연예계의 유명인, 체육계 인사, 군대의 장군, 심지어는 종교계의 알려진 이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한 범죄로 펑펑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서를 쓰던 2700년 전이나 오늘 날이나 인간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께서 하신 집 나간 둘째 아들 즉 탕자의 비유 내용 그대로이다. 유산 받았으니 남의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주색잡기를 즐기며 살았다. 그런 생활이 몇 년을 갈까. 결국에는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빈털터리가 되니 곁에 있던 친구들도 다 그 곁을 떠나갔다. 남의 나라에서 돼지 우리에 누워 자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조차 먹을 수 없는 참담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 저가 돼지 우리에 누워서 고국의 아버지 집을 생각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들도 지금 나의 이 신세보다는 더 나을텐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마련하였다. 고향 마을 입구에 나타났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 보았다. 아버지가 뛰어 나와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다. 종들에게 말했다. “물을 끓여라. 목욕을 시켜라. 새 옷을 입혀라. 새 신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송아지를 잡아라.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하자.” 못마땅해 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무어라고 달래나 “애, 네 동생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 아니며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나님은 이사야 55장 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하고 초청하셨다. 배불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 하지 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대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뭔가. 기도의 자리, 말씀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소중한 이유가 뭔가. 그런 기회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2절 끝에 보니까 뭐라고 말씀하시나.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안찬호 선교사는 <들어 쓰심> 의 저자이다. 아프리카 케냐의 35만여 명 마사이 부족 전체의 명예 대추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다. 강원도 삼척 도계 탄광촌 광부였던 아버지는 페진증으로 고생하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마다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처럼 광부가 되었다. 고된 광부 일에 지친 그는 이미 십대 후반부터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서 일하던 중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했다. 함께 갱 속에 갇힌 광부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예수를 믿나?” 어이가 없었다. 갱이 무너져 죽게 생겼는데 갑자기 왠 예수 타령인가? “예수요. 안 믿어요” 화가 난 큰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내 경험상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너는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어. 어떻게 하겠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무너져 갇힌 갱도 안에서 무릎을 꿇고 영접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급기야 대성통곡을 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자신은 기적처럼 구조되었으나 복음을 전해 주었던 그 광부 아저씨는 죽고 말았다.
“나를 살리고 정작 자신은 죽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광부가 죽어가면서 전했던 십자가의 복음을 이제 그가 평생토록 35년이 넘도록 아프리카 케냐의 마시이 족에게 전하고 있다. 선교사가 된 후에도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한 그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1991년 파송받은 케냐에서만 30년째 사역 중인 그는 케냐 사람들조차 두려워하는 마사이족 거주지에 34개 교회를 세웠다. 44개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세웠다. 3개의 중고등학교와 1개의 신학대학을 세웠다. 이러한 성공적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한다. “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에게 구원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절에 보면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하였다. 왜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하는 것일까. 거기에 길이 있다. 거기에 대답이 있다. 거기에 영생과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다. 사시사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영원한 언약을 맺은자답게 살아가라.
신앙생활은 언약 안에 사는 생활이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 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370장 4절)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사무엘, 다윗, 히스기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저들 모두 언약의 사람들이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 한제자와 보충된 맛디아를 포함한 저들 모두 영원한 언약 안에서 살아간 신앙의 선조들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행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새로운 언약으로 완성하신 주님이시다. 우리가 예수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이 언약의 피 안에 죄 사함과 영생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 하는 성도들의 믿음은 분명한 언약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다윗도 이 은혜를 깨달았다. 영원한 언약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살겠나.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헛 수고 하며 어리석게 살겠나. 이사야 55장 4절이 말씀하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언급한 내용이다. 맞당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증인으로 세움 받으셨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인도자요 만민의 명령자로 삼으셨다. 예수의 복음 말씀 따라 살아서 잘못 된 인생이 있나.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예수 따라 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게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449장 1절) 이런 찬양과 간증이 늘 넘쳐 나길 축원한다.
영화롭게 하심을 입은 자답게 살아가라.
5절 말씀을 보라. 천하 만국이 예수를 찾고 예수께 달려 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을 따라 700여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다. 그 복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번져 갔다. 그 복음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따라 사도 바울에 의해서 유럽으로 번져 갔다. 나중에는 아프리카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남미로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뉴질렌드와 호주로 번져 갔다.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들마다 영화롭게 하신다.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거저 마셔라”이것이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믿고 따르고 청종하여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 주 안에서 영화로운 삶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