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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롬8:31-39)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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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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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6 20:27 조회 10,204 댓글 0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롬8:31-39)        2019. 12. 29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철저히 이스라엘 편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여겨진다. 어떻게 팔십 살이 넘은 노인 모세가 감히 애굽의 바로를 만나러 갈 수 있었을까.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계속하던 동족을 모세가 어떻게 앞장서서 이끌고 출애굽 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출애굽은 모세가 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하시려는 일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시려는 일을 사람을 통하고, 자연을 통하고, 만물을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경의 역사이다. 성탄절이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어떻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을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길 원하시면 그런 일들이 가능하다. 어떻게 홍해나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널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떻게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임당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시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가능하다. 예수께서 회당장 여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내셨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셨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났고 이미 장례가 끝난 죽은 나사로를 무덤 앞에서 불러 내셨다.

이런 일화들은 사람의 편에서 보면 불가능한 역사의 장면들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계신 전능자이시다. 해와 달과 별들과 우주삼라 만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걸 믿지 못하는 이들은 도대체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나를 누가 만들었는가. 어머니가 만들었는가. 아버지가 만들었는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란 찬양의 가사가 어떻게 시작되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하나님은 대적자를 이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루어 가신다. 늘 이야기 하지만 10년 전에 이곳 불교 용지의 뉴타운 안에 예배당이 건축될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을 계획하시고 우리 가운데 그런 감동을 주셔서 흩어진 무리들 가운데 공동체를 형성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 오시지 않았나. 

하나님은 그 동안도 그렇게 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개인, 가정, 나라, 기업, 교회 안에서 자세하게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잠잠히 이루어 가실 것이다. 로마서의 절정인 로마서 8장은 하나님의 어떤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나. 


위해 주시는 하나님.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그 무엇인가를 주게 마련이다. 집안에 화초를 잘 가꾸는 이들이 있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 화초를 잘 가꾸는 것은 그 화초의 상태를 잘 알아서 위해 주기 때문이다. 물을 자주 주어야 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화초도 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도 있고 그렇지 않은 화초도 있다. 

위해 준다는 것은 관심을 가져주고 힘이 되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다. 31절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은“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그렇지 않나. 세상은 다 끼리 끼리다. 미국으로 하면 공화당과 민주당 두 당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한다. 요즘 우리나라 되어 가는 것을 보면 보수와 진보가 그런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좌와 우가 점점 팽팽하게 극단으로 나누이고 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개인과 민족과 나라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십계명의 바탕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3-7)

이것이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앞의 네 가지 계명이다. 그 바탕은 무엇인가.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란 강조이다. 그래야 하나님도 그런 인생들의 편을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시다. 

성경의 역사는 철저히 하나님이 위하신 백성들과 인생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나님이 편을 들어 주신 인생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노아와 홍수 사건이 그러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가 그러하다.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의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요셉이 누군가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갔던 히브리 소년이 아닌가. 그 요셉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이다. 그 요셉이 13년 후인 30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서 110살에 죽기 까지 80년 동안 애굽을 다스렸다. 왕이 죽고 새 왕이 세워지고 그 왕이 죽고 또  새 왕이 세워지도록 요셉은 죽는날까지 애굽의 왕을 대신하는 실세였다. 그 배후에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이 요셉에게 편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걸 오늘 로마서 8장 31절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나. 시골 학교에서는 자기 아버지가 마을 이장만 해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가 파출소장쯤 되면 어깨에 힘이 훨씬 더 들어갔다. 그렇지 않나. 시골 사람들은 마을에서 만나는 어린 애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묻지 않는다. “네 아버지가 누구시냐”하고 묻는다. 그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애를 보는 눈이 갑자기 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살다 보면 사람의 마음을 바뀔 수 있다. 변할 수 있다. 멀어 질 수 있다. 나의 편이던 사람이 변해서 반대 편이 될 수 있다. 아군이 변해서 적군이 될 수도 있다. 친구가 변해서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원수가 변해서 나와 가까운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도 그렇지 않나. 자기 나라에 유익하면 우방이 되고 자기 나라에 불리하면 적국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국도 없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느 편이시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바벨론에 포로로 붙이신 적이 있으시다. 그 당시 바벨론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 민족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할례받은 언약 민족인 모세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 멀리하며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에 넘기신 것이다.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서 연단 받는 민족으로 바벨론을 막대기 삼으시고 가시채 삼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위하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위하시기 때문에 무조건 오냐 오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채찍도 들고 참으로 위하기 때문에 책망도 하고 꾸지람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위하는 백성, 위하는 인생을 위해서 편이 되어 주시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길로 이끌어 가길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위하시는 인생, 하나님이 편 들어 주시는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선물로 주셨다. 그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32절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은 예전에 오래도록 보던 <개역한글> 성경에 보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번역하였다. 

32절의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그 모든 사람은 세상 만민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모든 사람”은 26절에 기록된 “성령의 간구하심을 힘입은 자들”이다. 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며 미리 정하신 자들”이다. 30절의 “미리 정하시고 부리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 자들”이다. 그처럼 예정하여 택하여 부르신 자들에게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런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게 각양 좋은 은사를 내려 주신다. 우리는 그 은사 안에서 주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겨 나가는 것이다. 그 은사 안에서 가정생활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장사도 하고 사업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비가 있는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이나 전갈을 줄 아비가 있는가.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그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 좋은 것이란 성령이며 성령의 각양 좋은 은사이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의 아들딸에게 할 수만 있으면 그 무엇이든 좋은 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적인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우린 자식에게 무엇 주는 것을 생각하면 돈과 재산을 대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에게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신앙의 계승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오고 있다. 이것은 크고 넓게 보면 구약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다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의 변화를 통해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된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모든 것'은 구원 자체를 말씀한다. 뿐 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를 주시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며칠 전 성탄절 예배 시간에 히브리서 1장 1-3절을 보았는데 그 1장 마지막 절인 14절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하였다. 하나님은 천사도 성도를 위하여 '부리는 영'으로 허락하셨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다른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의 공급자이시다. 부자 나라라고 다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다. 왜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 사람들이 그 어떤 선진국 사람들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잘 사는 나라일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크다. 미국 같은 나라도 나라 경제의 90% 이상을 1%의 부자들이 좌지우지한다. 그 1%의 천장을 뚫고 누구나 뚫고 올라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생각하면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리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과 열악한 주거 환경과 해결되지 못한 물의 문제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21세기의 풍요를 누리며 사는 나라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제 3 세계 국가의 굶주림과 가난과 질병은 더불어 풀어나가야 하는 시대적인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남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2000년 12월 5일 오후 5시 하얏트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열린 조성민과 최진실의 결혼은 그 당시에 국가적인 뉴스였다.  하객만 1500명이 모였다. 이경귀 씨가 사회보고 고려대학교 은사가 주례하였다. 신랑 조성민은 결혼식장에서 신부에게 <사랑의 편지> 써서 바쳤다. 신랑 조성민은 눈물을 흘리며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당신 진실에게, 앞으로 지금까지보다 더 험난한 길이 우리 앞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정말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우린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두눈 감을 때까지 영원히 당신을…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기력이 다했을 때 그대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노라고 말하겠습니다” 라고 흐느끼며 사랑의 편지를 읽어 내려 갔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에서 뜨는 유망주였다. 그는 키가 194cm였다. 그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재학생 시절이던 22살 때에 일본 최고의 야구 팀인 요미우리자이언츠 팀에 스카웃 되었다. 그는 야구 선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돈이 없나. 재물이 없나. 인기가 없나. 명예가 없나. 더 이상 그 무엇이 필요하였다. 그런 그가 39살에 어떻게 되고 그와 결혼하였던 최진실은 어떻게 되었나. 왜 그랬을까. 한 두 마디로 함부로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그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재물을 주시되 근심을 겸하여 주신다면 그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인기와 명예를 누리되 그 뒤안길에서 절망하고 후회하고 우울해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인기가 그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나.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그 모든 은사란 무엇인가. 32절은 분명히 말씀하였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 안에서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필요를 위하여 온갖 좋은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넉넉하신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매순간마다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랑이다. 반대로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일마다 때마다 느끼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깨달아야 한다. 외롭고 고독하고 우울하고 착잡하고 답답하고 식은 땀이 흐르고 괴롭고 소화도 잘 안되고 잠도 잘 안 오고 불안하고 초조하게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언제나 만사 형통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고 해서 언제나 강같은 평화가 넘쳐 나고 바다 같은 사랑이 가득하고 샘 솟는 기쁨이 넘쳐 나는 나날을 살아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노아를 보라.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다. 그러나 100년 세월동안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언약의 사람으로 굳굳하게 살아갔다. 방주 건설하기 전보다 더 위험한 것은 홍수가 끝난 다음이다. 그렇지 않나. 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가 살아 남았다. 물이 걷힌 땅에서 농사하였다. 포도 농사가 잘 되었다. 그 포도로 포도주 담가 마시고 술에 취해 잠들어 버렸다. 입었는지 벗었는지 의식도 없이 취해 잠이 들었다.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고 잠 든 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았다. 아들에게 창피를 당한 것이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사람은 위기를 대처하고 준비하고 극복할 때보다 그 위기를 극복한 후가 더 위험한 것이다. 

과거에 유명한 오하섭 교수의 따님이 오혜령(1941-)씨다. 이 분은 사랑받는 극작가요, 방송인이요, 배우였다. 60-70년대에 <별이 빛나는 밤에>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의 DJ였다. 이 분 한참 잘나갔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잘 나가는 인생이니까 막, 이리 그물 던지고 저리 그물 던지며 담겨 오르는 대로 물고기를 거두어 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위암하고 임파선 암이 말기였다. “ 당신은 한 석 달 정도 밖에 못삽니다.” 이 얼마나 큰 절망인가. 잘나가던 극작가가, 배우가 DJ가 이렇게 절망의 벽 앞에 서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갑자기 몰려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달력을 놓고 빨간 줄을 그어가면서 자기에게 남은 날들을 세어 갔다. 빨간 줄로 하루하루가 없어지는 동안에 금방 그 석 달이 다 지나갔다. 그런데 이 분에게 매주 백합 50송이를 보내면서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고 메모를 꽂아서 꽃을 보내는 분이 있었다. 자기가 죽을 날이 다가 오는데 꽃이 계속해서 전달되고 있었다. 

이제 오늘 내일 죽는 날을 기다리는데 또 꽃이 배달되어 왔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그래서 그 꽃에 머리를 턱! 쳐 박았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당기는 것 같았다. 당기는 것 같아가지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순간, “아, 살아계신 주님이 나를 붙드시는구나. 날 찾아오셨구나.” 할렐루야. 그래서 외쳤다. "죽음의 한복판까지 찾아오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때부터 이 오혜령씨가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눈물로 지은 죄를 회개하는데 얼마나 회개할 것이 많은 지, 눈물로 기도하는데 하루, 이틀, 삼일, 사일, 일주일, 한 달, 두 달, 반년을 그렇게 기도하며 회개하며 지냈다. 죽을 날짜가 훨씬 지났는데 계속 회개만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혼자 예배를 드리는데 온 몸이 오한이 와서 추워가지고 ‘아, 이제 죽는구나.’ 하고 이불을 딱 뒤집어썼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고백한 책에 보면 “'아, 이제 죽음의 시간이 왔구나.' 너무나 추워서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질 않았다. 어깨에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지고, 복수로 차올랐던 배도 꺼져 있었다.” 할렐루야. 주님이 치료해 주신 것이다. 주님이 절망의 디베랴에서 빈 그물을 건져 올린 오혜령씨를 만나 주신 것이다. 국민일보 출판국에서 매일 묵상집으로 네 권의 책이 나왔다. 이 내용은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에 담긴 내용이다. 그는 그 후로부터 새로운 인생길을 걸어 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기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의 남은 여생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원합니다.” 그 후 그는 오늘 날까지 경기도 어느 자그마한 마을에 가서 버림 받은 노인들을 위하여 ‘평화의 집’을 마련하고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하루 9시간씩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들을 섬기고 있다. 
1987년, 남편 권오정 목사와 함께 화성군 비봉면에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개원하고 지금까지도 헌신적인 사역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암에서 고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몸에는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다. 심근경색에다 좌골신경통, 신우염, 방광염, 통풍관절염, 저혈압(60-40)등을 달고 살았다. 그는 전에는 무의탁 노인들을 섬겼는데 지금은 27명의 의지가지없는 아이들을 섬기고 있다. 40여 가지가 넘는 난치병을 달고 살던 그는 올해 79살이다. 그는 그의 기도 묵상집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극작가여서 인지 역시 글도 아주 감동적으로 썼다.  맞다. 주님 없는 인생은 빈 그물 인생이다. 절망으로 가득한 인생이다. 주님을 만날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다가오는 법이다. “주여, 내게 오시옵소서. 이 절망의 빈 배에 오시옵소서. 문제와 고통과 괴로움의 빈 배에 주님 오시옵소서. 주님 나를 만나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내 안에 찾아 오실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선언이 무엇인가. 
감히 그 어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계속하여 질문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날을 뒤로 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나날을 살아가길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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