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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리하면(빌4:1-7) 201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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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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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9-24 16:19 조회 11,247 댓글 0
 
                      그리하면(빌4:1-7)                  2019. 9. 15


“나를 본 받으라”고 편지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는 부탁도 하였다. 빌립보교회의 구성원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 편지를 썼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市民權)을 가진 자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권면도 하였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달려가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고도 강조하였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이다. 빌립보 성 밖 강가에서 나염된 옷감을 장사하던 루디아가 첫 열매인 여신도였다. 그렇게 해서 부흥하기 시작한 빌립보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과 애착은 남달랐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모아서 보내 준 성금과 옥바라지의 물품들을 에바브로디도 편에 받아 들었다. 곁에 머물던 동안에 죽을병이 들었던 에바브로디도가 고침 받는 기적과 은혜도 체험하였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형편도 자세하게 전해 들었다. 

그래서 구구절절이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권면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권면하듯 혹은 자애스러운 어머니가 사랑스런 딸에게 권면하듯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빌립보서 2장 15절에 보면,

흠이 없고 순전한 신앙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길 원했다.
세상에서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빛으로 나타나길 원했다.

본문인 빌립보서 4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성도들은, “사랑하는 자들이며, 사모하는 형제들이며, 사도 바울의 기쁨이고 면류관인 자들이다.”

구구절절이 저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 자신의 사랑과 자부심과 긍지와 기대가 끈끈하게 묻어나는 애틋하고 사랑이 가득 찬 심정으로 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그리하면’이라고 정하였다.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平康)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는 말씀에서 정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 마음 속에 평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나.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답답하고 두렵고 염려가 많고 걱정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온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겠나.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면 아무리 고대광실에 살고 돈과 재산을 쌓아 놓고 산들 무슨 살맛이 나겠나.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늘 지켜 주신다면 무엇이 아쉽고, 누굴 부러워하겠나. 

그러면 주 안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그런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말씀일까.

같은 마음으로 주 안에 서라.
1-2절에서,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여겨지나. 지금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간에 주 안에 같은 마음을 품고 든든하게 서서 신앙생활의 우여곡절을 잘 이겨 나가야 할 성도들 중에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 안에 서라”고 하였는데 여기 ‘서라’는 단어는 군사용어이다.  ‘스테케테’(στήκετε)라는 이 단어는 전쟁 중에 있는 군인들이 사기기 충천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합해서 앞으로 계속하여 전진 하는 임전태세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경계를 서는 군인이라면 졸지 말고 자지 말고 사방을 둘러보며 맑은 정신을 밤을 새워 깨어 지키는 것이다. 적의 총알이 빗발치고 적의 포탄이 쏟아져 내려도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감하고 씩씩한 군인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에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한 사람을 네 사람이 들것에 메고 왔다. 예수가 계신 집안에 들어 갈 수 없도록 사람이 많았다. 네 사람은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 환자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 그들 네 사람의 믿음을 주목하여 보셨다. 고침 받은 중풍병자가 자기가 누워 온 상을 정리해서 들고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네 사람이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고 “지금 당장 지붕이라도 뚫자 그게 말이 되냐 그냥 돌아가자 다음에 예수 만나 뵐 기회를 다시 찾아보자.” 이렇게 서로 의견이 나뉘고 서로 주장이 달랐다면 어찌 그런 기적이 일어났겠는가.

그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는 거짓 교사들로 인한 위험이 심각하였다. 지난 주일에 대한 빌립보서 3장 15절의 “달리 생각하는 자들”과 3장 18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그들이다. 

교회는 교인이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아니면 천명이든 만 명이든 복음 안에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자들의 연합이 되어야만 한다. 주 안에서 진리를 따르는 자들의 연합을 이루고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는 이들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는다면 그 교회는 큰 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병들고 말 것이다. 

같은 마음이 무엇인가. 서로가 마음이 합해진 합심(合心)이며 서로가 마음이 하나 된 일심(一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가정이든 직장이든 그 어떤 사회생활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주인 생각 다르고 종업원 생각 다르면 되겠나. 남편과 아내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하나 된 공감대가 없다면 그 부부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겠나.

주인은 동쪽으로 가자고 하는데 직원은 서쪽으로 가면 그 가게 운영,  그 사업체 운영이 되겠나.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런 내용이다. “주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강조가 본문에서도 구구 절절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게 바울 생각이 아니다. 주를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인 것이다. 
지금 바울 사도는 자신의 그 어떤 견해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이런 편지를 쓰는 게 아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그 모든 강조의 바탕은 주님 안에서 그렇게 하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이며 권면인 것이다.  

맞다. 성도된 우리는 주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성장 환경이 다르고 살아오면서 겪어 온 경험들이 다 다르다. 성격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사회적인 역량도 다르고 관심 분야도 다르고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이들이다. 이것이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덧입으며 살아가길 원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우리가 주일 예배 후에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가다가 주일에 이렇게 한 자리가 같이 모여 예배드리는 그 중심이 무엇인가. 그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누구를 믿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드리는가.

우리는 서로가 다 다르지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지금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가. 저들 두 사람이 지금 서로 불화하고 있고 빌립보교회 불화의 불씨가 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저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권면하는 권면이 무엇인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요즘은 농촌의 논밭의 농사가 99% 기계화 되었다. 옛날이 농촌이 아니다. 씨를 뿌리고 농약을 살포하고 수확하는 그 모든 과정이 모두 다 기계화되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호미로 일하고 삽으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농촌의 어른들의 허리는 낫처럼 기억자로 휘고 펴지지 않을 정도로 일 속에 묻혀 살아 왔다. 

옛날 농기구 중에 그나마 ‘가래’라는 것이 있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의 그 가래 말이다. 

어렸을 적 기억에 농촌사람들은 대장간에서 삽의 크기를 개인용 삽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다가 2-3미터쯤 되는 긴 자루를 끼어서 가래의 양쪽 머리에 귀를 만들어 굵은 밧줄을 매어 두 줄로 균형을 맞추어 서서 서로 잡아당기는 농사법이었다.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에 서로가 힘을 합쳐서 그렇게 연합해서 일했다. 밭에 큰 바윗돌이 나오면 지렛대를 사용하기도 하고 이런 원리로 거두어 내기도 하였다. 줄을 길게 매면 한쪽 줄에 여러 명이 달려 붙어서 힘을 합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게 그 당시에는 인력을 합친 포크레인(poclain)이었다. 

오늘날 신앙생활, 오늘 날 교회 생활이 그러하여야 한다. 주 안에서, 복음 안에서, 진리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서서 나누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굳건하게 영적 세파를 이겨 나가야 한다. 

유오디아 편에 서거나 순두게 편에 나뉘어져서 편 가르기 하지 말고 주님 편에 서야 한다. 유오디아는 유오디아 대로 순두게는 순두게 대로 자기주장, 자기 의, 자기 고집, 자기 힘으로 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 안에서 서로 같은 마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참다운 신앙생활이요 교회생활이다. 

달리 생각하는 이들이 가만히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면 믿음이 유약한 성도들은 이단과 사이비와 불신앙적인 세파에 흔들리고 미혹되고 만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끊임없이 물어 나가고 나와 우리공동체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찾아 나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가정, 건강한 가족,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복음전파에 힘쓰며 동역자들을 도우라.
유오디아나 순두게도 과거에는 한 때 사도 바울의 곁에서 복음 전파에 매진하고 힘을 쏟던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저들 사이가 벌어졌고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도 식어 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런 소식을 듣고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이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란 말씀이 그런 내용이다. 한 때 사도 바울과 함께 멍에를 같이 메고 열심을 품고 복음을 전하던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대표적으로 그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멍에를 같이한 자”라든지 “동역자들”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에 그만한 빌립보 교회로 성장하는데 헌신한 이들의 이름은 ‘생명책’(生命冊)에 있는 이름들이라고 하였다. 맞다. 주님께서 하신 요한 계시록의 말씀처럼 바울 사도를 통해서 빌립보서 4장 3절에서 언급하신 말씀처럼 우리 각 사람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의 주인공다운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자다운 그런 영광스러운 이름값을 하는 자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그런 거룩하고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서로 닫혀 진 마음이나 상한 마음이나 섭섭한 마음을 해소하고 서로를 도우며 다시 복음 전파에 매진하는 동역자들이 되자는 권면이다. 

그렇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 존립의 목적은 복음 전파이다. 교회와 성도들의 연합을 통해서 한 영혼 한 영혼이 복음을 영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로를 도우며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금번에 말레이시아 선교지에 선교 물품 보내기 광고를 계속하고 있다. 적은 양이라면 몰라도 많은 양의 선교 물품을 마련하고 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앞장서서 헌신하고 누군가가 나서서 자기 주머니를 열고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그냥 집안 벽장에 묵혀 있었거나 선반 위에 올려 져 있던 물건 몇 가지 보내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옷 한 벌, 운동화 한 켤레, 학용품이나 생필품 그 무엇 하나라도 마련해서 보내려면 마련하는 것도 자금이 필요하고 보내는 것도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광고를 몇 주 동안 계속하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렇게 한 주간이 흘러가고 또 한 주간이 흘러갔다.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도우심도 구하였다. 그러던 중에 우리교회에서 몇 년 전 성탄절에 부부가 세례를 받고 부인을 먼저 하늘나라로 환송한 한 가정에 연락하고 의논하였다. 그의 손길을 통해서 여러 기업체에 말레이시아에 머무는 미얀마 난민 어린이와 그의 가족들에게 선교 물품을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달되었다. 

이제 명절이 지난 오는 주부터 이 곳 저곳의 기업체를 통해서 수 천 만원 아니 몇 억 원 어치의 적지 않은 물품들이 교회 앞으로 속속히 배달될 것이다. 입고, 신고, 머리에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용품, 생필품, 건강식품, 바이타민 제품 등 등 별의 별 새 물품들이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정리해서 해운으로 포장해서 보내는 일도 큰 일일 것이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가 그랬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선교 물품들을 너도 나도 받았고 혜택을 입었다. 그런 선교의 손길에 의해서 배재학당, 연세학당, 이화 학당, 경신 학당, 세브란스 병원, 전주 예수 병원과 같은 학교, 병원 혹은 고아원을 비롯한 복지 시설들이 자리 잡고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혜택을 입고, 신고, 먹고, 학용품과 연구용품을 지원 받으며 배운 젊은이들 중에는 구한말에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의사가 된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이란 인물이 있다. 그의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 신분이었지만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을 통해서 장티프스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게 인연이 되었다. 구한말 시대적인 변화 가운데 백정 박성춘은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도 받았고 백정 출신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아들 박서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이처럼 거룩하고 숭고한 사명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교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날도 지구상에는 복음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불쌍하게 나서 불행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나의 주변과 열방 중에서 할 수만 있으면 복음이 복음되게 하는 일에 힘을 쓰는 동역자들로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올해 2019년은 경남선교 12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경남과 부산의 선교는 주로 호주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감당했다. 죠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 1856-1890)목사는 자기 나라에 학교를 시작하고 중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던 젊은 시절에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호주 선교사였다. 호주에서 한국까지 40일간 배를 타고 와서 1889년 10월 2일 도착했다. 서울에서 5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복음서를 들고 걸어서 전도하면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과로와 전염병으로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33살의 나이에 순직하였다. 이 분의 희생과 순교정신이 호주에 한국선교의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126명의 호주 선교사가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 와서 각처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윌리엄 테일러(William Taylor, 1877-1938) 선교사는 한센병자를 치료하다가 풍토병으로 61살에 숨졌다. 사라 멕케이(Sara Mackay, 1859-1592)선교사는 남편 멕케이 선교사를 도와 의료선교를 하다 부임한지 3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태중에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 채 33살에 주님 앞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마산선교사 공원묘지에 저들의 흩어져 있던 묘역을 모아다가 한 자리에 조성하고 기념관도 건립하였다. 

오늘날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할 사명은 무엇인가. 동역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의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부름의 상을 위하여 복음 안에서, 주 안에서 서로 돕고 동역하는 일이다. 우리 서로 돕고 도와서 주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만한 교회와 성도들의 연합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요즘 무슨 기도를 하며 지내는가. 요즘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주어진 일과 겪는 일 앞에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기쁨으로 하고 관용으로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무엇인가. 세상 끝날 날이 있다고 여기면 경건하고 진지해 지고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나. 다 두고 갈 것이라고 여기면 너그러워지지 않겠나. 빌립보서의 바탕이 되는 강조는 기뻐하라는 것이다. 

1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하였다. 
1장 14절에서 그리스도만 전파될 수 있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2장 17-18절에서는  생명의 말씀을 전파할 수만 있다고 하면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8)는 강조는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강조이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4장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관용 즉 자신의 너그러움을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라”고 권면하였다. 왜냐하면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누군가가 세상을 살다가 죽었는데 “여기 언제나 인색하고 자기만 알고 비겁하고 원망과 시비만 일삼고 너그럽지 못하게 살던 한 사람이 누워 있다.” 이런 평을 받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여기 복음 안에서, 주 안에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너그러움으로, 복음 전파의 열정을 갖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린 하나님의 사람이 누워 있다.” 이런 평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을 믿는 성도라면 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믿음 생활이란 무엇인가. 내 안에서 나를 향하신 소원을 두고 내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를 향하신 기쁘신 뜻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감사함으로 구할 바를 하나님께 기도하다 보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선하신 뜻이 내 안에서 점점 열매 맺고 응답되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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