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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나와 그리스도(갈2:20) 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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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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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8-22 15:23 조회 10,811 댓글 0
 
                            나와 그리스도(갈2:20)           2019. 8. 18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원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거부하던 자였다. 디모데 전서 1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전 모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誹謗者)요 박해자(迫害者)요 폭행자(暴行者)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맞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까지에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를 비방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폭행하던 자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행했던 몰지각한 야만적인 행동들이었다. 그래서는 예수 믿는 이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죽여 없애려고 혈기가 등등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 체험 이후에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성령 충만해졌다. 눈이 안보이던 삼일 후에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고 눈이 보이게 되었다. 사울을 만난 선지자 아나니아는 그에게 안수하며 “사울아... 예수께서 너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9:17)고 말할 때에 그 즉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삼일 후부터 다시 눈을 뜨게 된 사울은 그 날로 각 회당에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은 다 같이 놀라워하였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다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소개된 바울의 신앙 고백은 그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증명하는 고백이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신앙 고백과 간증이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각 사람의 고백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안다. 예수는 제자 가롯 유다의 배반을 받으셨다. 그 당시 대 제사장이었던 가야바와 대 제사장 문중의 심문을 받으셨다. 결국은 유대 지역의 로마 통치자였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인계 되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에게 십자가 사형 언도를 내렸다. 예수는 좌우편의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수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다.

변화되기 이전의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에 대한 소문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사울은 예수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예수가 누구인지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사울에게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다메섹 체험을 통해서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던 자였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자였다. 그의 지위는 대제사장을 쉽게 접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만나면 일일이 색출해서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잡아 가려고 하던 자였다. 

그처럼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사울이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런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든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그 믿음 생활이란 매 순간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의 연속이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이란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매 순간마다,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앞에 노출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얼마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들”로 가득한가. 마귀는 얼마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하며 유혹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나 자신이 매 순간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욕망들을 다스리고 감정을 절제하고 생각과 입의 말과 출입을 삼가야만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열 번 백번 실감나는 위기 속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동차 에어 필터를 교환 할 때에 자동차 기술공이 지난 몇 달 동안 사용한 에어 필터를 보여 주고는 한다. 처음에 새로 교체할 때에는 희고 깨끗했던 에어 필터가 먼지와 매연에 찌들어 있고 별의 별 크고 작은 이물질들과 크고 작은 나방들과 날 파리들이 필터 바깥 부분에 죽어 말라 찌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의 원 창조의 인간의 모습은 새 에어 필터와 같은 순결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와로부터 시작해서 아담에 이르기 까지 뱀으로 등장한 마귀의 유혹 앞에서 무너졌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긴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은 보는 것이 죄요, 듣는 것이 죄요, 생각하는 것이 죄요, 들고 나고, 앉고 서는 그 모든 자리가 죄와 유혹의 자리이다.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사는 죄 사함을 위한 것이다.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번제는 소나 양이나 염소를 완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희생의 의미이다. 소제는 곡물을 빻아서 드린다. 동물 제사가 아니니까 피 흘림이 없다. 선물, 예물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동물 대신에 곡물을 곱게 빻아서 불에 태워 드리거나 무교병으로 번철에 굽거나 솥에 삶거나 하여 드린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상징한다. 

화목제는 그 이름대로 화목을 목적으로 드리며 감사와 서원 그리고 자발적은 헌신을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는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22,27,5:18)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 1,4,15)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속건제(Guilt Offering)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낱낱하게 고발하고 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9-31)

이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악을 매 순간마다 낱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우리는 내 안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내 육체의 타락한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면 그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여기서 언급하는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가 나 자신을 매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증거는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분명하다면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야만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래야 맞다. 그런데 여전히 내 안에 내 육체적인 자아가 꽉 자리 잡고 있다면 심각한 것이다. 그건 아직 믿음의 사람이 아닌 증거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증거이다. 

새번역 성경을 읽어 보면 오늘 본문은 이렇다. 천천히 다 같이 읽어 보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맞다. CCC 사영리에서 소개하는 그림 자료를 잠시 함께 보자. 

예수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예수를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해 들이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내가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예수는 철저히 내 삶의 영역 밖에 방치되어 있다.

그 다음 단계는 내가 예수를 영접한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예수를 곁으로 밀어 내고 내 안에서 내가 주인 행세하는 모습이다. 

마지막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예수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 가운데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구약 성경 시대의 인물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인가. 창세기의 요셉이나 사무엘이나 다니엘이 아닌가.

창세기 39장 3절에 보면 요셉을 종으로 부리던 주인 보디발조차도 히브리 종 요셉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사무엘상 3장 19절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 사무엘은 평생토록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고 사자 줄 어귀를 막고 왕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인봉하였다. 그런데 궁금한 왕이 다음 날 새벽에 급하게 사자 굴로 가서 보았다. 사자 떼에게 물어 뜯겨 죽었어야 할 다니엘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고 다니엘을 구원하셨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들을 붙잡아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다. 저들의 몸이 굴의 바닥에 닿기도 전에 굶주린 사자들이 달려들어 물어  뜯었고 뼈까지 부서뜨렸다.

이러한 일 후에 다리오 왕은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렸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단6:26-27)

하나님은 다니엘을 다리오 왕 시대와 바사의 고레스 왕 시대에 까지 이어지도록 형통하게 하셨다.

물론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형통하고 번영하고 잘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이 요한 사도 말고는 모두다 부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 당하였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목 베임을 당하여 죽임 당하였다.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는 환난과 핍박과 박해를 극복해 가는 순교자의 피 위에 처처마다 교회가 세워진 고난의 역사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개신교보다 먼저 전파된 천주교도들이 겪은 핍박은 훨씬 심각하였다. 개신교도들도 구한말, 그리고 일제시대와 6. 25 전쟁을 겪으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며 죽어 가야 했는가.

올해 우리가 교회의 표어를 시편 1편에서 택하였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을 우리 모두는 다 좋아한다. 사실 그 말씀의 원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 가까이 하는 말씀 묵상 생활에 대한 강조이다. 어떤가. 우리가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묵상하며 지낸다고 해서 만사형통한가. 아니다. 밤낮 주여 주여 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고 오해 받을 때도 있고 시기 받고 조롱 받을 때도 있고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겪을 때도 여전히 있다. 주여 주여 하며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사고도 없고 질병도 없고 걱정 근심 염려도 없고 슬픔과 괴로움이 전혀 없는 천국 생활만 계속되는 것은 사실 아니다. 
그러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인생의 특징은 무엇인가.

가령 창세기의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의식한 신앙 양심으로 인하여 여주인 마님의 유혹을 뿌리쳤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부담으로 인하여 임금 사울에게 크게 실망하였고 사울 왕과 대립의 각을 세워야만 하였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왕이 하사하는 음식이라도 거부하겠다는 올 곧은 신앙 태도로 인하여 시기 질투를 받고 사자 굴에 던져 지는 신세가 되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다가 붙잡혀서 풀무불 속에 던져 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그리고 지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 앞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매 순간마다 실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감하고 고백하는 것이 간증이다. 

그런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이 이런 찬송이 아닐까. 
“예수 사랑하심은”(563장 찬송)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세상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아멘

나를 향한 누군가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에 감사해 하고 감격해 하지 않나.

중학교 때 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모두 다 잃고 수 없이 자살 시도를 하던 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예수를 만났다.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이재서(1953-)이다. 신학교 3학년 때 시작한 선교 단체 ‘밀알’은 40년이 지난 오늘 날 세계적인 선교 기관으로 자라났다. 그는 지난 5월에 총신대학교 총장에 당선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 유학 가서 앞 못 보는 상태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총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겼다.

11명의 총장 후보들과 경선해서 떳떳하게 총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최근의 어느 간증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눈 팔일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무서울 것도 없다.”

그는 자신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라고 고백하였다. 그가 총장이 되자 그의 주변에서는 그 많은 결재 서류들을 앞을 못 보는 상태에서 어떻게 일일이 결재하려고 하느냐는 염려의 목소리가 높았다고 했다. 그는 “저의 연약한 공간이 여러분이 제 곁으로 들어오실 공간입니다.”라는 재치 있는 표현으로 협력과 도움을 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셨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를 무덤에서 부활시켜 내셨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5:13)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과연 나에게 있는가.
그렇다면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를 믿는 믿음 가운데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라. 복음서에 보면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출입하시던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뿌리째 말라 죽은 기록이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가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하고 관심을 보이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11:23-25)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 받는 자 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천국 백성다운 삶을 가꾸어 가자. 우리 각 사람을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그 영원하신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다시 새번역 성경으로 본문을 묵상하자.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각 사람이 승리의 나날을 가꾸어가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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