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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을 지키라(레23:15-21, 신16:9-12) 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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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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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7-16 15:16 조회 9,759 댓글 0
 
                맥추절을 지키라(레23:15-21, 신16:9-12)       2019. 7. 7 맥추감사주일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로부터 모든 제사와 예배에는 하나님께 봉헌하는 예물이 있었다. 오늘 날의 예배란 곧 구약의 제사인데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게 드려야 한다. 마음과 뜻과 정성이 담긴 제사여야 합당한 제사인 것이다.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제물에만 마음이 있다.”는 우리 말 속담처럼 마음이 다른 곳에 가서 있는 제사와 제물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창세기 8장에 보면 홍수 후에 노아는 여호와 앞에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해서 번제를 드렸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나아갔다. 가나안 땅을 향하던 아브라함은 세겜을 지나서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다. 그 후로도 아브라함은 가는 곳곳마다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무엇인가. 신앙 생활하는 것을 제단을 쌓는다고 표현한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것이 곧 예배이고 신앙생활이다. 

이와 같은 제사 신앙, 예배 신앙이 나중에 가서는 사무엘의 때와 다윗의 때에 민족적인 제사로 거행되었다. 솔로몬은 20살에 왕이 된 후에 기브온에 있는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 

제사 신앙, 제물 신앙이란 날마다 드리는 상번제이든 절기 때에 드리는 절기의 제사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제정하셨고 오늘 날까지 성경을 통해서 이어져 오는 세 가지 절기는 유월절과 칠칠절인 맥추절과 수장절인 추수감사절이다. 제물로는 소제로 드리는 곡식과 전제로 드리는 포도주와 화제인 번제물로서 드리는 소나 양이나 염소가 동원되었다. 
오늘 지키는 맥추절은 칠칠절이라고도 한다. 맥추절은 그 해 보리 이삭을 첫 소출로 베어서 그 한 단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초실절로부터 일곱 주를 세어서 요제(搖祭)로 지키는 절기이다. 그래서 맥추절을 칠칠절이라고도 한다. 
레위기 본문에 ‘요제’라는 표현은 ‘흔들어 드린다.’는 의미에서 제사의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 이것 좀 보세요 올해도 이렇게 복을 내려 주셔서 보리농사의 첫 이삭을 거두어 그 첫 단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하고 흔들어 드리는 제사방법이다. 직업 얻은 첫 열매, 하루의 첫 열매, 한 주의 첫 열매, 한 해의 첫 열매 드리는 신앙이 다 여기에 근거한다.  

레위기 23장의 소제, 전제는 제사의 제물이 곡물이냐 포도주이냐의 무슨 제물로 드리느냐는 구분이다. 번제는 화제 즉 양이나 염소나 소를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의 방법이다. 속죄제나 화목제는 제사의 내용이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번제와 소제에 대하여 자세하게 나온다. 레위기 3-4장에 보면 화목제와 속죄제에 대하여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시간 긴 설명을 나눌 수는 없지만 쉽게 이해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로 인하여 불화한 상태에서 화목제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용서를 구하는 제사가 화목제이다. 또한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 사함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다. 

맥추절을 지키는 제사의 방법에 대하여 레위기 23장이 말씀하였다. 소제를 드려라. 그 해에 농사한 보리로 떡을 만들어 떡 두 개를 하나님 앞에서 요제로 흔들어 드려라. “그 떡을 만들 때에 고운 가루로 하여라. 누룩을 넣어서 하여라. 구운 것으로 하여라.” 이런 제사의 준비와 진행 과정을 보면 정성이 들어간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른 아침 출근길에 빵 집에 가서 따끈따끈한 빵을 한 두 덩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빵 집 주인은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이미 몇 시간 동안 수고하고 애를 써서 그날 올 손님들에게 팔 빵을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어서 오븐에 구워 내는 것이다. 수고와 정성이 들어간 것이다. 제사 즉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 우리의 예배 태도, 제사 신앙의 태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보리 이삭 한 단을 거두기 위해서 저절로 농사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보리 이삭 한 단이 무엇인가. 우리는 각자 직업이 다르고 사회생활의 분야가 다르다. 소득도 다르고 살아가는 경제 여건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주신 건강, 주신 지혜, 주신 역량, 주신 삶의 역량과 경험과 능력을 가지고 나름대로 각계 각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땀 흘려 수고하는 일이든 아니면 늘 머리를 써서 정신을 차리고 사무적인 그 어떤 업무를 분석하고 파악하고 결정하고 추진하는 일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그런 일정한 그 어떤 일을 하는 중에 경제적인 소득이 발생하고 그것을 통해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녀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경제생활을 하게 된다. 내가 밀과 보리와 쌀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도심 생활의 다양한 직업 현장에서 경제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맥추절도 지키고 수장절인 추수감사절도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23장의 읽은 본문 뒷부분에 보면 어린 양 일곱 마리를 드리고, 어린 수소 한 마리를 드리고, 숫양 두 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리고 일 년 된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로 드렸다. 제사장은 두 덩이의 떡을 요제로 드릴 때에 두 마리의 어린 양도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드렸다. 

이것은 여호와 앞에 거룩한 제물 즉 ‘성물’(聖物)로 드리는 것이며 여호와께 ‘향기(香氣)로운 제물(祭物)’로 드리는 제사이다. 레위기 23장 21절에 보니까 “이는 너희가 그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고 명령하셨다. 

절기는 사람 앞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16장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태도로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셨는가.


네게 복(福)을 주신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라고 하였다. 맞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분복(分福)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도전하고 열심을 다해서 복을 받는 것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각 사람이 자기가 타고난 분복이 있다. 

물론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야 복이 임하는 것 맞다. 시편 1편 말씀처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이나 죄인과 비교해 보면 그 생각이 다르고 그 가는 길이 다르고 그 앉는 자리가 다르다. 다르다는 말이 무엇인가. 구별된 삶을 가꾸어 갈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임하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傲慢)한 자와 생각과 가는 길과 앉는 자리를 달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가꾸어 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가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다. 그런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아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악하게 살고, 죄 되게 살고 오만하게 살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하고, 예배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인생이 있는가. 물론 죄와 악을 일삼으면서도 “하나님. 하나님.”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화인 맞은 양심의 사람이 아니겠나. 타락의 극치가 아니겠나. 

올해도 벌써 반년이 지나고 또 한 주간이 지났다. 지난 반년을 뒤 돌아 볼 때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감사요 크고 작은 모든 떠오르는 생각들이 감사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올해의 지난 반년이 나에게 있어서는 내 생애 중에 가장 힘겹고, 가장 마음이 무겁고, 가장 답답하고, 가장 슬프고, 가장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이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일, 그 어떤 사건, 그 어떤 경우를 겪었다고 할지라도 엄격하게 생각하며 뒤 돌아 보면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 내게 생명이 남아 있는 것이 복이요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것이 복이요
지금 내가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더군다나 맥추절을 맞아 절기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복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던 손양원(1902-1950) 목사는 순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여순 반란 사건 때에 공산당의 총에 잃었다. 일제시대 말기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올곧은 믿음을 갖고 있던 두 아들들이다. 신사 참배 반대하던 손양원 목사 자신도 해방 되는 날까지 5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수의 한센 병 환자들 중심으로 모이던 애양원교회에서 두 아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한 날 한 순간에 잃은 슬픔을 억제하며 10가지 감사 기도를 드리는 내용의 조사(弔詞)를 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열 번 째,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안재선을 자기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손재선이란 이름으로 양자가 된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은 목사가 되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이다. 

2년 후인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 자신도 48살에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였다. 

손양원 목사와 같은 생각, 그런 신앙관으로 보면 우리 각 사람이 지금 살아가는 그 모든 형편, 그 모든 처지, 그 모든 환경, 오늘 이 순간 기도하는 그 모든 기도 제목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다. 그러므로 감사 신앙의 바탕에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란 믿음과 고백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힘을 다하여 자원(自願)하는 예물(禮物)로.
하나님 앞에 제사하고 제물을 드리되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바탕이 무엇일까. 감사 신앙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라. 나는 무엇 때문에 매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앞에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있는가. 실로 나 자신이 힘을 다하여 예물을 드리고 지원하여 예물을 드리고 있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주신 복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맞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신앙의 바탕은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릴 때에 누가 시켜서 누가 하라고 해서 했겠는가. 아니다. 솔로몬 자신이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이다. 

사울 왕 때에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를 다윗 왕 때 되 찾아 올 수 있었다. 다윗은 기뻐서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에봇을 입었는데 몸이 드러날 정도로 기쁘게 춤을 추었다. 사울의 딸인 왕비 미갈이 볼 때에 체통 없어 보일 정도로 기쁜 춤을 추었다. 왕 다윗이 법궤 되찾아 오는 기쁨을 어린 아이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것이 힘을 다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힘을 다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예루살렘의 긴긴 세월 동안 무너져 방치되어 있던 성곽을 느헤미야가 앞장서서 52일 만에 다시 쌓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 날 나에게 회복되어야 하는 신앙은 무엇인가.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신앙이 아닐까. 시간, 재물, 경험, 은사, 봉사, 섬김, 헌신, 희생 그 모든 바탕에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그 중심을 기뻐 받지 않으실 까.

예수의 발에 향유 나드 한 옥합을 깨트려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씻는 마리아의 마음이란 힘을 다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그걸 허비한다고 책망하고 시비 걸던 가롯 유다의 마음은 인색한 마음이요, 주님에게서 멀어진 마음이요, 결국은 마귀에게 그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불행한 마음이 아닌가.

고린도 후서 9장 7절에 보면, 연보와 헌신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라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 한 번을 드려도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하는 것과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절절 묻어나도록 진심으로 정성이 느껴지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나.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절기 예물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아 또 맥추절이야, 아 또 추사감사절이야”가 아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기쁘고 감사하고 설레고 즐겁게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복을 받을만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즐거워하며 택(擇)하신 곳에서.
절기 예물을 드리되 아무데서나 드리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였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다 함께 누구나 예외 없이 다 같이 드리라고 하였다. 우리 가정, 우리 가족, 우리 자녀, 우리 교회의 모든 이들이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이 곳, 예배의 자리에서 힘을 다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또 드리는 복되고 은혜로운 나날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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