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마25:1-13) 2021. 3. 21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들의 비유는 또 하나의 천국 비유이다. 여기 열 명의 처녀들이란 신부의 들러리들을 말한다. 유대의 결혼 풍습에는 10명의 결혼식 들러리를 세우는 전통이 있었다.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다.
유대의 전통 결혼은 신랑이 신부의 집을 찾아간다. 신부의 집에서 일정한 유대교 전통의 결혼예식 순서를 가진 후에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이 다 같이 신랑의 집으로 이동해서 결혼식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보통 일주일씩 밤낮으로 성대한 결혼식이 진행된다. 길게는 두 주 동안 결혼식을 이어가기도 한다. 하객들은 잔치 자리에 제공되는 맛있고 풍성한 음식을 날마다 먹고 즐기며 마음껏 신랑과 신부의 장래를 위하여 축복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시간에 결혼식을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시간이 하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해가 지면 곧 어두워지기 때문에 들러리들의 중요한 임무는 횃불을 환하게 밝히는 것이다. 여기 등과 기름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등이 아니라 횃불이다. 횃불은 긴 막대기 끝에 솜방망이로 만들어서 한 시간에 서너 번씩 감람 기름을 계속 부어 주어야 횃불이 활활 타오르게 된다. 그 횃불의 화려한 불빛이 신랑의 오는 길을 밝히고 결혼식을 알리는 중요한 예식 중의 하나였다. 깜깜한 밤중에 많은 횃불을 밝히는 것은 잔치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유대인의 전통 결혼식을 예로 들어서 비유로 천국 교훈을 하신 것이다. 미국 생활 10여 년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결혼식에 신랑과 신부의 들러리들이 여러 명 동원되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전통을 이어 받았는지 미국의 결혼식도 거의 다 밤에 열린다.
자료에 보니까 2015년 스리랑카에서는 126명의 들러리를 세워서 기네스 북에 오른 성대한 결혼식 장면이 전해지고 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을 교훈하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의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열 명의 처녀들은 예수의 재림의 날까지 이 세상에 살아가며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고 하였다. 예수의 비유의 말씀을 차근 차근 대하며 교훈을 깨닫도록 하자.
등과 기름을 준비하라.
신랑의 결혼식에 신부 들러리로 초대 받았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그 열 명이 들러리 처녀들을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로 구분하였다. 이유가 무엇인가. 미련한 처녀들이나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모두 다 등은 준비하였다. 그러나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신랑이 도착할 예정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신랑이 나타나질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겨서 신랑이 더디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여하튼 신랑이 오지 않으니 결혼식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37년째 목회하는 동안에 결혼식 주례를 참 많이 하였다. 그런데 어떤 때는 신부가 예식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장을 마치고 결혼식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차가 막혀서 결혼식을 마냥 기다리며 시작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결혼식에는 신랑이 더디 오게 되었다. 이 정도의 기름이면 충분하겠다고 여겼던 열 명의 들러리 처녀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다 졸며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얼마를 졸며 자고 있는데 깊은 밤중에“보라 신랑이라다 맞으러 나오라”는 큰 소리가 들렸다. 졸며 자다가 깨어 보니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 때까지 충분한 기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미련한 다섯처녀들이었다. 저들은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데 여분의 기름이 모자라는 상태였다. 다급해진 다섯처녀들이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처녀들은 “서로 나누어 쓰기에는 부족하니 차라리 가서 사다가 쓰라”고 대답해 주었다.
비유는 해석이 중요하다. 그러면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등’(燈)은 성도들의 형식적인 신앙 생화 모습을 말한다. 반면에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그렇지 않나. 주일 예배를 드린다. 나름 새벽 기도 생활도 한다. 성경도 조금씩 꾸준히 읽는다. 속회도 모인다. 헌금 생활을 한다. 십일조를 잘 드린다. 일천 번제를 드린다. 봉사도 잘하고 단기 선교도 다녀오고 무슨 일에도 발 벗고 앞장 서기도 한다. 전도 현장에도 가능하면 나가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이다. 이는 마치도 등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문제는 ‘기름’이다. 기름이 떨어지면 등은 아무 소용 없다. 우리 교회는 주방 요리용 연료만 도시가스이고 건물 전체의 냉난방과 조명과 음향과 영상 등 일체가 다 전기를 에너지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만약에 전기 공급이 끊기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대체할 수 있는 발전 시설도 없다. 물론 종합 병원 같은 경우는 만약을 대비해서 발전기 설비가 예비 되어 있겠지만 우리 교회는 그런 정도의 비상 설비는 없다. 여하튼 전기 공급이 끊기는 순간부터 일체의 냉난방과 조명, 음향, 영상 장비를 포함한 방송실 모든 기능이 마비되고 만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신랑을 기다리다가 당황해하는 다섯 명의 처녀들을 미련하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성령 충만의 상태를 계속해서 지속해 나가는 생활이다. 그렇지 않나.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의 모습을 보라.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가. 저들 12제자가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삼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았는가.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돼지 떼 3,000마리에게 귀신이 옮겨 가게 되자 그 많은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장도 목격하였다. 벳세다 광야의 남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이만여명의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오병 이어의 기적도 보았다. 그 밤 중에 갈릴리 호수로 걸어 오시는 예수의 모습도 체험하였다.
그처럼 다양한 기사와 이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왜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가 버렸는가. 성령 받지 못해서 그렇다. 나중에 보아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몇 차례 만나 주셨다. 사랑에 대하여 확인하시기도 하셨다. 승천하시기 전에는 성령 받기를 기다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권면하셨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성령이 임하기를 사모하던 맛디아를 포함한 12제자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동생들을 포함한 120여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지난 2천 년의 교회 부흥의 시작이며 역사이다.
교회는 철저히 성령 중심이어야 한다. 세상은 어느 학교 출신이냐, 전공이 뭐냐,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냐, 기술이 얼마나 좋으냐, 경력이 어떠하냐 등등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서 판단한다. 그러나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든 사역들은 성령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불길처럼 번져 가고 이룩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늘 사모하여야 한다. 불과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항상 성령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생활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깜빡 깜빡 불이 꺼져 가는 등을 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길이 무엇인가. 이사야 61장은 메시아 예언이다. 그 말씀의 시작인 1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1장 9절 하반부에 보면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요한일서 2장 20절에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하였다.
요한일서 2장 27절을 화면에서 보고 읽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므로 말세 시대, 즉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날마다 순간마다 사모하여야 하는 제일가는 사명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의 바탕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어야 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성령의 충만함을 말한다. 신랑을 기다라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풍성하게 준비된 기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기도할 때마다 겉으로 드러나는 등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지만 그 등에 불을 밝히 기름이 항상 충분히 준비되어 있나를 점검하고 주께서 내 마음 속에 풍성하게 넘쳐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하여야만 한다.
신랑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를 들으라.
신랑이 더디 오자 신랑을 기다리던 열처녀들이 다 졸며 잠이 들었다. 너무 피곤하고 너무 졸리면 졸고 자는 것은 당연하다. 5절에 보라.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하였다. 이는 지난 2천년 세계 교회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물론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는 대 부흥기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어느 교회나 어느 성도들이나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에 있어서는 ‘설마’하며 그냥 세상낙에 빠져 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 상태가 다 졸며 자는 상태이다.
신랑과 열명의 처녀들의 비유는 예수의 재림에 관한 비유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나. 종말이란 것이 우주적인 종말도 있고 지엽적인 종말현상도 있다. 이는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보다 내게 죽음의 순간과 심판 받을 날이 멀지 않게 다가 올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 우리 각 사람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등과 기름을 항상 준비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살다 보면 고단해서 졸며 잘 수 있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명의 처녀들도 다 졸며 잤다. 그러나 문제는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는 깊은 밤중에 갑자기 들려 올 그 순간에 충분한 기름이 준비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통장에 평생 충분히 쓸 돈이 저축되어 있다면 일단 경제적인 불안에서는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억만금으로도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리면 그 모든 돈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억만금을 주고도 현대 의학을 총동원하고 아무리 국제적인 명의를 만나도 내 병을 고칠 수 없다. 나는 이제 이렇게 죽음을 맞아들여야 한다. 그런 순간이 오면 우리는 돈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이들이 주로 부르는 찬양 중에 <돈으로도 못가요>라는 찬양이 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맘 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맞다. 종말 신앙, 재림 신앙은 등 뿐만 아니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이어야 한다. 이는 곧 누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가를 구별하는 구원과 심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느 깊은 밤 중에 갑자기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는 큰 소리가 들릴 때에 기쁜 마음으로 깨어 일어나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때와 그 시를 언제인지 알수 없는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며 신랑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의 마지막 교훈이 무엇인가. 13절에 보면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어느 병원 원장의 간증이다.
『유난히 바쁜 어느 날 아침에 나는 보통날 보다 일찍 출근을 했는데 80대의 노인이 엄지 손가락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 했습니다. 환자는 병원에 들어 서자마자 9시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면서 상처를 치료해 달라며 병원장인 나를 다그쳤습니다. 나는 환자를 의자에 앉으라고 했고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 전이라서 어르신을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것 같다고 이야기 해 쥤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계를 연신 들여다 보며 안절부절 초조해 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나는 보다못해 직접 환자를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내가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병원에 또 진료 예약이라도 있으신가 보죠?”라고 물었더니 노신사의 대답이, '“아닙니다 원장님! 그게 아니고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제 아내와 아침 식사를 매일같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이였습니다. 내가 다시 노신사에게 묻었습니다. “부인의 건강 상태가 어떠신데요?” “예, 안타깝지만제 아내가 알츠하이머(치매)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나는 노신사에게 다시 묻기를, “어르신께서 약속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많이 언짢아 하시나 보죠?”라고 물었더니 노신사의 대답은 의외로 뜻 밖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원장님! 제 아내는 남편인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지 벌써 7년이 넘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요양원에 가셔서 아내와 아침 식사상(食事床)을 같이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노신사는 인자(仁慈)하면서도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인 나를 몰라 보지만, 나는 아직, 아내를 알아 보거던요. 원장님!”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써 참아야 했습니다. 그는 간증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늘 그 노신사를 통해 사랑의 참된 모습,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고 참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는 기쁨에 내 양 팔뚝을 비롯하여 내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기다리는 생활이다. 신부의 들러리들인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등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듯이 주님을 기다는 생활이다. 우리는 세상살이가 힘겹고 짜증나고 괴로우니 어서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런 식의 기다림으로 주님을 기다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신랑과 신부의 잔치 자리에 초대 받은 그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갖고 항상 깨어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나는 주님을 잘 몰라 볼지라도 주님은 내 곁에 오셔서 사랑의 잔치 자리에서 함께 먹고 함께 춤을 추며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뻐하길 원하실 것이다.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일지라도 신실한 남편의 사랑이 날마다 계속되는 것처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기다리는 잔치 자리의 영광스러운 신랑으로 반드시 찾아 오실 것이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이 음성이 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은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문이 닫힐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라.
유대인들의 결혼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하고 나면 문을 닫아걸고 잔치를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 왜냐하면 결혼 잔치 자리에 강도와 도둑 등의 나쁜 세력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혼식 자리에 문이 닫히고 나면 그 누구도 절대 열지 못한다. 이런 저들이 결혼 풍습을 가지고 예수는 세상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시다. 그 후에 미련한 다섯처녀들이 뒤늦게 도착해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간청을 해도 굳게 닫힌 문 안에서“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냉정한 대답이 들려 나올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셨다.
냉엄하지 않나. 그렇다. 천국과 지옥은 그런 세계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이 하늘과 땅처럼 구분 되는 순간이 찾아 온다. 어제 묵상한 마태복음 24장 마지막 절인 51절 끝에서 예수는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경고하셨다. 달란트 비유의 끝인 마태복음 25장 30절에도 미리 보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경고하셨다.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마지막 절인 마태복음 25장 46절에 보면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교훈하셨다.
한 해 농사만 지어 보아도 알곡과 쭉정이의 교훈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하신 모든 천국 비유는 다 사실이다.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 남은 사순절 깨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