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이신 그 분(마23:1-12) 2021. 3. 14
마태복음은 28장 분량이다. 그 중에서 23장은 예수의 교훈 중에서 가장 강도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삼 년이 넘도록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다양한 비유의 말씀으로 가르치려 하였으나 바리새인, 서기관, 대 제사장 등은 도대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려 하질 않았다. 저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 가려고 음모를 계속하여 꾸미고 있었다. 예수께서 며칠 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아시면서 작심하시고 저들에게 제발 “나의 전하는 말을 들으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3장이다. 회개를 촉구하신 내용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내용이 13절부터 자세하게 반복된다. 단단히 화가 나신 예수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오죽하면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의 심판을 선포하셨겠는가.
유대인들 중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으스대려 한 이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따로 말하지만 사실은 서기관 직은 거의 다가 바리새인들이었다. 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는 자들이었다. 2절의 ‘모세의 자리’란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칠 때에 서기관들이 앉던 의자를 말한다. 이처럼 저들은 어딜 가나 남을 가르치는 지도자 행세를 하였다. ‘서기관’이란 직분은 선지자 에스라 이후에 생겨난 자리인데 저들은 유대인들을 교육하고 재판하는 겸직하는 막강한 지위를 누렸다. 때문에 저들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고 그래서 모세의 권위를 대행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저들이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순종하는 것보다는 기득권 세력으로서 “어떻게 하면 차지한 명예와 권력을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만 늘 관심이 많았다.
오늘 읽은 내용의 앞 부분에는 그러한 저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예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심각한 현실인다. 누가 나에게 “너는 네 아비 행동은 제발 닮지 말아라.” 이렇게 말한다면 저주에 가까운 말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 즉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지적 받았다. 겉으로 그럴싸하게 행동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보이는 데만 관심이 많았다.
저들은 경문의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해서 입고 다녔다. 남들에게 보이려는 의도였다. 경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까만 소가죽을 외쪽 팔둑에 칭칭 감고 다니기도 하고 사각 상자에 담아서 이마에 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런 전통은 오늘 날까지 이어진다. 테피린(Tefillin)이라고 한다. ‘지킨다. 보존한다’는 뜻의 ‘필랏소’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출애굽기 13장 1-16절, 신명기 6장 4-9절, 신명기 11장 13-21절을 그 경문에 새겨 외팔에 감거나 상자 안에 담아서 이마에 매고 다녔다. 세월이 지나면서 남들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경문의 줄을 점점 넓게 하기도 하였다. 옷 술도 점점 크고 길게 늘어트렸다. 흰색과 청색 실로 직조한 옷 술은 신명기 15장 37-41절에 말씀하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겉으로 드러난 모양만 이어온 모습을 지적한 것이다.
서기관인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즐겼다. 회당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남들에게 문안받고 남들이 자기를 선생이라고 지도자라고 즉‘랍비’라고 불러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한 저들에게 제발 깨달으라고 가르치신 교훈이 8절 이하에 계속된다.
한 분이신 선생.
예수는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옳고 바르게 가르쳐 주신 선생이시다. 예수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씀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서로 다 같이 형제 자매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을 유일하신 선생으로 표현하셨을까. 맞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라는 말씀은 예수는 이 땅에 스스로 선생되길 원하여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한 분이신 아들이시다. 한 분으로 오셔서 길과 진리와 영생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유일한 선생이시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도 각 분야에 선생이 있다. 각 분야가 그러하다. 음악, 미술, 도예, 서예, 건축 등 모든 분야가 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보니 그 어떤 분야의 최고의 선생에게서 사사 받기를 원한다.
예수 당시에 스스로 랍비라 칭함 받고 남들 위에서 구별 받으며 선생 대접 받으려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많았다. 넘쳐 났다. 저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경고하시고 교훈 하신 것이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아라. 너희 선생은 한 분이시다. 너희는 다 형제다” 물론 예수 자신이 이런 가르침을 교훈하시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스스로 자신이 그 유일하신 선생임을 천명하는 자리이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오래도록 동양에서는 공자(孔子, BC 551-479, 노나라), 맹자(孟子, BC 371-289, 추나라)를 능가하는 이들이 없다고 여겼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동서양에 남들이 인정하는 선생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사상, 철학, 신념, 종교적인 영향을 미치리만큼의 큰 역할을 한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 며칠 후에 돌아가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심각한 교훈이 말씀을 주목하여 보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즉 “너희 선생은 나 하나 뿐이요”라는 말씀이시다.
그렇다. 진정으로 예수를 선생 삼고, 스승 삼고, 랍비 삼고 그 분에게서 배워 보라. 그 분을 따라 보라. 그분을 나의 주로 모시고 살아보라. 지난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예수를 스승 삼고 예수를 선생 삼고 예수를 따라 살아 온 이 성령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어져 온 것이다.
몇 해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필리핀의 박 누가( -2018. 8. 26) 의사가 그런 주인공이다. 그는 외과 의사요 선교사로 30년을 필리핀 오지 마을 50여곳을 누비며 살았다. 직접 버스 운전을 배워서 버스가 오지를 찾아 다니는 이동식 병원이요 수술실이었다. 과거에 평범한 의대생이었던 박 선교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였다. 1989년부터 필리핀에서 의료 선교를 펼쳤다. 그는 1992년 췌장암 초기 단계에서 수술을 받은 뒤 위암 말기, 간경화, 당뇨 판정을 연이어 받았다. 마실 물이 부족하고 무더운 필리핀에서 물 대신 탄산음료를 주로 마신 것이 원인이기도 하였다. 2016년에는 위암까지 재발했다. 그런 몸으로 끝까지 현지인들을 돌보다가 이년 전에 주님 품에 안겼다.
필리핀의 열악한 의료 현실을 목격한 그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팔 등지를 돌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현지인들과 굶주린 아픈 이들을 찾아 진료하고 치료하고 수술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2016년에 극장에서 상영된 다큐 영화 <아픈 만큼 사랑한다>의 주인공이다. 2012년에 KBS 인간 극장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그는 필리핀의 오지를 찾아 다니는 버스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장거리 이동은 물론 장시간 치료와 수술을 이어간 뒤 밀려오는 피로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낙후된 의료상황으로 고통받는 현지인들의 불쌍하고 참담한 삶이었다. 소외되고 아픈 이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고 싶다는 박 선교사의 고백은 그를 가짜 선생이 아닌 진짜 선생, 진짜 예수 쟁이로 살다가 주님 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우리 각 사람이 입의 말로만 남들에게 가르치려 드는 선생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의 교훈을 이 땅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 한 분이신 선생의 고귀한 사랑을 내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이어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한 분이신 아버지.
예수의 교훈은 9절에 이렇게 이어진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으로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의 더 큰 의미는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맞다.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다. 우상 숭배자들이 주장하는 잡신 중의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은 은금을 녹여 부어 만들과 돌과 나무를 다듬고 깎아 만든 우상이 아니란 말이다.
출애굽기 4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광야로 이끌어 내시는 목적을 가르쳐 주셨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출4:22-23)고 하셨다. 맞다.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을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이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인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의 한 분이신 아버지”시란 말이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광야로 이끌어 내서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제사드리는 민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출애굽하게 하려 하신다고 하였다.
맞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백성으로 살아가야만한다. 제사가 예배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새벽 5시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나. 찬송하고 성경 말씀 묵상하고 감사 기도 드리고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이런 일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이란 말이다.
우리나라는 TV이만 켜면 막장 드라마 혹은 채널마다 먹빵 방송으로 도배를 한다. 채널마다 먹는 방송, 음식 만들고, 맛집 찾아 다니고, 먹는 것에 걸신 들린 사람들처럼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물론 먹어야 산다. 그러나 사람이 먹고 사는 게 다가 아니지 않나.
광야 40년을 출애굽한 백성들이 아침에는 매일 만나로 살아갔다. 고기 타령하면 하나님은 강한 바람으로 매추라기 떼를 광야에 떨어지게 해서 단백질을 공급받게 하셨다. 먹을거리로 하면 애굽이 훨씬 나았다. 애굽에는 노예였지만 먹을 것이 넘쳐 났다. 그러면 배 부른 돼지의 운명으로 마칠 것인가. 배 고픈 철학자로 살 것인가.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저들의 영혼육을 책임지시는 생명의 공급자이시며 사랑의 아버지이신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인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다.
그런 중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붙잡혀 살아 간 인생이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브라, 사무엘, 다윗, 히스기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에스더,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느헤미야가 아닌가.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이렇게 기도한다. 맞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용인시 기흥구에 가면 같은 로또 가게에서 19번 1등 당첨되었다고 해서 교통 체층 때문에 도시가 나서서 그 가게 앞 길을 넓히는 도로 확장 공사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몰려 가고 쏠려 간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는 세상의 것에만 너무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늘 아버지를 한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법을 깨달으라고 경고하신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였다. 그는 다윗의 고조모가 되었다. 모압의 남편 잃고 시어머니 나오미 따라서 이스라엘 베들레헴 마을에 들어가 살던 룻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기를 원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던 베들레헴 소년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길이 빛나는 다윗 왕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가 시편에서 만나는 다윗의 모습은 존경스럽고 아름답지 않나. 다윗은 육신의 아버지 이새의 사랑도 받았으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이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다.
우리는 찬양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찬양을 부르자.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
아버지 채워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한 분이신 지도자.
이어지는 10절 말씀에 보면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큰 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다. 그는 낮아지고 낮추심으로 영원히 경배받으시는 왕 중 왕이시며 선지자 중 선지자시며 제사장 중의 대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는 존경 받는 왕이시며, 선지자시며 단번 희생 제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 분이 스스로 말씀하셨다. “너희의 지도자인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 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1960년대 미국에서 쌍벽을 이루던 헐리우드의 두 여배우가 있었다. 한 사람은 유명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662)이고 또 다른 한사람은 에반스 콜린(Evans Colin)이다.
두 여배우는 얼굴은 물론 외모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1960년대의 쌍벽을 이루며 관능미를 자랑하는 헐리우드의 육체파 여배우 였다.
두 여 배우는 당대(當代)에 박수와 갈채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돈 방석에 앉아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릴린 먼로의 매혹적인 미(美)의 괴력은 그녀가 몸을 흔들며 춤을 추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당대의 젊은 남성들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매혹적이고 환상적이라고 언론들이 부추겨 댔다.
그녀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 부터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백악관의 대통령 앞에서 요염한 모습으로 “Happy Birthday to You” 를 불렀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그 날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본 케네디 대통령은 너무나 황홀하고 행복해서 해서는 않될 말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제 내가 대통령을 그만 두어도 여한이 없다.”얼마나 아름답고 행복 했으면 미국의 대통령을 그만두어도 좋다고 말했겠나.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와 인기를 한 몸에 누렸고 돈방석에 앉아
부귀영화를 한몸에 누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도 불륜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마릴린 몬로는 그 외도 수많은 남자와 복잡한 남자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마릴린 몬로는 허무와 갈증과 공허함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끝내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뉴스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37살 때의 사건이다.
그런데 마릴린 몬로에 못지않게 할리우드에서 많은 인기와 명예를 누리던 또 다른 여배우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반스 콜린이었다. 마릴린 먼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미녀 중 미녀였다.
그러나 에반스 콜린은 인기를 누리던 어느 날 갑자기 배우직을 청산하고 화려한 할리우드 은막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에반스 콜린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여러분! 저는 지금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그 깊은 사랑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할리우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청중들은 환호성을 쳤고, 언론들은 연일 뉴스 거리로 큰 화제가 되었다. 콜린 에반스가 사랑하는 남자가 도대체 누구냐? 고 외쳤다. 당시 기자들이 몰려와서 그녀에게 물었던 질문은,“누구와 그런 깊은 사랑에 빠졌는냐? 는 것이였다.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에반스 콜린은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십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나를 선택하신 그분에게 내가 지고 있는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지금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대학에 입학까지 했습니다.”
이후에 에반스 콜린은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와 결혼 하였다.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 선교사(宣敎師)로 파송 받아 우간다 험지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성실히 수행했다. 7년간 아프리카 선교를 끝내고 안식년 차 잠시 고국 미국에 왔던 에반스 콜린에게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물었다.
“에반스 콜린! 할리우드의 영광과 명예인기를 포기하고 험지인 우간다 선교사로 떠난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습니까? 정말 행복합니까?”
에반스 콜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후회(後悔)라니요! 목사님! 무슨 후회입니까? 내가 선택한 선교사의 자리는 나에게 과분하기도 하지만 나는, 영국 여왕의 자리나 미국의 대통령의 자리와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귀중하고 너무도 보람된 자리였습니다.”
그렇다. 예수 그 분이 나의 한 분이신 선생으로, 랍비로, 지도자라 깨달아지고 영접되는 순간 나의 운명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것이 부활 복음의 권세이다. 복음은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
모세의 자리, 윗 자리, 높은 자리만 부러워 하지 말고 낮은 곳에서 섬기며 살아갈 때에 진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의 신분을 흡족히 누리게 될 것이다.
남은 사순절. 부활의 새벽을 향하여 말씀 묵상과 기도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 가는 은혜로운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