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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 날에 예수께서(마21:12-22)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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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3-14 23:55 조회 7,122 댓글 0
 

    그 날에 예수께(마21:12-22)           2021. 3. 7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항하셨다. 성전 뜰에는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팔고 사는 사람들로 몹시 어수선하였다. 예수께서는 저들을 모조리 내쫓으셨다.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셨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다. 역사는 이 일을 ‘예수의 성전 청소’ 혹은 ‘예수의 성전 정화’라고 부른다.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고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마땅한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 강도의 소굴로 변한 것을 목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분노하신 것이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그 날 아침부터“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함성을 지르는 무리가 둘러서서 따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댔다. 수 많은 무리들이“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성장기를 보내셨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사십 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셔서 지난 삼 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이어 오셨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기사와 이적의 내용을 접하였다. 각색 병자를 고치셨다.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죽은 자도 살리셨다. 배가 고픈 벳세다 광야의 무리에게 풍성한 광야의 식탁을 제공하는 기적도 베푸셨다. 때로는 물 위로 걷기도 하셨다. 바람과 파도는 순식간에 잔잔하게 하기도 하셨다. 무리뿐만 아니라 제자들 조차도 예수를 대하는 일은 날마다 기적이요 날마다 새로운 은혜의 연속이었다.


그런 예수께서 몇 차례 심각한 말씀을 하시고는 하셨다. 장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조롱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해 주시고는 하셨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는 그래서 예수께 다가 오는 죽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고 책망을 받기도 하였다. 


이제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며칠 후면 예수께서 가롯 유다에 의해서 배반을 당하실 것이다.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예수는 유월절 저녁 식사를 끝으로 밤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새벽녘에 붙잡혀 가신 후에 그날 오전 아홉 시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다. 정오에는 해가 빛을 잃고 땅이 갈라졌다. 무덤 속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기도 하였다. 오후 세 시경에 예수는 운명하셨다. 그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양편으로 갈라지는 이적이 일어났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죽임당하기 며칠 전에 있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제목을 ‘그날에 예수께서’라고 정한 것이다. 그날에 예수께서는 무슨 일을 행하셨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기도에 대하여.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이들을 내어 쫓으신 그 날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씀인가. 


그렇지 않나. 성전(聖殿)은 모세 때에 광야에 세워졌던 성막(聖幕)이 그 원형이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그 일이 가능하도록 모세를 앞장 세우셨다. 성막 생활은 광야 시대와 가나안 생활로 이어진 사사시대를 거치고 초대 임금 사울과 대를 이은 임금 다윗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윗의 소원으로 아들 솔로몬 왕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졌다.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그 성전이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헐려 나갔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온 후세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였다. 주전 515년의 일이다.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주전 168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 하스모니아가(家)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유다 마카베오는 목숨을 바칠 각오로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봉헌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유대인들에게 매년 하누카 절기(봉헌절)를 지키는 것으로 기념되고 있다. 


주전 63년에 로마정복 당시에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으나 성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 후 주전 54년 크라수스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약탈했다. 


그 후 유대 왕이었던 헤롯 대왕(BC 37~AD 4 재위)이 새로운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재건 작업은 주전 20년에 시작하여 46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헤롯은 하나님 신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전 재건에 앞장섰다. 주후 70년에 로마군의 침략으로 헤롯 성전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오늘 날은 그 성전의 서쪽 벽만 남아 있다. 소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곳이 그곳이다. 


예수 당시에 그 성전에서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사고 팔며 동전을 바꾸는 상업 행위가 성행하였던 것이다. 흠 없는 제사용 제물을 마련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폭리를 취하고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배후에는 그런 과정을 묵인하며 이익을 서로 나누는 대 제사장이 버티고 있었다. 

그 현장을 보고 화가 몹시 난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지적하시며 성전 청소 작업에 나선 것이다. 


대 제사장이 앞장서고 수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서로의 비리를 눈 감아 주며 그 폭리를 서로 나누어 먹기를 익숙한 생활로 이어가던 때이다. 성전을 중심으로 경제적인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자리 다툼하고 매관 매직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뜰의 장사꾼들의 현장을 뒤 엎어 버리시는 사건으로 인해서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노하도록 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15절에 보니까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성전 청소 사건과 성전에서 크게 소리 지르며 호산나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怒)하였다고 했다. 이는 화를 벌컥 내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불의를 행하고도 오히려 분노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대하여 시편 8편 2절 말씀을 인용하여 교훈하셨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어린이들의 입을 빌려서라도 호산나 찬양을 계속하게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에 예수는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치는 ‘호산나’의 주인공으로 저들을 구원하는 구주로, 메시아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께서는 왜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오늘날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집은 어떤 곳인가. “내가 이만큼 충성하고 이만큼 헌신하고 이 만큼 앞장서서 일했으니 내게도 뭐 좀 생기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태도로 성전을 향하고, 교회를 향하고, 예배드리는 태도의 중심에 서서히 예배당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을 팔고 염소를 팔고 비둘기를 팔고 동전을 바꾸어 수익을 챙기듯이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그런 상업의 현장처럼 대하며 주문 외우듯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기도다운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남들이 알아 봐 주기를 바라며 눈에 띄는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처럼 기도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해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의 흐트러져버린 기도의 자세를 새롭게 하는 기회이다. 물론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고 어느 시간에나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19를 핑계로 느슨해진 예배와 기도 생활을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기도는 양보다 질이다. 그러나 양이 없는 질이 어디에 있고 질이 없는 양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기도는 사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순례의 과정임이 분명하다. 


어느 기도원에 목요일 밤마다 기도하려고 올라가는 목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목사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저녁도 먹지 않고 잠바 차림으로 담요 한 장을 옆구리에 끼고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밤새워 기도하고 다음 날이면 아침도 금식하고 하산하고는 하였다. 그런데 어느 목사는 도착하면 기도원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잔뜩 배부르게 먹고는 밤새 잠만 자다가 일어나서 아침 식사도 잔뜩 먹고 하산하고 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다. 기도원 원장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잠만 자다 가려며 집에서 자면 되지 왜 기도원에는 오는가. “와서 기도는 안 하고 저녁도 잔뜩 먹고 아침밥도 잔뜩 먹고 밤새 잠만 쿨쿨 자다 내려가고는 하나” 하고 의아해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매주 밤새워 산꼭대기에서 철야기도하는 그 목사의 교회는 부흥이 안되는데, 오히려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그 목사의 교회는 어마어마한 교회로 부흥이 되더란다. 기도원에서 밤새 철야하고 산 기도하고 늘 금식하고는 하던 목사는 언제나 눈이 충혈되어 있고 누가 보아도 늘 피곤에 쩔어 있었다. 그렇지 않겠나. 밤새 산 기도를 했으니 오죽 피곤하겠는가. 그런데 교회는 점점 어려워만 갔다. 그런데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그 목사의 교회는 차고 넘치게 부흥하더란다.


이런 이야기에 절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쩌면 기도는 내가 뭐라고 뭐라고 많은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내 안에 주님이 주님 안에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다. 내 가정, 나 자신, 내 일터, 내 직장, 내 사업, 내 상업의 현장, 우리들의 교회 등 범사에 주님이 어떻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고 은혜가 임해야 하는 것이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데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가 세계를 위협하니까 꼼짝 못 하고 벌벌 떠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방역도 하고 거리 두기도 하고 마스크도 꼭 쓰고 개발된 백신 투약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중국 우한에서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 19라고 이름 붙인 이 바이러스 이전의 우리의 일상, 나의 일상이 얼마나 대단한 주님의 축복이며 은총의 날들이었는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에서 인용하신 말씀이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고 하였다. 그렇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다. 예배당은 예배드리는 집이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경배하는 집이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여기 모여서 기도하고 여기 모여서 찬송하고 여기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면 안 된다. 그러면 큰일 난다. 이 집의 주인은 기도를 들으시고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오늘도 각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병자들에 대하여. 

예수는 성전을 청소하는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예수께 나아 오는 시각장애인들과 보행 장애인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다. 앞 못 보는 자들을 보게 해 주셨다. 걷지 못하던 자들을 걷게 해 주셨다. 이는 대단히 상징적인 치유 사건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깨닫지 못하는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영적으로 앞 못 보는 이들이었다. 정의에서 벗어나서 갈팡질팡하며 성전 뜰을 장사꾼,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고 이익이나 챙기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영적 장애인들이었다. 


유대의 율법으로는 앞 못 보는 이들이나 다리 저는 이들은 성전 안에 들어 갈 수 없었다. 그런 저들을 고쳐 주신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는 저들을 위해서 오신 구주(救主)이시다. 예수는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아니,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된 인간의 영혼육을 온전히 회복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병원은 환자들이 찾는 곳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를 만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병들어 보아라. 안타깝게 해당 분야의 전문의를 만나고 명의를 만나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돈의 팔촌을 통해서라도 좋은 종합병원의 유명한 의사에게 진찰받고 싶어한다.


예수는 의원 중에 의원이시다. 내 몸과 마음이 심하게 병들고 나면 내 병 고쳐 줄 유능한 의사를 찾고 또 찾으려고 한다. 예수가 그런 분이시다.


2006-2015년에 SBS TV 교양 프로그램 중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요즘 채널 A TV의 “금쪽 같은 내 새끼”도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다. 그 프로그램을 이끄는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인 오은영(1966-) 박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소아와 청소년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한 정신과 전문의이다. 그는 예수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팔삭둥이로 33주만에 1.9kg의 작은 몸으로 태어났다. 병치례도 많이 했다. 편식도 심했다. 깡 마르고 약하고 부족하였다. 그런 그를 엄마 아빠는 끔찍이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 주었다. 약하였지만 자존감이 강한 아이로 자라났다. 오늘날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지난날의 연약함을 뒤로 하고 주변의 수많은 가정의 엄마 아빠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마음을 알아주고 읽어 주고 힘이 되어 주는 만능처럼 보이는 명의로 소문이 나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어머니 아버지의 은혜라고 말한다.”그 자신도 13년 전인 2008년에, 42살 때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남편과 어린 아들을 걱정하던 평범한 가정의 아내요 엄마였다. 우리 몸의 건강을 누가 지킬 수 있나. 의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건강을 장담할 수 있나. 아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를 약한 자리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강건케 지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 세상에 병이 없이 무쇠처럼 늘 튼튼하게만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누구나 다 부족하고 다 연약한 데가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고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라는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병 고침 받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간구한다. 


바른 믿음에 대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유일하게 부정적인 기적이 바로 이것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죽었다. 제자들이 그 현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예수께 여쭈었다. “무화과 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신 교훈이 이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1-22)


기도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믿음의 말이 기도이다.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아들이 말하면 아버지가 듣는 것처럼 말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 혹은 생선을 달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맛있는 떡을 주고 신선한 생선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 이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 지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는 허무맹랑한 기도 같아 보인가.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그런 기도를 계속해 온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그렇지 않나. 구하면 주신다. 찾으면 찾게 된다. 문을 두드리면 열리게 된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If you believe, you will receive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며칠 후에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메튜 헨리라는 성경주석가는 이런 말을 하였다.


“촛불 앞에 감사하면 별빛을 주신다. 별빛 앞에 감사하면 달빛을 주신다. 달빛 앞에 감사하면 햇빛을 주신다.”


맞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깨달아 감사하며 깨닫고 기도하면 자녀의 권세도 주시고 죄 사함의 기쁨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영생도 선물해 주신다.  


주인 없이 살아가는 유기견들이 있다. 교회 뒤 북한산 자락에도 유기견들이 돌아 다닌다. 요즘은 행정 당국에서 해결해서 많이 조용해졌다. 한 때는 밤 중에 산이 떠나가라고 짖어대고 으르렁 대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해결된 것 같다. 


길 잃고 주인 없이 산 속에 헤매는 유기견의 운명을 생각하여 보라. 우리나라에도 과거에는 호랑이가 있었다. 호랑이 새끼는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모른다. 한번은 새끼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너무 무서워요.”“나는 지나가는 저 작은 개만 만나도 가슴이 두군거려요. 겁이 나요.” “엄마 나 호랑이 맞아요.”“그래 너는 내 새끼란다.”며칠 후에 호랑이 새끼가 또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다. “엄마 나 호랑이 맞아요.”하루가 멀다하고 새끼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에게 묻고 또 묻는 거였다. “엄마 나 진짜 호랑이 맞아요.” 하도 짜증이 날 정도로 새끼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에게 묻고 또 묻는 거였다. 그 때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난 엄마 호랑이가 “그래 맞다니까 이 개 같은 XX야. 너는 개 XX가 아니고 내 새끼라고. 호랑이 새끼가 맞다고”하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여러분 어떤가. 지금 나는 마귀의 새끼가 아니라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딸이다. 하나님이 나의 생각을 아시고, 장래를 아시고, 범사를 아신다. 하나님은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이 교훈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If you believe, you will receive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사순절은 기도하는 때이다. “무엇을 기도하여야 하나.”나는 기도하지 않아도 다 잘 지내는데 뭘 자꾸 기도하라고 하나. 그러면 기도원에 올라가서 매끼니 잘 먹고 잠을 쿨쿨 자다가 내려가는 목사처럼 하나님의 집에 와서 먹고 잠이라도 실컷 자라. 이것이 주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게 믿음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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