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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36-46) 202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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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2-17 21:41 조회 8,387 댓글 0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26:36-46)        2021. 2. 14


이번 주 수요일이 사순절(四旬節)의 시작인 성회(聖灰) 수요일이다. 신앙의 선조들은 이 날, 이마에 재를 바르며 기도하는 기도의 전통을 이어 왔다. 간절한 회개의 심정을 그렇게 표현해 온 것이다. 이 날부터 시작하여 부활절 전날까지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한다. 사순절을 영어로 ‘LENT’ 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봄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는 사순절에 40일을 채워가며 새벽마다 기도하는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코로나 보건 수칙을 잘 지키며  가능하면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는 기도 생활의 회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사순절의 세 화두는 참회(懺悔), 금식(禁食), 절제(節制)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음식을 잡수시다가 말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셨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다. 그리고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교훈해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말씀하셨다.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기도하셨다. 그 밤에 예수의 심정은 매우 고민스러웠고 죽을 지경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그리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제자들은 졸며 잠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여 드리고 또 드리셨다. 성경에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는 표현은 강조이다. 어찌 세 번만 기도하셨겠는가. 밤새도록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신 것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깊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는 독백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일어나서 어디로 함께 가자는 초청이실까. 함께 가서 무슨 일을 하자는 권면이실까. 함께 가서 그 어떤 일을 성취하자는 제안이실까.


고난(苦難)을 넘어 영광(榮光)스러운 자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한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成肉身)하셔야 했는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고 영생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 주신 구세주이시다. 우리는 그를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의 수난(受難)이라고 한다. ‘수난’(受難)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맞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의 처절한 고난을 다 당하셨다. 마태복음 26장 67절에 보면,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예수를 끌고 간 무리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 현장에서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한 여종으로부터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나중에는 맹세하며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하였다. 그 시간에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던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 새벽에 모든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 결국은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 그 때에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돈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대 제사장은 그 은 삼십량은 성전고에 넣기에 합당하지 못한 핏값이라고 여겼다. 의논한 후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들여서 나그네의 묘소를 삼기로 하였다. 그 후로 그 밭을 피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태복음 27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군병들은 예수를 끌고 관정 안으로 들어갔다. 예수의 옷을 벗겼다. 홍포를 갈아 입혔다. 가시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웠다. 갈대를 예수의 오른손에 들게 하였다.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였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로마의 병정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갈대를 빼앗아서 그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쳤다. 한참 동안 예수를 희롱하던 로마의 병정들은 다시 예수의 홍포를 벗겨냈다. 다시 예수의 원래 옷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끌고 나갔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이른 아침 시간에 있었던 그 수난의 장면을 묵상하고 다시 묵상하고는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서 이처럼 부끄러움과 온갖 고난을 다 당하셔야만 했는가.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고난 너머에 영광이 찾아오는 것이다. 고통 뒤에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해산의 수고에 비교하였다.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보고 엄마가 되어 본 이들은 안다. 해산의 수고가 무엇인지를. 그러나 해산의 수고와 고통은 아들딸의 생명을 낳아 양육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하여 잊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다. 이것이 고난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삶의 신비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 할 수 있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천군 천사를 동원하셔서 이 땅이 악한 세력들을 섬멸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면 되지 어떻게 사랑하시는 외아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시도록 침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좌우편에 강도가 같이 메어 달렸다. 좌편 강도가 예수를 조롱하고 비방하였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나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

우리는 아무리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여도 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의 장면들이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수치와 고난을 극심하게 다 당하시도록 왜 하나님은 그 현장을 외면하시고 침묵하셨는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오늘 날도 침묵하고 계신다. 

분명한 사실은 고난이 없는 영광이란 없다.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의 신앙의 길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 나만의 십자가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찬송하지 않나.

 “네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339장, 내 주님 지신 십자가)

십자가 없는 면류관이란 없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영광의 면류관의 가치도 알게 되는 법이다. (KNOW CROSS KNOW CROWN)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공부하는 일, 연구하는 일, 장사하고 사업하는 일, 직장에서 주어진 업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기 위해서 밤을 지새운다. 운동, 악기연주, 노래, 미술, 건축, 소설 쓰는 작가의 일상도 그렇다. 피아노나 오르간 혹은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하는 이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연주에 매어 달린다. 어떻게 하다가 피카소가 된 것이 아니다. 미술에 일가견이 있던 피카소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 년 내내 비둘기 발만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일 년이 지난 후에 보니 비둘기 발의 모양이 50가지가 넘더란다. 조금씩 다 다른 것이다. 스포츠도 그렇지 않나. 축구, 야구, 골프, 피겨 스케이팅, 양궁, 씨름, 태권도, 유도, 사격, 조정, 승마 등등 모든 종목이 다 그러하다. 어느 분야에 선 이들의 나중 영광이 아름답지만 그 길을 거기까지 가도록 긴긴 고난의 여정을 건너 뛴 이들이란 없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안일과 평안과 번영만을 구하지 말고 고난 뒤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성도의 삶을 가꾸어 가야만 할 것이다. 

로마 바티칸의 대성당 시스티나 예배당은 1475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의 주문으로 착공하여 8년 동안 건축되었다. ‘시스티나’라는 말은 이 성당을 건축한 식스투스 4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시스티나 예배당은 추기경 회의를 하는 곳으로 교황을 뽑기도 하며 피신처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바치오 폰텔리가 설계를 했고 조반니 데 돌치가 건축했다. 예배당은 길이가 40.23m, 폭은 13.40m, 그리고 높이는 20.70m로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크기다. 그 곳의 천장화인 프레스코 화법의 <천지 창조>와 벽화인 <최후의 심판>를 보기 위해서 세계의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천지 창조>는 33살에 시작해서 4년 여간에 완성하였다. <최후의 심판>은 25년 세월이 흐른 후에 환갑 즈음에 그린 작품이다. 

그 작품의 주인공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는 누구인가. 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작업장을 드나들며 돌이 어떤 형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즐겨 보곤 했다. 가난한 마을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에 열중하여 집안을 일으킬 고급 관리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아들이 미술에 눈을 뜨자 크게 분노하였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난 아들을 매질을 해가며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손을 이끌고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알려진 화가이자 금세공업자였던 기를란다요의 공방으로 찾아갔다. 일년 여만에 스승을 능가하는 조각가요 화가로 주목 받게 되었다. 그가 25살에 완성한 작품이 ‘피에타’이다. 우리가 아는 모세상, 다윗 상도 미켈란젤로 작품이다. 원래 조각가로 출발한 그는 수 많은 그림들을 역사 속에 남겼다. 

프레스코화는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그린 그림이다. 회반죽은 수산화칼슘 성분이 있는 석회암을 가루로 만든 뒤 1,300℃ 정도로 구운 다음 물을 넣어 만든다. 회반죽이 굳어 버리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한번 그리면 수정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기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회반죽이 마르는 과정에서 물과 함께 나오는 칼슘과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결합해 매우 단단한 탄산칼슘 막이 생긴다. 이 막이 회반죽 위에 그린 그림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몇백 년이 지나도 그림이 변하지 않고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선이 분명하고 동작이 화려하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인체 해부학과 투시 원근법을 작품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타고난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풍부한 해부학 지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해부학을 그림에 활용해 인체의 비례와 혈관의 생김새와 위치뿐만 아니라 근육의 움직임 등 인체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또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고 넓게 그리고 멀리 있는 사물은 작고 좁게 그리는 투시 원근법을 활용해 입체감을 높였다. 그 모든 것이 노력과 수고와 고난의 연속 끝에 주어진 작품의 영광이다. 

화가는 작품으로, 연주자는 연주로, 성악가는 노래로, 소설가는 남긴 소설로 말한다. 운동선수는 신기록으로 자신을 알린다. 예수는 한 몸에 짊어지신 육체의 고난 즉 당하신 수난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주님이시다. 미켈란젤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혼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작품으로 남김으로 복음으로 영원히 복음 되게 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5:7-9)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넘어 부활(復活)의 자리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고 예수의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 처형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흉악범이나 극악범을 처형할 때 쓰던 사형법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죄 없으신 예수,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들의 손에 끌려가서 처형 당하셨다. 본디오 빌라도는 명령하였다. 로마의 병정들로 하여금 예수의 시체를 장례한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묘실 문을 큰 돌로 막고 인봉하였다. 병정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 하셨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부활의 종교이다. 이 땅에 부활 종교는 기독교 뿐이다. 

우리나라에 이슬람 세력이 점점 강해진다고 한다. 처처에 저들이 예배처로 모이는 모스크가 세워진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번져 가고 있다. 자녀를 많이 낳는 이슬람의 수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늘어 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반하는 종교다. 저들은 코란 즉 꾸란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죽이라고 가르친다. 무섭기까지 하다. 개인으로 만나면 사랑과 자선과 박애를 교훈 받아 친절한 것 같지만 저들이 어리석게 받아 들이고 믿는 ‘지하드’(Jihad) 신앙은 섬찟하기까지 하다. 아랍 말로 ‘지하드’는 ‘고투, 분투’라는 전쟁 용어이다. 성전(聖戰) 즉 ‘거룩한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알라를 위하여 충성하다가 순교하면 

순교하는 순간에 죄 사함을 받는다.
지옥의 징계를 면제받고 천국으로 간다.
더 큰 테러로부터 보호받게 된다.
좋은 홍옥 왕관을 머리에 쓰게 된다.
72명의 천국 처녀들과 결혼하게 된다.
70명의 친척들의 영혼을 위한 중보자가 된다.

는 식으로 가르친다. 어디 이게 말이 되나. 그런데 이런 주장에 10억 명 이상이 빠져 든다. 이것이 종교의 함정이다. 이런 해괴한 가르침을 받아 들인 이슬람의 젊은이들이 IS의 전사가 되려고 줄을 선다. 

왜 예수인가. 왜 십자가인가. 왜 예수 부활의 소식이 ‘참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福音)이어야 하는가.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다시 사신 예수, 부활 승천하신 예수가 우리 신앙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고 하였다.  

  
영생(永生)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생은 칠십이다. 강건하면 팔십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1-4)

천국도 실재하고 지옥도 실재한다. 교도소에 가 보면 감옥을 실감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죽으셨다. 그것도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부활이란 무엇이고 영생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고 장례를 마친 후에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해 주신 말씀이시다. 

당신은 어떤가. 누구에게나 찾아 오는 죽음과 슬픔 앞에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영광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영생의 천국 복음이 믿어지는 신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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