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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命者의 가는 길Ⅱ(렘45:1-5) 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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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10-11 23:06 조회 8,109 댓글 0
 
                      使命者의 가는 길Ⅱ(렘45:1-5)         2020. 10. 11


종교 개혁자 장 칼뱅 “인간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한 거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직업소명설이라고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다. 직업은 높고 낮음도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곁에서 받아 기록한 서기관의 이름이 바룩이다. 그는 철저히 선지자 예레미야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대필자였다.

로마서도 사도 바울이 직접 자기 손으로 쓴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고 그 곁에서 그 말한 내용을 꼼꼼하게 받아 적는 데필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더디오’이다. 로마서 16장 22절에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하였다.

요즘이야 작고 성능 좋은 녹음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과거에는 말을 문자로 기록해 남기는 일은 대단히 소중한 역할이었다. 가령 조선시대의 역사 기록인 <조선실록>은 역대 조선 왕들의 일과를 기록한 세계 문화 유산이다. 누군가가 직임을 받아 그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기에 후대에 그런 역사적인 기록물들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에 김홍도 같은 화백이 있었기에 그 당시의 생활풍습이나 왕궁 문화를 생생하게 그림을 통해서 고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령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서 아버지 사도 세자와 동갑이었던 어머니의 첫 사도 세자 묘 참배를 위해 계획한 지금의 수원인 화성 나들이는 팔일 간 이어졌다. 그 팔일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지내야 했던 8일을 기념한 날짜라고 한다. 그 행차에 동원된 인원이 6,000명이었다. 말이 1,481필이었다. 행차 비용이 오늘 날 화폐 가치로 하면 70억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탔던 가마의 비용이 2억원이었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 배 36척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판을 깔아서 다리를 건설하였다. 오늘 날 한강철교가 놓인 그 자리이다. 화가 김홍도는 화가 김득신 등을 동원해서 무려 46미터 길이의 그림에 그 행차 행렬을 사진 찍듯이 소상하게 그려 넣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원본이 <화성능행반차도>라는 이름으로 보관되어 있다. 

국회나 재판정에는 대화를 빠르게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속기사들이 있다. 그들의 역할이 소중한 것이다. 이처럼 직업이니 역할에는 귀천이 없다. 분업화되어 있는 각 사람의 역할에 의해서 합력해 선을 이루는 것이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선지자 예레미야 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기록자였다. 서기관이었다. 그에게도 예레미야 버금가는 고통과 고민과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행동과 출입을 함께 해야 했던 바룩은 예레미야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요 예레미야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이었다. 

그래서는 바룩에게도 고통과 슬픔과 마음의 탄식과 육신의 피곤이 극심하였다. 5절로 되어 있는 예레미야 45장 전체는 그러한 말씀의 대필자였던 바룩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1절은 시대적인 역사를 기록한다. 여호야김 왕 넷째 해란 주전 605년이다. 바벨론의 제 1차 침공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기록한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가 말하고 그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한 예레미야 36장을 기록하던 때를 말한다.  

그 당시에 성전의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성전 출입을 제한하였다. 그 때에 바룩이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역할을 감당하면서 장차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예언과 자신에게도 닥칠 고난을 생각하며 비탄에 빠져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바룩을 격려하고 위로하신 내용이 예레미야 45장 전체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은 누구나 다 사명자이다. 예레미야만 사명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필하던 기록자인 바룩도 사명자이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사회의 곳곳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각 사람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부와 기대와 섭리를 깨닫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다 사명자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저 지난 주에 이어서‘사명자의 가는 길’이라고 정한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인간의 생사화복과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사람이 노력하고 수고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 운운”하면 “그런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주 삼라 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있다. 인간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이 있다.

가령 아브라함이 나이 75세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그런 생의 변화가 그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동족들에게는 받아 들여 질 수 없는 사건이다.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 12장부터 그 내용을 아는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그들 부부의 생을 통하여 이루어 가셨다. 그 절대 주권의 약속은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을 통하여 이어져 갔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대하는 중에 예레미야 45장 4절에 나오는 이 내용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대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표현하시는 말씀이다. 

보라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세우기도 하시고 헐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심기도 하시고 뽑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틴 루터가 가사를 쓰고 친히 곡을 붙인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가 그러하지 않나.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고 그 다스리심 앞에 나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가 주인 삼은>이란 제목의 찬양을 부르지 않나.

“내가 주인삼은 모든것 내려 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 내려 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삼은 모든것 내려 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 내려 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

생각하여 보라. 가사가 쉽고 찬양 따라 부르기가 쉽지. 내가 내 것을 그렇게 쉽게 내려 놓고 살 수 있나. 내가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주님을 나의 주인 삼고 살아가는 일이 그리 쉬운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에 묵상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신앙이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가.
내 건강의 주인이 누구인가.
내 가족, 내 자녀의 주인이 누구인가.
내 소유, 내 재물, 내 가진 것의 주인이 누구인가.
내가 쌓아 온 학력, 경력, 이력의 주인이 누구인가.

최근에 아기를 자연 분만하려고 제왕절개를 미루고 참고 견디다가 아기 목숨은 구했는데 산모가 목숨을 잃은 가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타깝지 않나. 그런데 요셉의 동생 베냐민이 그렇게 태어나 자라났다. 요셉의 엄마인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베들레헴 길가에서 난산하고 목숨을 잃었다.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라헬은 남편 야곱이 끔찍이 사랑하고 위하던 아내였다. 슬픔 중에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베들레헴 길가에 장사하고 묘비를 세웠다.

야곱으로 하면 그런 슬픔을 겪기 전에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더 이상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풍성한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창35:11-12)

이런 거창한 축복의 말씀을 받은 그 자리에 돌 기둥을 세우고 전제를 붓고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기와 말씀하시던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였다. 이런 은혜로운 체험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는 슬픔을 겪게 되었다. 야곱은 아내 라헬을 장례 한 후에 갓 태어난 불쌍한 베냐민에게 젖 줄 유모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  얼마 후에는 다시 새 길을 가던 중에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치고 머물렀다. 야곱이 그 땅에 거할 때에 큰 아들 루우벤이 야곱의 첩인 빌하와 동침한 패륜한 사건 소식도 접해야 했다. 또 얼마 후에는 아버지 이삭이 돌아 가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야곱은 헤어져 살던 형 에서와 만나서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치루었다.

야곱이 경험한 이 모든 일상이 무엇을 말하는가. 기쁨과 슬픔과 가슴 아픈 일들과 분하고 화나는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 오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이 모든 일들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표현 말고 달리 설명할 단어가 있는가. 올 한해도 남아 있는 하루 하루, 한 주간 한 주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출입하는 범사가 되기를 축원한다. 


평범한 일상의 복.
5절의 ‘큰일’이란 ‘게돌로트’는 분수에 지나친 욕망을 뜻한다. 성경은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바룩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고 책망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바룩인 어떤 허망하고 대단한 야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이 바룩을 책망하신 내용이 이것이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찾지 말라”

맞다. 
공부할 때 학생은 학생의 길을 가야 한다. 
군인은 평생 군인의 길을 가야 한다. 군인이 군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탈선이다. 군인이 군복 벗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다 보니 그 나중이 불행해 지는 것 아닌가.
학자는 학자의 길을 가야 한다.
세무 공무원은 세무 공무원 다운 길을 가야 한다.
소방 공무원은 소방 공무원 다운 길을 가야 한다.
울산33층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진압 현장에서 철수한 젊은 소방대원의 모습이 인터넷 뉴스에 실렸다. 이런 모습은 법을 잘 알면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려 시인하려 하지 않고 파렴치하게 거짓말로 일관하는 장관보다 열 배, 백배 더 존경스럽지 않나. 
세상에는 아버지의 가야 하는 길이 있고 어머니의 가야할 길이 있다. 
남편의 가는 길이 있고 아내의 가는 길이 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남자가 여자의 길을 가려 하고 여자가 남자의 길을 가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무엇인가.
요즘 학생들은 삼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강, 낙동강, 영산강”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고 하지 않나.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고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꿈에 사로잡히거나 지나친 욕망에 사로잡혀서 물불 가리지 않고 목표만 향해 달려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일본 개화기에 일본 북해도 농과대학에서 서양 선진 농학과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던 교수 윌리엄 클락은 “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Boys be Embitious.)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나중에 허름한 여인숙에서 초라한 나날을 지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생살이가 그러하지 않나. 1등도 좋고 명문대학도 좋고, 의대, 법대 다 좋다. 그러나 그것만 목표 삼고 산다면 인생이 얼마나 척박해지겠는가. 요즘처럼 법을 공보하고 사법고시 합격하고 법조인의 길을 평생 걸어 온 이들이 나라를 오히려 이 모양으로 엉망진창되게 하고 있지 않나.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고 나무랐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다. 분수를 지켰다. 방주 건설을 평생 사명으로 알았다.

요셉은 형들에게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렸다. 어느 날 갑자기 요셉이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요셉은 그 전부터 믿던 하나님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 할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들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다. 요셉은 그 어느 노예들과 달랐다. 요셉은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냈다. 그 어떤 시련도 견뎌 냈다. 그 어떤 유혹도 지혜롭게 피했다. 그 결과는 오히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 안에서도 실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요셉의 모습은 감옥을 지키는 간수장도 알아 볼 정도였다. 요셉은 감옥 안에서도 성실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나중에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해석자의 자리로 불러 내셨다. 요셉은 일 순간에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다. 그래도 요셉은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요셉의 지혜로운 칠년 풍년 관리는 뒤 이어 찾아 온 애굽의 칠년 흉년을 극복하는 역량있는 총리의 자리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사랑하셨다.

바룩처럼 허망한 큰 꿈에 사로 잡혀 날뛰면 하나님이 아시고 책망하신다. 5절에 하나님은 바룩에게 분명하게 책망하셨다. 바룩아 네가 큰 일을 찾지 말라. 헛된 욕망에 사로 잡혀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네 발로 걷어 차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분복(分福)이란 말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자신이 누리며 살만한 분복을 나누어 주셨다. 그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상대적으로 남만 부러워하고 탐심을 갖고 지나친 경쟁심을 갖는 것은 불행과 화의 시작이다. 

전도서 5장 12절에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재물만 쫓는 자들은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전5:17)고 했다. 현대인의 번역 성경에 보면“나는 하나님이 주신 짧은 일생을 사는 동안 먹고 마시며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며 이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알았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부와 재물을 주셔서 그것을 누리게 하시며 복을 받아 자기가 수고한 것을 즐길 수 있게 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쁨을 채워 주셨으므로 그는 인생이 짧다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전5:18-20)라고 교훈하였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전도서 5장 20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삼청동을 아시는 분들은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라는 단팥죽 집을 알 것이다. 그 주인 김은숙 여사는 올해 81세다. 1976년부터 44년을 그 자리의 좁은 공간에서 단팥죽을 끓여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12억을 남에게 좋은 일읋 하며 살았다. 남편과 주택 부금 부어 마련해서 살다가 남편이 먼저 남겨 놓고 떠난 아파트도 처분해서 9억을 고스란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딸이 조현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그 딸이 이젠 60살을 넘었다. 평생 짐으로 여기며 살지만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대할 때에 남의 일 같이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2억원은 딸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니는 은평 병원에 지정 기탁하였다. “형편이 어려워 제때에 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나누어 써 달라고 기탁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고 불행의 늪에 빠지지 말고 하루 하루 주님 안에서 감사하며 행복하게, 즐겁게,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자.


생명 보전의 약속.
그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바벨론에 포로 신세로 끌려 갔다. 유다 땅에 남은 자들의 운명도 풍전등화와 같다. 언제 내 목숨이 달아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대적자가 우굴대던 환경에서의 예레미야의 하루 하루를 곁에서 지켜 보던 말씀의 대필자 바룩의 마음이 평안할 리가 없다. 자신도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신세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바룩을 지정하셔서 말씀하셨다. 바룩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다. 

과거에 많은 이들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생명의 숭고한 가치를 교훈하지 않는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내 생명이 귀하듯이 남의 생명도 귀한 것이다. 내 목숨이 아깝듯이 남의 목숨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바룩에게 격려하고 소망을 주고 계시다. 바룩의 생명을 마치도 노략물을 주듯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레미야서에서 이미 앞 부분에 3번이나 이런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셨다. 그렇다. 새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저절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려 가는 그 배후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다. 

사고와 사건이 많은 세상에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침착하게 서두르지 말며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가꾸어 가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살자. 하나님은 택한 자녀의 범사에 섬세한 손길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나날, 감사하는 나날, 기쁨과 즐거움으로 슬픔과 낙담과 우울과 절망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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