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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도자의 권면(롬1:1-8)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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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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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8 22:34 조회 8,873 댓글 0
 
                     어느 전도자의 권면(롬1:1-8)            2020. 8. 23
    

요즘 날마다의 묵상 분량으로 대하는 로마서 말씀 중에서 지난 목요일 분량으로 묵상한 로마서 12장의 내용을 오늘 이 시간에 다시 묵상하려고 한다. 로마서는 16장 분량이다. 그 중에서 앞서 대한 11장 까지의 내용은,

구원이란 무엇인가.
죄인된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는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인 헬라인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이런 다양한 주제의 말씀들을 묵상하였다. 대개 로마서를 구분할 때에 11장까지를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하는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12장 이후의 분량에서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어느 전도자의 권면’이라고 정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로마서를 쓴 분은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로마서 12장의 앞 부분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이 표현은 읽기만 하여도 사도 바울의 간절함과 사랑과 진심이 절절이 느껴지게 한다. 사도 바울은 고압적인 자세와 입장을 가지고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형제들아’라는 표현은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다. 진심을 담아서 표현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11장 분량의 방대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소상하게 증거한 사도 바울이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표현으로 편지의 내용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형제로 대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과 오늘날 로마서를 대하는 이 땅의 모든 성도들에게 무엇을 권면하길 원한 것일까. 여기서 ‘권하노니’라는 권면의 의미는 명령과 간청과 사도적 권위를 가진 호소의 의미를 골고루 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여기서 시작해서 마지막 장인 16장까지 한결같이 이어진다. 그러면 이방의 전도자였던 사도 바울을 통한 권면의 내용이 무엇인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몸.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이 무엇인가. 여기서 ‘몸’은 ‘정신’ 혹은 ‘영혼’과 구분하는 의미에서의 ‘몸’이 아니다. 이기서 ‘몸’이란 곧 ‘전인격’을 의미한다. 곧 나 자신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각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서 ‘몸’이라고 한 것이다. 예배 즉 제사에는 제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제물로서의 나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이다.  그것이야 말로 성도들이 드릴 ‘영적 예배’라는 권면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영적’이란 말은 앞서 대한 ‘몸’이 전인격을 의미하듯이 영혼육이 하나가 된 합당한 예배자의 태도를 강조한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레위기를 대하다 보면 하나님은 제사에 대하여 얼마나 자세하게 교훈해 주셨나 모른다. 그러면 왜 그렇게 소상하게 제사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일까. 제물의 종류, 제물의 건강 상태, 제사의 방법, 제사의 의미 등등을 꼼꼼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제사와 제물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구약 제사에 보면 이미 죽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끌어다가 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는 양들 중에서 구별된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가져다가 제물로 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태도가 그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각 사람이 전인격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거룩한 제물 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산 제물로서 죽음 앞에 결단하는 드려질 수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까지 데리고 가서 삼일 길을 간 후에 번제단에 제물로 결박하여 드리던 사건이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산 제사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한 이유는 그 당시에 로마를 비롯하여 유대인이 아닌 이교들의 종교의식에는 몸을 자학한다든지 혹은 몸을 부정하고 음란한 데 방치하여 타락되게 살던 이들이 많던 때에 그러한 생활 태도를 목격하고 염두에 두고 한 권면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나.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낮과 밤, 날마다 시간마다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예수는“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의 삶 전체를 산 제물로서의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다.  

우리 각 사람이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마다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나 죽음 당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자의 삶을 가꾸어 가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생활.
성도된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하였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다.
변화를 받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였다.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가.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인가를 끊임 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가는 분별력 있는 신앙생활을 계속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신앙생활 하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어렸던 시절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할 수도 있다. 
6.25 전쟁 중에도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며 지내던 기억이 있는 분이 있을 것이다. 
요즘 교회를 대하는 정부 인사들이나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 유신 정권때나 군사 정권 때보다 더한 것만 같다. 이미 신문이나 라디오, TV를 비롯한 언 라인 인터넷 뉴스들 중의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국민들의 판단과 의식을 몽롱하게 할 정도로 거짓 뉴스로 융단 폭격을 가하고 있다. 언론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순간 그 시대, 그 사회는 정상 궤도를 벗어나서 탈선한 기차의 운명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요즘처럼 진영 논리로 치달으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백성들만 점점 더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여겨 왔다. 아마도 요즘 세상에 세상 정부가 교회를 바라볼 때에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라는 조직과 기독교인이란 존재 자체가 국가 통치에 가장 거치장스러온 존재들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때다하고 뉴스마다 “교회가 그랬다. 교회에서 그랬다. 교인들이 그랬다. 기독교들이 그랬다.”하며 교회 뚜드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AD 64년에 로마는 도시 전체의 삼분의 이가 불타버렸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불투명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당시의 황제였던 네로가 저지른 만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이들은 우연한 사고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원인이 불분명한 가운데 로마는 이미 불타버렸다. 로마에 살고 있던 수 많은 백성들은 목숨을 잃었고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 분노와 원성이 폭발 직전이었다. 그 분노의 화살은 방향은 당연히 네로황제에게로 향했다. 네로가 일부러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화재로 인해서 로마 시가지가 불바다로 번져 가던 그 당시에 네로는 한가하게 하프 연주를 감상하면서 불타는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는 소문까지 더해졌다. 따라서 민심을 극도로 흉용해 있었다. 시민들의 폭동을 두려워한 네로는 당시 궁전의 보석까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민심을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머리를 짜내며 궁리하던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당시 인기 없던 비주류 소수 집단인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 

그의 선택은 유효했다. 백성들의 모든 원성은 기독교인들에게로 향했다. 백성들과 네로 황제의 권력이 하나가 되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은 시작되었다.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화형을 당했다. 목 베임을 당했다. 굶주린 사자의 먹잇감으로 던져지기도 하였다.

사탄의 날카로운 발톱이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 하고 있었다. 이 탄압으로 바울이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임 당했다. 

요즘 코로나19의 감염 위협을 호재처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듯하다. 교회를 길 들이고 기독교인들을 얕잡아 길들여 보려는 정치 세력 앞에 분개하는 목소리가 처처에서 높아지고 있다. 그렇지 않나. 60년 혹은 80, 90년 살아 오신 성도들 중에서 세상 정부가 교회와 성도들을 요즘처럼 함부로 대하는 때를 언제 접해 보았는가. 이 땅의 6만여 곳의 교회가 코로나19의 발원지인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염병으로 휘감고 다니는 염병덩어리인가. 어떻게 교회가 그랬다고, 교인들이 그랬다고 싸잡아서 이처럼 교회를 방망이질 해도 이 땅의 교회들이 이렇게 얌전하고 순순하게 끌려 다니고 있단 말인가.

경찰이 감염되면 전국 경찰서 모두 다 문 닫고 마나. 의사가 감염되면 환자들 다 집으로 돌려 보내고 의사들도 출근하지 않고 병원 문 닫고 마나. 언제부터 교회가 요즘과 같은 취급을 받아도 잠잠하게만 지내나. 주님이 그렇게 정부 시책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귀에 쏙쏙 들리게 말씀해 주셨나.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아라”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이 세대란 ‘이 세상 신' 혹은‘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의 방식가 세상적인 가치 기준 등의 세속적인 시대 정신을 본 받지 말라는 권면이다. 
요즘 갑작스럽게 장례식을 치르거나 결혼식을 준비하는 가정들은 당혹스러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불의하게 죽고 쉬쉬하며 치룬 서울 시장의 죽음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5일장이었다. 시청 앞 광장에까지 분향소를 차려 놓고 2만명이 넘는 조문객을 받았으면서도 평범한 시민들의 조촐한 결혼식에는 50명을 넘지 말라고 목을 조인다. 

지난 봄에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유령>은 누적 관객이 8,600명이었다. 공연장의 객석에 앞뒤로 빼곡하게 앉아서 세 시간씩 관람하였다.  출연배우 2명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저들 배우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채로 세 시간씩 무대에서 객석을 향하여 비말을 쏟아 부었다. 그 주변 인물 181명만 검사하다 말았다. 요즘의 광화문 광복절 집회 참석자 핸드폰 추적 원리로 하면 그 때 공연장 안에 세 시간씩 머물러서 공연을 관람한 8600명 중에서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코로나 확진 검사를 반드시 받게 했어야 균형이 맞는 행정이 아닌가. 

어느 시민이 질병 관리 본부에 자진해서 전화를 걸었다. 광복절 날 어린 아들딸의 손잡고 경복궁 관람하고 걸어서 수 많은 태극기를 든 인파를 헤치고 교보 문고에 들러서 책 사고, 학용품 산 시민이었다. “찜찜한데 코로나19확진 검사를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태극기 집회 참석자가 아니면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태극기 들고 나서서 세종대왕 동상 주변이나 시청 곁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곁에서 함성 지른 시민들은 핸드폰 추적으로 일일이 수 만명을 전화로 추적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 검사를 반드시 받으라고 종용 당하고 있다.

이런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로마서를 쓰던 사도 바울 당시에도 있었다.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니,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5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24:4-10) 라고 예언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라. 이 세대의 간교한 거짓, 불의, 음모, 술수, 술책, 악의적인 음모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 대신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분명하게 권면하였다.


한 몸의 많은 지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 공동체이다. 몸이란 각기 다른 기능의 연합이다. 이처럼 성도들은 각기 다른 기능을 은사로 받은 지체의 연합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따라 은사를 주셨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과 고린도 전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에 각양 은사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본문에는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의 은사”등 일곱가지 은사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예언 즉 기록된 신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태도는 믿음의 분수대로 하여야 한다.

자신에게 질문하여 보라. 그리고 자신의 은사를 구분하라. 그리고 그 은사를 십분 활용하라.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사의 활용을 통해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이 어수선한 세상에서 세상을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은사를 따라 가족과 성도를 대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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