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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네가 누구냐(요8:21-30) 20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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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2-07 17:50 조회 10,115 댓글 0
 
                       네가 누구냐(요8:21-30)                2020. 2. 2


예수 당시에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 젖어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의 완성인 윤리적인 내용이나 도덕적인 생활의 가르침도 많이 말씀하셨다. 각종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셨다. 귀신을 내쫓아 다시르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고 배 고픈 무리들에게 배 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도 베풀어 주셨다.

예수로 인해 고침 받은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치유의 주님”이시다.
배고팠던 무리가 먹고 배 부른 후에 예수는 “공급하시는 예수”이시다.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신 이후에 아들과 단 둘이 살던 과부에게 있어서 예수는 “살려 주시는 예수”이시다.
회당장 야이로도 그랬고,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를 대하는 나사로 자신과 그 누이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을 것이다. 
물과 불에 뛰어 들던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시자 귀신 들렸던 아들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있는 아버지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예수는 “귀신이라도 다시리시는 예수”이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기회가 있으실 때마다 인자이신 자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아들이신 것을 틈틈이 설명해 주시고는 하였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으려는 점이었다. 믿질 못했다. 거부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수군거리기도 하고 쟁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7장 50절에 보면 그러는 중에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두둔하는 한 마디를 말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예수께 대한 오해는 점점 더 쌓여만 갔다. 8장 3절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8장 13절의 “바리새인들”이 예수 곁을 떠나가고 유대인들 중에서 평범한 무리들이 예수 곁에 머물면서 예수의 교훈과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22절에 보면 그들중에는 “예수가 자결하려는가”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예수께 대하여 많은 오해를 계속하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평소에 이런 말씀들을 계속하셨다.
 
때가 되면 내가 갈 것이다. 
나를 찾다가 나를 못 찾으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에서 났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너희가 찾는 그이가 나인 줄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 때 무리들의 반응은 “네게 누구냐”하는데까지 이르렀다. “네가 누구냐”는 질문은 “예수가 누구냐”,“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 “우리를 죄와 악에서 건질 자가 누구냐”고 묻는 이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이다. 가능하면 ‘적적적 ’하는 표현을 삼가야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그랬다.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다.”
“나는 그에게서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몇 마디 말씀을 더 해 주셨다. <현대인의번역>성경으로 28절과 29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다.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이런 내용의 교훈까지를 말씀하시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여러분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있나. 자신에게 물어보자. “과연 내가 알고 믿는 예수는 나에게 있어서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네가 누구냐” 이런 질문의 앞뒤를 골고루 묵상해 보면 예수께서 친히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분명한 내용들을 깨달을 수가 있다.


죄를 다스릴 자.
21절과 2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거취와 죄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탄절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탄절기나 대강절기 때마다 예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연이어 묵상하고 또 하고는 한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다시 대하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해 준 말이다. 이 말씀 속에 예수가 누구신지,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함축적인 내용이 잘 담겨 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자기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예수께서 지금 그의 곁을 떠나가 버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뒤에 남아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교훈하신 말씀 중의 일부가 오늘 본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성전에서 만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시다. 

8장의 시작은 감람산에서 내려 오신 예수께서 아침에 성전에 다시 들어가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간음 현장에서 잡혀 끌려 나온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하고 예수를 시험하려고 달려 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땅에 글씨를 쓰시던 예수의 장면을 대하게 된다. 이미 이 즈음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어려움에 빠지게 해서 어떤 누명을 씌워서라고 죽여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 후에 이어진 교훈의 말씀이 오늘 대하는 본문이다.  8장이 끝나는 마지막 절인 50절에 보시면 예수를 돌을 들어 치려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숨어서 성전 밖으로 피신하셨다.

예수는 “네가 누구냐”고 질문하고 “사마리아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귀신이 들렸다”(요8:48)고 공박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끊임없이 죄의 문제를 다루고 계시다. 21절과 24절을 <현대인의 번역>성경으로 읽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떠나간다.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올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너희가 정말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인간은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는 것이 아니다.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고 하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하였다.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할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왕도 죽고 기업가도 죽고 사성장군도 죽고 학문을 통섭한 대학자라도 죽는다. 젊어도 죽고 아름다워도 죽고 씩씩해도 죽고 건강해도 죽는다. 사람은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교훈이다.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면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일까. 죽음의 반대는 생명이다. 죽음을 이기려면 생명을 얻어야 한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을 이긴 것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히 죽음을 이긴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런 선언을 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린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이란 436장 찬송을 부르지 않나.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이 찬송가는 대전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나중에 학장을 지낸 이호운 목사의 찬송시에 박태준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말 찬송이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유대 백성들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죄 사함과 사망을 이기는 영생의 가르침이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값지고 영원한 영생의 선물이 되기를 축원한다. 

위에서 난 자.
예수의 가르침을 못 알아 듣고 예수가 자결하려는가 하고 오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또 하나의 교훈은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라는 말씀이시다. 위에서 났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렇다. 이 세상의 그 모든 인생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났다. 땅에서 났고 육체로 났고 아래서 난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위에서 나신 독생자이시다. 물론 그도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나신 것이 맞다. 그러나 예수는 그 근본이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 안에 계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2:6)이시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셨다. 에수께서 아브라함과 자신을 비교해서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의 반응이 발끈하였다. 요한복음 8장 57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네가 아직 오십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공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가 깨달아 알고 믿는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상고에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장 31절에서 이미 이렇게 교훈하였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렇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시고 요셉의 무릎에 앉혀져서 자라나셨으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위에서 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위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찬미하였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이런 내용들을 실감나게 거론하였다.
땅에서 난 것은 독한 시기, 다툼, 자랑, 거짓말 등인데 이런 것들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것들은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라고 하였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반대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하였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내 맘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증거와 열매가 무엇인가. 이처럼 위로부터 난 지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더불어 야고보의 강조처럼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나날이 되길 축원한다. 


저 세상에 속한 자.
23절의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인생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반하여 하늘에 속한 자이며 저 세상에 속한 자이심을 선포하시는 장면이다. 맞다. 예수는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이 땅에  잠시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으나 저 세상에 속한 분이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환난 많은 이 세상을 이긴 자로 사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선언해 주셨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사는 이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성도의 찬송은 이 세상 유행가와 다르다. 달라야만 한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양 가사 그대로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천국에서 모두 날 기다리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는 비록 약하나 주 날 지키리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 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
이 기쁜 찬송 하늘에 울려 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요한 계시록 21장 말씀처럼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아픔과 목마름과 온갖 추하도 더러운 악과 죄가 가득한 곳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저 세상은 어떤 곳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저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봐좌 우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며 영생할 나라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되 예수 안에서 저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축복이 풍성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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