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곳에 설 자(시24:1-10) 2021. 7. 11
사무엘하 5장에는 왕이 된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여 이기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니 마치도 물을 흩어 버리듯이 블레셋을 이기게 하셨다. 이기고 또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삼하5:24)고 하셨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르비임 골짜기에 가득한 블레셋의 군대를 정면공격하지 말고 뽕나무 수풀 맞은 편에서 기습공격을 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뽕나무 수풀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날 때에 공격하라”고 명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을 수행하였고 블레셋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범사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형통해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리적이다. 상식적이다. 세상을 역리로 살고 세상을 공의와 진리의 상식에서 벗어나게 살아가는데 잘되는 경우가 있나. 그건 당장은 몰라도 잘 되어 가는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이지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불의한 자는 비 온 후에 풀 베임을 당하듯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쟁에 이긴 다윗은 뽑아낸 군사 삼만 명을 모으고 하나님의 법궤를 되찾아 오게 되었다.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몰았다. 얼마나 기쁘던지 왕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들은 잣나무 악기를 총동원하였다.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우렁차게 연주하였다.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중에 소들이 뛰었다. 이 일을 맡았던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었는데 그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법궤가 흔들리니 만지거나 붙잡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성물은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법궤를 이동할 때에 궤 양편의 네 고리에 두 개의 채를 꿰어 어깨에 메어 옮기라고 하셨다. 그런데 수레에 실어 옮겼으니 처음부터 이동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두려운 마음에 휩싸인 다윗 왕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석 달 동안 여호와께서 오벳에돔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오벳에돔의 집에 내리신 그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이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고 지낸 석 달 동안 하나님이 내려 주신 복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 들은 왕 다윗은 직접 나서서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시어 오기로 하였다. 역대상 15장에 보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레위 사람 여섯 명을 포함한 여덟 사람이 이 일을 전담하였다. 저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갔는데 다윗은 감격하여 제사장들을 앞세우고 소와 살진 송아지를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다윗은 앞장서서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온 백성이 뒤따르며 즐겁게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기뻐하였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크게 기뻐하며 춤을 추던왕 다윗을 업신여긴 다윗의 아내 미갈은 죽을 때까지 복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시편 24편은 그 날의 그 감격과 기쁨을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다. “메시아 예언시”로 구분하는 내용이 시편 24편이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2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3-6절은 “여호와의 법궤를 대하는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7-10절은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어 들일 수 있도록 성소의 문을 활짝 열라는 선포이며 명령이며 찬양이다. 마치 왕이 왕궁에 입성하기 위하여 성문을 활짝 열라는 명령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는 성문을 열 듯이 성막의 문을 활짝 열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여호와의 임재를 환영하고 영접하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자, 그러면 과연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이며 과연 누가 거룩한 곳에 설 자인가. 3절에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산’이란 예루살렘 성이 있는 곳을 말한다. ‘거룩한 곳’이란 여호와의 성막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 들일 곳을 말한다. 사실 ‘거룩한 곳’이란 예루살렘과 같이 지정된 장소라기 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일컫는다.
그러면 과연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일까.
몸과 마음이 청결한 자.
다윗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한다고 하였다. 코로나19바리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각 사람이 손을 늘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 독감환자도 줄고 감기 환자도 줄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행실이 깨끗한 자를 말씀한다.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다. 이 세상에 거룩한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시편 14편 1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편지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그리고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시편 14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이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청결할 뿐만 아니라 그 행실이 깨끗한 자를 찾고 계시다. 욥기 17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서 전해지는 그의 수도 생활의 일화이다. 그가 수도사 생활을 하던 수도원에서 여러 날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 제목은 한결 같았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나의 마음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틴 루터는 수 십 번, 수 백 번 같은 내용의 기도를 계속하여 반복하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마틴 루터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손을 씻는데 실성한 사람처럼 손을 씻고 또 씻고 계속하여 손 씻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료 수도사가 마틴 루터에게 물었다. “아니 자네는 왜 그렇게 손을 씻고 또 씻는가”그 때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던 마틴 루터는“이보게 아무리 깨끗이 씻으려고 하여도 내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가 없구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마음과 행실을 지켜 살기를 원했던 젊은 수도사 마틴 루터였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하여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의 불을 지피도록 하셨다. 그 때의 마틴 루터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의 팔복 설교에서 교훈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세상 탐심을 떠난 ‘거룩한 가난’, 청빈(淸貧)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물욕에 끝이 없는 탐욕을 부리는 중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불의와 거짓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명예에 먹칠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며 양심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세상의 수 많은 권세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의 마음 가짐을 굳게 지켜 나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대로 그래야 그 의로 배부르고 그 의로 목마름이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하지만 강화도 성공회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면 돌비에 새겨 놓은
修己洗心 去惡作善
수기세심 거악작선
이란 한자어를 대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교훈인가. 구한말 선교 초기에 기독교의 복음을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한 교훈을 접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나.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씻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마치도 오늘 시편 24편 4절의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나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라는 말씀을 축약한 교훈이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그 말과 행실에 덕을 세우므로 하나님 앞에서 다윗처럼 “내 마음에 드는 자”라는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는 자.
거룩한 곳에 설 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는 자”라고 하였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과거나 오늘 날이나 사람의 마음을 허탄하게 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돈, 재산, 명예, 인기, 권력, 힘, 외모, 젊음, 학식, 학력, 학위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잘못하면 다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아들딸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너무 잘 나서 남들보다 실력과 능력이 뛰어난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에 사로잡히는 그 것이 허탄한데 마음을 두는 것이다.
요즘 출애굽기를 새벽마다 대하는데 왜 모세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두 돌판을 던져 깨트리게 되었나. 산 꼭대기에서 이미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다. 모세가 산 아래 내려와서 보니 시내산 아래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앞장 세우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제사하며 먹고 마시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모세는 두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던져 깨트린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 두 돌판을 모세더러 다듬어 만들어 가지고 산에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그 두 돌판에 십계명의 말씀을 기록해 주셨다.
그 우상 숭배의 현장을 보신 하나님은 모세만 남겨 두고 모두 다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크게 노하셨다. 그때에 모세가 중보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셔서 저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지난주 내내 날마다 조금씩 묵상한 출애굽기의 내용에 보면 하나님은 성막 건설을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쓰고도 남도록 가져다가 넘쳐나게 쌓았다. 그만 가져오라고 할 정도였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난 증거란 그런 것이다.
탐심에 붙잡히고 우상 숭배에 사로 잡히며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이 인색해진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탐심을 버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생활이 가장 기쁘고 즐겁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런 것을 기독교에서는 “ 은혜 받았다. 은혜가 들어갔다. 은혜를 안다.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나. 사도행전 1-4장의 성령 받은 백성들은 가진 것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쌓아 두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며 더불어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밭을 팔아 바친 바나바였다.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거룩한 곳에 서는 자의 마음 가짐으로 다윗 왕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예배의 시간마다 기쁘고 예배의 시간마다 춤을 추고 싶어진다. 다윗은 그런 인물이었다. 다윗의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 섬김은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고 하셨다. 그렇지 않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도 가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업도 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공언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시려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회복하는 주인공이 되자. 은혜를 받는 매 순간으로 자신을 지켜 가자.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를 찾으신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 마음 속에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온갖 세상 불의를 짝하고 탐욕에 가득차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여기실 리가 없다. 불신앙과 불의의 결과는 패망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디도서 1장 16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하였다.
겉으로는 의로운 척, 선한 척, 착한 척, 양심적인 척, 하나님을 잘 믿는 척하면서 그 마음 속으로는 온갖 추하고 악하고 더러운 생각에 사로 잡혀서 파리가 썩은 생선 위에 날아 앉듯이 살아가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하나님의 거룩 한 곳에 설 자는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세상의 불의와 거짓을 멀리해야 한다. 입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자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이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성도라면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고 불의하고 거짓되게 사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진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를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각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리할 때에 5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게”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 여호와의 문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가. 다윗은“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법궤를 되찾아 오는 것이 영광스럽듯이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고 사망을 이긴 부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 중의 복이다. 강하고 능하신 영광의 왕을 따라서 영원한 나라에 승리하는 백성으로 입성하는 영광을 누리는 주인공이 다 될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