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꾼(고후6:1-10) 2021. 6. 20
베다니 교회 유기은 장로는 94세를 살았다. 과거 구로중앙교회의 여장로였다. 남편 일찍 잃고 아들 셋을 키워 셋 다 감리교 목사가 되게 하였다. 장남강필성 목사는 성북지방 장위교회, 차남 강익성 목사는 은평동지방 성일교회, 삼남 강효성 목사는 종로지방 궁정교회의 담임 목사이다. 어머니가 기도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자신들이 원한다고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차남은 잘 나가던 회계사였다. 그런 그가 형이나 동생처럼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 부르심이 없으면 어떻게 삼형제가 다 목사가 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누구나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 이 세상에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이러 저러한 고난과 환난과 역경을 겪게 된다. 가령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의 선택과 상관이 없이 온 나라의 모든 백성이 전쟁의 참상을 겪어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가 전쟁에 투입되어 생명을 잃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선량한 민간인도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이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일어난 이 땅의 동족 간의 전쟁이 그런 전쟁이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나 사고나 사건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잃거나 상해를 입기도 한다. 쉽게 치료되지 않는 병으로 자신이 목숨을 잃거나 가족을 일찍 앞서 보내기도 한다. 사랑하는 자녀를 앞서 보내고 가슴에 한을 묻고 살아가기도 한다. 아내나 남편이 훌쩍 이 세상을 먼저 떠나기도 한다. 잘 나가던 사업이 망하기도 한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던 직장에서 불명예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기도 한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나는 신앙 안에서 세상을 올곧게 살아 보려고 씨름하지만 세상이 나를 조용하게 살아가도록 내어 버려두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부르심 가운데 각 사람을 향하신 사명과 분부를 깨달으며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사도 바울의 사도 권을 비방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된 사도 바울은 마음이 몹시 상하였다. 고린도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이 출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어지럽히고 그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거부하고 비난하고 비방하는 세력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런 심각한 정황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의 편지를 통해서 자신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사도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고린도후서 5장이다. 5장 20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6장에서 자신이 사도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일꾼임을 분명하게 하는 편지를 계속하고 있다.
4절에, “하나님의 일꾼”이란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일꾼이란 어떤 사람인가. 1절에 보면,
첫째,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다.
둘째,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다.
은혜를 아는 자란 받은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며 받은 구원의 감격을 세상의 죄와 악에 맞서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고저하는 이들이다
셋째,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귀하게 여기며 세상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비난하고 비방할지라도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어느 누구를 만나든지 거리낌이 없이 담대한 믿음을 지켜가는 이가 ‘하나님의 일꾼’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세상을 어떤 태도와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는가.
고난 극복.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으로 살아가려면 그 어떤 고난이라도 넉넉히 이겨 낼 수 있어야 한다. <공동번역성경>으로 고린도후서 6장 4-5절을 읽으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그 동안 겪어온 별의 별 고난을 언급하는 이유는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 자신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극심한 별의 별 고난을 극복해가며 오늘날에 이르렀겠느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다메섹 체험을 갖기 이전의 사울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고 대단한 율법학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부르심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받은 이방 전도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를 이방에 부활 복음을 전할 전도자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편지마다 강조하고 있다. 가령 고린도후서 1장 1절의 서두에 보면“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식의 자기 소개는 고린도전서 1장 1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라고 하였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는 내용은 바울의 13편의 모든 편지마다 그 시작이 동일하다. 무슨 말인가. 바울은 자기가 원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서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이점을 편지마다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에 의해서 성도가 된 것이다. 이는 교회와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예수사랑교회의 집사, 권사, 장로, 성도로 부르셨다”는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깨닫고 아는 것이 은혜이다. 그러므로 성도다운 분명한 부르심과 소속감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나. 예수 만나지 않았으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의 유대인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바라새파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부, 명예, 지위, 권력 등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독보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한 후에 끊임없는 고난을 감당해야만 했다.
바울 사도는 ‘많이 견디는 것과’라는 고백과 함께 아홉가지의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앞에서 거론한 ‘환난과 궁핍과 고난’은 일반적으로 겪게 되는 고난들이다. ‘환난’이란 ‘궁지에 몰리는 경험’을 말한다. ‘궁핍’이란 ‘끊임이 없이 계속되는 역경’을 일컫는다. ‘고난’이란 ‘극복해 내기 어려운 극한 상황’을 말한다.
생각하여 보라. 바울 사도가 사도로 부름 받은 그 사도권을 가지고 이방 땅에 드나들며 예수의 부활 복음 전파를 위하여 ‘환난과 궁핍과 고난’을 끊임이 없이 겪으며 이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거짓 사도들의 선동에 의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때에 얼마나 속이 상했겠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매 맞고 갇히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바울은 주변 사람들에 의한 그 끊임이 없는 위협 가운데서도 사도로서의 자긍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사도 바울은 여덟 번이나 매를 맞았다. 다섯 번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았고 세 번은 이방인들에게 맞았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라고 매맞은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다 붙잡혀서 빌립보, 예루살렘, 가이사랴, 로마 등의 감옥에 갇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난동’과 라는 고백은 그의 곁에서 소란을 피우는 폭도들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겪었던 여러 차례의 경험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라는 것은 자발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했던 고난의 경험들이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장막을 만들어 선교 자금을 확보하기 까지 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잠을 못자는 날들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굶주림의 날들을 이겨 가며 복음 전파에 매진하였다.
예수사랑교회가 오늘날의 교회로 자리 잡기 까지에도 바울 사도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교회를 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이들을 끊임이 없는 섬김이 있었는가를 뒤돌아 보게 된다.
주님은 오늘 본문인 고린도 후서 6장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4절에,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보람된 일이냐고 말이다. 이 내용을 다시 <공동번역성경>에서 대하면 이런 내용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만약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 각 사람은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주의 일을 감당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영광스러운 것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 사도 바울이 겪던 고난처럼 고난에서 시작해서 고난으로 인생이 끝나고 만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분명하게 교훈해 주고 계시다.
6-8절을 <현대인의 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님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의를 무기로 삼고 영광을 얻든 수치를 당하든, 욕을 얻어먹든 칭찬을 받든 항상 하나님의 일꾼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맞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의 모습이다. 아홉가지를 언급하였다.
‘순결’이란 깨끗함이라고 하였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도덕적으로 무흠한 것을 말한다.
‘지식’이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복음에 대한 분명한 통찰력을 말씀한다.
‘인내’란 대적자들의 모욕과 비난과 비방 중에서도 관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친절’이란 인내심을 갖고 자비롭게 상대방을 대하는 모습을 말씀한다.
‘성령의 감화’란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를 의미한다.
‘거짓이 없는 사랑’이란 성령이 감화에 의한 성령의 열매로서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위선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말씀한다.
‘진리의 말씀’이란 복음 그 자체를 말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복음 전파가 자신의 언변이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능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간증하는 내용이다.
‘정의의 무기’란 그 당시 군사가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방패를 든 것처럼 좌우에 정의의 무기를 든 모습을 일컫는다. 즉 사도 바울은 한 손에는 성령의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사단의 공격을 대적하며 지금까지 나아왔음을 간증하는 것이다.
이 모든 덕목들이 합력하여 바울을 바울되게, 사도를 사도되게 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역리(逆理).
우리는 고린도 후서 6장 8-10절에서 사도 바울에게서 만날 수 있는 신앙의 정수를 대하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교훈을 담고 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고린도후서 6장 8절 후반절부터 10절까지를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점점 더 해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