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행하신 일(시92:1-15) 2021. 6. 13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과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92편의 4-5절에 보면 “주께서 행하신 일, 주의 손으로 행하신 일, 주께서 행하신 일”이란 표현이 세 번 연속 반복된다. 맞다. 성경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행하신 수 많은 크고 작은 기사와 이적들과 은혜롭고 감동적인 일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천지창조, 노아 시대의 홍수,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한 아들 이삭의 탄생, 17살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일, 요셉이 애굽에서 서른살에 총리가 된 사건, 모세의 탄생과 갈대 상자에서 바로의 딸 공주의 손길에 의해서 건져 내진 태어난 지 삼 개월 쯤 된 어린 모세, 연세 팔십세가 된 모세가 애굽의 왕 바로를 만나 동족을 출애굽시키게 된 일, 애굽의 히브리 노예 민족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일, 모세 때의 광야 생활하던 이백여만 히브리 민족에게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사십 년 간 공급하신 사건 등 일일이 나열하면 끝이 없는 이 모든 일들이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다. 더 이상 거론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제목 붙여져 있는 시편 92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찬양하고 ‘주의 인자’ 즉 주의 사랑을 아침마다 널리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뻐하게 되고 소리 높여 외치게 된다고 찬양하고 있다.
안식일에 주의 성전에 오르며 찬송을 부르는 시편 기자는 5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라고 주님께서 행하신 크신 은총을 찬양하고 있다.
시편 92편은 주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시편 기자의 평소의 마음가짐이 어떠한가를 교훈하고 있다.
감사하며 찬양하라.
시편 92편의 시작은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표현을 담고 있다. 그냥 “여호와여, 하나님이여, 주여”라고 하지 않고 ‘지존자여’라고 하였다. 지존자(至尊者)란 ‘가장 높은 존재’(Most High)로 고대 사회에서는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편 91편과 92편의 시작에 보면 한결같이 하나님을 ‘지존자’로 표현하였다. 그렇다. 맞다. 하나님 지극히 높은 존재이시다. 과거에도 그러하시고 현재에도 그러하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는 시편 2편 11절의 말씀처럼 사람은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시편 2편 12절의 말씀처럼“지존하신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게 하신다.”
그 영원하시고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은 얼마나 귀하고 좋은 일인가.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라는 말씀은 온갖 악기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1절을 읽어 보면 “야훼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노래하는 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사오리까?”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면서 나 자신과 나의 가족과 내 주변의 대소사에 흘러가는 모든 세월 가운데 가득한 주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깨닫게 된다. 사람들 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매사가 그러하다. 그래서 주께 감사하고 그래서 주께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생의 주인이고 모든 것이 내 지혜, 내 판단, 내 의지, 내 결정, 내 힘, 내 능력, 내 열심을 통해서 이룩하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는 ‘주께서 행하신 일’을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런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들일 마음의 방이란 없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로 나 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의 은혜요 주의 인도하심이요, 주의 공급이요, 주의 다스리심이요, 주의 섭리요, 주의 이끄심이요, 주의 돌보심이다. 이걸 알고 깨닫게 되면 천번 만번 주께 감사하게 되고 주를 찬양하고 또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고 이것이 진리의 백성다운 모습이고, 이것이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세상사람들은 ‘간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간증’이란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 주께서 나의 삶에 주인이 되셔서 행하신 일들을 주변에 이야기 하는 것이 간증이다. 그러므로 간증의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다. 내 삶에 주인으로 오셔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며 다듬어 가시고 정금처럼 연단하셔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시는 손길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다. 그걸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찬양으로 이어지게 되는 법이다.
살아가다 보면 별의 별 우여 곡절을 다 겪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렇지 않나. 우리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은 나의 지난 날의 모습을 안다. 나의 사십대 중반의 교회 사역 중심에 서 있던 모습을 안다. 나의 오십대 초반까지의 모습도 안다. 어떻게 해서 오늘 날의 예수 사랑교회가 탄생되게 되었는지도 안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곳, 은평 뉴타운 초입에 있는 북한산 자락의 계곡 옆에 예배당이 건축되게 되었는지도 안다. 지내놓고 보니 이 모든 일들이 ‘주께서 하신 일’들인 것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주께 감사하게 되고 범사에 주께 감사해야만 하고 주의 이름을 높여 찬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를 ‘HISTORY’라고 한다. ‘HIS’와‘STORY’를 합한 표현이 ‘HISTORY’ 라고 설명하고는 한다. 그렇지 않나. 개인이든, 가족이든, 민족의 역사이든 그 모든 배경에는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숨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1950년 6월 25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6월 25일이라는 날이 다가오면 1950년에 있었던 역사적인 그 날을 기억한다. 체험 세대가 아니더라도 역사 속에 배워서 안다. 그때 1129일 동안 계속된 전쟁이 휴전 상태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1129일 동안의 동족 간의 전쟁으로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가. 전쟁이 멈춘 이후 오늘날까지 이 폐허의 땅에 누가 100층짜리 빌딩을 지었는가. 누가 그 많은 한강 다리를 놓았는가. 누가 그 많은 고속도로를 건설했는가. 누가 최첨단 IT 산업의 최강국이 되게 하였는가. 그 지혜, 그 열심, 그 수고, 그 땀 흘림, 그 결실이 몇몇 사람의 수고 덕분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가 되게 하신 주의 행하신 일을 주목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미국다움으로 선교사를 세계에 많이 파송하는 선교대국이 되었다. 우리나라 민족처럼 짧은 선교 역사에 이렇게 ‘하나님, 하나님’하며 사는 예배 민족으로 변화된 나라가 그리 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이다. 하나님의 사용하심이다.
늘 간증하지만 나 자신도 다리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강화도 섬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늘 질문하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생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하고 찬송하며 살아 올 수 있게 된 것이 다 주의 돌보심이요 주의 인도하심이요 주의 섭리요 주의 행하신 일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 각 사람이 얼마나 할 말이 많나. 얼마나 할 간증이 많으냐 말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주와 더불어, 주를 위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은 내게 좋은 일, 기쁜 일, 자랑스러운 일, 잘된 일만 많아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는 교훈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과 실라가 붙잡혔다.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겼다. 많은 매를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새도록 바울과 실라는 감사하며 찬송하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 너무합니다. 저희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절망해야 옳을 터인데 바울과 실라는 달랐다. 매를 많이 맞아 몸이 쑤시고 아픈데도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밤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사도행전 16장 25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밤에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 할렐루야
이번 금요일 밤중에 드리는 기도가 그런 기도의 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래서 못 모여요. 이래서 못 와요”하지 마시고 우리 오래만에 다 같이 모여서 찬양하고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의 밤, 찬양의 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찬양할 때 여리고 성이라도 무너지는 것이다.
알리며 전하라.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표제어로 설명 붙여진 시편 92편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다시 돌아가게된 백성들이 수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안식일을 회복하며 감격 속에 주의 성전에 올라가며 매 안식일 때마다 부르던 감사 예배시이다. 생각하여 보라.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이 넘도록 포로로 지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청년기에 끌려간 이들은 늙었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포로의 땅 바벨론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더러 늙도록 살아 남은 생존자들 사이에 끼어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선조들의 땅에 돌아갔다. 가 본 적이 없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거기 예루살렘에 수룹바벨을 앞장세운 믿음의 사람들이 제 2 성전이라고 이름 붙이는 수룹바벨 시대의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무너진 솔로몬 성전 터에 성전을 재건하고 안식일마다 예배드릴 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라고 찬양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그렇지 아니한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이유,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칠 충분한 이유가 넘쳐나지 아니한가. 부인할 수 있나. “하나님은 내게 부어 주신 은혜가 없다. 나는 불행하게만 살았다”고 감사와 찬양 대신에 원망과 탄식으로 일관할 그 누가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설령 그 어떤 불행, 그 어떤 난관, 그 어떤 고난, 그 어떤 슬픔, 그 어떤 아픔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나의 삶에, 나의 가정사에 ‘주께서 행하신 일’이 깨달아지지 않나. 실패했더라도 은혜로 바꾸어 주시고, 실수했더라도 은혜로 덮어 가리어주시는 주님의 돌보심과 보살펴 주심이 있었다고 고백하게 되지 않나.
1966년에 충남 논산의 평범한 농부의 가정에 육남매 중에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김인강이란 이름의 이 아들은 두 살 때부터 걷지를 못했다. 자기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이 중중 장애 아동을 초등학교 교장도 받아 들이지를 않았다. 10살 때에 둘째 누나를 따라서 대전 재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동안 땅 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는 처음으로 목발을 집고 스스로 걷는 연습을 하게되었다. 재활원에서 만난 최화복 선생님은 그에게 “사람은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이 한 두가지씩 있는데 인강아 너는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어렵게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그 동안 자라나면서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칭찬과 인정의 거의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잔뜩 퍼 마시고 들어오면 걷지 못하는 막내 아들을 저주하였다.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을 밖에 내다 버리라고 저주하였다.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였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였다. 항상 집안은 불안과 두려움과 저주에 휩싸여 지내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세상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를 사랑해주고 격려 해준 재활원의 최화복 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갖고 공부해서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서울대 캠퍼스에 비가 내리고 불편한 몸을 두 목발에 의지해서 힘겹게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다. 그날 그에게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준 학교 선배 누나가 있었다. 그 날 그는 그 누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소개 받았다.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기독대학인회(ESF)라는 기독학생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차근 차근 성경공부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로 공부하며 그 때의 경험을“과학에 한계를 느끼며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만물이 근원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마음속에 들어 왔다”고 간증하였다.
그 무렵 서울 생활을 함께 하시던 어머니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드리시며 나를 끝까지 돌봐 주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시던 어머니의 사랑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간증하였다.
그는 서울대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국 명문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위치한 고등과학원의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기쁨의 공식>이란 그의 간증집에서 “기쁨의 공식의 원천은 내 삶에 동행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 모든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이라 나누면‘0’이 됩니다. 그 분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됐으면 합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였다. 그는 수학자 답게“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수학자 다운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부조리나 죄 혹은 죄인을 만나면 그것을 나눠버려 죄 사함과 용서, 흠 없는 자녀로 만듭니다. 또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사람과 사회가 만나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무한대의 평강과 기쁨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 천국을 만듭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연애, 결혼, 출산, 취업, 내집 마련” 이 다섯 가지를 포기하고 산다는 ‘오포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도 한마디 더 하였다. “포로로 끌려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처럼 우리도 삶 속에서 신앙을 지켜 내려 노력한다면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하고 충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청년들에게는 “일본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을 지키고 나라의 독립을 이끈 기독교 선진처럼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뿐입니다.”라고 권면하였다.
시편 92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악인들의 나중과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는 백성들과 그 후손들이 받을 나중 축복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7절에 보면 “악인들은 풀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라는 표현은 안식일의 찬송시를 고백하는 시편 기자의 신앙 고백일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 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9절 끝에 보니까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로다”라고 교훈하였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시편 92편 본문의 교훈처럼“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주의 손이 행하신 일을 높이 외쳐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직업, 각기 다른 사회 생활 여건 가운데 살아가지만 자기 자신이 처한 여건에서 나의 삶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말하고 이야기하고 일상의 삶을 통하여 전하고 나눌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나고 ‘주께서 행하신 일’이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의인의 나중을 기대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부터 그 영혼이 잘되보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해 지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10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그렇다. 9절의 말씀처럼 주의 원수들은 궁극적으로 패망하고 말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들소의 뿔처럼 높이실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들소의 뿔’이란 뿔 중의 뿔 즉 가장 강한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선한 기름’을 부어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이끄실 것이다. 신선한 기름이란 극상품의 기름 혹은 향기로운 기름을 뜻한다. 즉 기름 부음은 제사장이나 임금이나 선지자이므로 악인은 멸망하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들은 때가 되면 존귀하게 높이시는 기름부으심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며 축복의 말씀이다.
8절의 선언처럼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하는 선포를 하며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예배당을 건축한 후에 방 이름에 “백향목 홀” 혹은 “종려 나무홀”이렇게 이름 붙인 성경 말씀이 오늘 여기 시편 92편 12절에 나온다. 12절부터 마지막 15절까지를 함께 읽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종려 나무와 같고 백향목과 같은 번성과 성장을 약속하셨다. 종려나무란 번영과 승리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백향목이란 고난을 이겨내는 내구성과 수명과 거대한 위용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주님은 종려나무처럼 번성하게 하시고 백향목처럼 오래도록 자자손손 창성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른이나 젊은이나 어린이나 여호와의 집에 심겨진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번성해야 한다. 주말이면 밤마다 이태원 술집과 클럽 골목을 들락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 머물고 하나님의 뜰에서 머물기를 즐겨하는 예배자, 기도자의 인생으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할 때에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한” 간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신다. 좋은 것을 풍성하게 심어 차고 넘치도록 거두게 하신다. 하나님의 정직하심과 불의가 없으시고 바위처럼 나의 든든한 의지와 피난처가 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