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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하지 아니하노니(고후4:16-18) 2021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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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6-19 14:25 조회 7,475 댓글 0
 

                   낙심하지 아니하노니(고후4:16-18)          2021. 6. 6



지난 초봄에 아파트 쓰레기장 울타리 밖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버린 대통령상 액자 두 개를 보았다. 모 언론사의 대표가 버린 대통령상 액자였다. 버리려면 눈에 띄지 않게 분쇄해서 버렸으면 눈에 띄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1980-1990년대에 대통령을 지낸 노 모 대통령과 김 모 대통령의 ‘대한민국 대통령 000 ’라는 이름과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새겨진 붉은색 사각 직인이 선명한 대통령상장을 담은 액자였다. 그걸 보는 순간 “그래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이 별것 아니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화장 문화가 보편화 되어서 “사람은 흙에서 왔다가 한 움큼의 재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맞다. 어제는 세계 환경의 날이었다. <쓰레기에 관한 모든 것>이란 책이 있다. 피에로 마르틴은 열핵융합을 연구하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공동저자인 알렉산드라 비올라는 어나운서이며 과학전문작가이다. 두 사람 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들의 관찰에 따르면 지구의 산 중에서 가장 지저분한 산은 에베레스트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천국의 신’이란 뜻을 지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이다. 최근엔 네팔 산악연맹을 중심으로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등반가들이 등반 도중에 버린 쓰레기 때문이다. 이에 네팔 정부는 쓰레기에 대한 ‘동등한 균형’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정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모든 등반가는 베이스캠프로 하산할 때 최소한 8kg의 쓰레기를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이 등반하는 동안 산에 남겨지는 것으로 추산되는 쓰레기의 평균량이다. 등산가들은 최소한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로프, 갈고리와 말뚝, 음식을 먹은 빈 캔, 음식을 포장했던 플라스틱 용기와 산소통 등을 버리고 하산한다. 70년 전인 1953년에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 후 오늘날까지 4,500명의 등정가들이 7,000회 이상 정상에 등반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는 약 12톤가량의 쓰레기로 덮인 쓰레기 적치장이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산속에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눈에 구덩이를 파서 볼일을 보고 눈으로 덮는다. 매년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70여 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대소변을 에베레스트의 얼음 산에 구멍을 파고 묻었다. 등산 중에 사망하고 그 시신을 찾지 못하여 어느 높은 산 계곡의 눈과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시체의 수도 한 둘이 아니다. EU의 지구과학 저널의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말까지 고도 5,500m 미만의 빙하 중 70~99%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급격한 기후 변화를 경고하는 내용들이다. 과거에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요즘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쓰레기를 남긴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쓰레기 처리의 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던 히브리인이며 열심히 대단하던 바리새파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과거를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고린도 전후서를 쓴 이는 사도 바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편의 편지 중에서 나중 편지이다. 고린도는 로마와 함께 그 당시 상징적인 대도시였다. 워낙 국제적인 항구도시이다 보니 별의별 자기가 잘났다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서 도시를 형성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그런 국제적인 도시 안에 형성된 교회의 구성원들도 각기 다른 문화 배경과 함께 색깔과 주관이 분명한 이들로 넘쳐 났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일 년 반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파하여 시작된 교회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곳을 떠난 몇 해 만에 교회가 세속에 물들고 세상을 짝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서 심각한 문제점들이 암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도 바울이 그 후에 고린도에 방문하여 저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 바 있다. 전해지지는 않지만 ‘눈물의 편지’라고 이름 붙여진 편지를 보낸 바도 있다. 


그러한 편지의 효과가 있어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과오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시 얼마 가지 못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이단의 증가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는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사도권(使徒權)을 부인하는 이들이 생겨나서 큰 위기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형편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서 편지한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들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면 고린도후서의 특징일 수 있다. 또한 지극히 감정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곳곳에 세워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남달랐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한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2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는 표현을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라고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예로 들면서 돌에 새겨진 율법 조문의 영광과 의의 직분으로 주어진 영원한 영광인 더 큰 영광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후서 3장의 길지 않은 말씀 중에서 ‘영광’(榮光)이란 단어를 무려 13번이나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간절한 심정으로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린도 후서 4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읽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다시 한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는 신앙의 근거는 무엇이며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선언하고 있는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도 바울은 이 짧은 본문 중에서 분명한 대비의 명제들을 가지고 전하려는 편지의 요지를 증거하고 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비가 그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겉사람’이란 사람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는 것일까. 7절에서는 겉사람을 ‘질그릇’이라고 하였다. 10절에서는 ‘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죽을 육체’라고 하였다. 로마서 6장 6절과 에베서소 4장 22절에서는 ‘옛사람’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어떤가. 그렇지 않나. 내가 지금 몸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몸이란 것이 엄마의 태중에 잉태 된 후에 자라나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아기의 작은 몸이 자라나서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된다. 그러나 지금 웬만큼 나이가 든 이들은 시간과 세월이란 것이 뭔지 조금은 실감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금’이란 이 시간은 나의 이 세상의 생 중에서 남은 시간들 중에 가장 젊은 시간의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지금’이란 시간을 매 순간 살아가다 보니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는 것 아닌가.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나. 나이 들어가면서 아무리 건강하고 아무리 피부가 곱고 아무리 뼈가 튼튼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백년 천년 탈 없이 쓸 수 있는 겉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라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피할 수는 없다.  


겉 사람은 그런 것이다. 


솔로몬은 60살에 죽었다.

알렉산더는 33살에 죽었다.

늙지 않는 불로초 찾아오라 명했던 진시황은 49살에 죽었다. 

이소룡은 32살에 죽었다.

마릴린 먼로는 36살에 죽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46살에 죽었다.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에너 스펜서는 36살에 죽었다. 


겉 사람은 다 그런 것이다. 겉 사람은 병들고 때가 되면 죽게 마련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겉 사람은 낡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법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속사람’이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씀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 말씀하는 ‘새 사람’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되 영원히 영생하는 존재들이다. 영생을 믿는가. 우리는 436장 찬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의 가사처럼 분명한 믿음과 기대와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천국 백성들인 것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안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더 정확히 인용하면 이렇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날마다 점점 낡아지는 겉사람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말고 날마다 주 안에서 점점 새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속사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이 자녀로서 영생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고백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분명한 속 사람의 믿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하는 영의 사람의 믿음이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의 믿음이 견고해지기를 축원한다.   



경한 것과 중한 것.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고난의 사도였다. 특히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하는 그가 그 동안 당한 고난에 대한 간증은 그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사도 바울을 죽을 위기를 수 없이 겪었던 고난의 사도였다. 그런 그가 감히 이렇게 고백하고 편지하고 있는 것이다. 17절을 다 같이 읽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현대인의 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고난, 고생, 환란, 역경, 위기 이런 것들이 남들은 몰라도 정작 그 고난을 겪고 있는 당사자인 나로서는 피하고 싶은 고난 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감히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며,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어 내야 했던 지난 날의 고난에 대하여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구약의 욥기의 내용을 안다. 욥이 겪은 고난을 성경에서 접한다. 그 내용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일진대 그런 내용을 접하는 나는 어떠한가. 내가 욥의 지경이 된다면 나는 그런 극심한 사형선고를 받는 것 같은 겹겹이 닥치는 고난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 똑 같은 고난을 겪고 있던 욥의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부어 버린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남이 겪는 극심한 고난이라도 정작은 내가 겪는 아픔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고난을 겪고, 내가 고생하고, 내가 망하고, 내가 경제적으로 주저앉게 되었고, 내가 병들고, 내가 힘들고, 내가 죽을 것만 같고, 내가 밤잠이 오지 않고, 내가 억울하고, 내가 속상하고, 내가 화병이 나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면 남이 겪는 고난이 내게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달랐다. 그는 지금 겪고 있는 파도처럼 덮쳐 오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방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4장 11절부터 보면 사도 바울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모욕당하고 박해 받고 비방을 받았다.”고 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고 자세히 간증하였다.


그런 사도 바울인데 그는 이 모든 고난들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남다르지 않나. 우리가 이런 지경이 되면 어떻게 반응했겠는가. 


요즘 무엇 때문에 속이 상한가. 요즘 무엇 때문에 사는게 힘들다고 여기나. 요즘 무엇 때문에 지쳐 있는가. 요즘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심을 갖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을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요즘 무슨 고난을 겪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힘 겨워하는가. 무엇 때문에 지쳐 하는가. 우리 말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도 있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지금 고생스럽더라도 바울과 같은 분명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자.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도 바울은 분명한 천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한 예수 부활 복음의 확신을 갖고 사방에 그 복음을 전파하며 고난을 극복해 갔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라. 이 땅에 귀한 것들은 한결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나. “사랑, 믿음, 소망, 기쁨, 화평, 영생” 이런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말씀들이 우리의 눈에 보이나.


요즘 공기 속에 비말로 떠다닌다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나. 우리가 마스크 없이 지내던 그 좋은 날에 마음껏 호흡하던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나.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공기의 고마움을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다. 우리가 엄마 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마시며 사는 것이 공기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집착하며 살아서는 않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뭔가. “몸, 돈, 재물, 집, 아파트, 자동차, 보석, 명품 시계, 명품 가방, 명품 옷, 눈에 보이는 얼굴, 외모, 생김새, 키, 이력서, 학력, 경력, 지위, 신분”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은 실로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교훈처럼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다.”


이걸 깨닫는 것이 믿음이다. 이걸 아는 것이 지혜이다. 이걸 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한결같이 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한결같이 수 많은 천국 비유로 교훈해 주셨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도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오늘 밤 네 영혼을 부르면 네 소유가 다 뉘것이 되겠느냐”는 비유의 교훈처럼 우리에게 죽음의 순간, 천국과 지옥을 구분한 그런 최후의 순간이 찾아 오면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아침 안개처럼 잠깐 지나가 버릴 보이는 것과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상급으로 주어질 것인데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말이다.


복음을 모르고 부활의 사실과 진리를 몰라서 부인하고 핍박하고 박해하던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 변화 체험 이후에 깨닫고 증거하게 된 복음이 이것이다. 그로 하여금 결코 낙심하지 않게 하는 영원한 힘이 이것이었다.


과연 날로 새로워 지는 속 사람답게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며 보이지 아니하나 분명한 상급으로 다가올 예수의 생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에서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10-12절에 보면 각 절마다 “예수의 생명”을 강조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7절에서 말씀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이 보배를 간직한 성도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끌려 다니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르게 살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생명을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우리 각 사람이 주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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