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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누리는 사귐(요일1:1-2:2)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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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4-16 22:26 조회 8,061 댓글 0
 

                      더불어 누리는 사귐(요일1:1-2:2)         2021. 4. 11



요한 일, 이, 삼서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문안 인사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나. 바울의 13서신이나 베드로 전후서, 야고보서나 유다서 등 그 어느 서신이나 길든 짧든 문안 인사로부터 편지를 시작한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혹은 ‘은혜와 평강이 너욱 많을 지어다’”식의 문안 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와 함께 요한의 세 편의 서신들은 한결같이 문안하는 인사조차 없이 첫 문장에서부터 편지하려는 본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 중의 특징이다. 


요한 일서를 기록한 이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이란 야고보의 형제인 예수의 제자 요한을 말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 곗시록을 기록한 영광스러운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젊은 제자였다. 제자 요한은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던 그 밤에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기대서 누워 있을 정도로 예수께 다정다감하게 행동하던 제자였다. 요한복음 13장 23절에 보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13:21)는 말씀을 하신 그런 긴장되는 분위기 중에서도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을 보면 예수께 늘 친밀감을 정스럽게 표현하고 특별히 예수께 사랑을 받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가롯 유다 대신이 맛디아로 충원된 12제자들은 사도 요한 외에는 모두가 다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유일하게 장수하다가 주후 100년경에 94세를 일기로 주님께 돌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 일, 이, 삼서는 요한복음을 먼저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기 이전의 그 중간에 쓴 기록일 것이라고 전해진다. 요한복음은 요한 사도의 나이 70대 후반에서 80대 중반에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요한 계시록이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의 기록이라면 요한 일, 이, 삼서는 요한 사도의 나이 85세에서 90세 경에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던 당시에 썼을 것으로 성서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이 그렇게 연세가 많은 늙어 가는 나이에 이러한 편지를 남겨야 했는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 첫째는 당시 로마의 황제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재위 A.D. 81-96)가 이시스(Isis)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 자신을 또한 신으로 칭함받기를 원했다. 그러하다 보니 자연히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환난과 핍박을 잘 견디고 인내하며 구원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바래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탄생한지 50여 년이 된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와 이단의 횡포가 점점 심각해져 가는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해야만 하겠다는 생존해 있던 예수의 마지막 제자로서의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라는 이단이 극심하였다.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二元論)적인 헬라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저들은 구원은 육체와 상관이 없으며 육은 악한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저들은 육체의 타락과 죄악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도덕 폐기론자들이었다. 이처럼 기독교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교훈을 배척하려 하는 심각한 이단 집단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룩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역사적인 예수를 부정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점점 연세가 들어가던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박해로부터 인내심을 갖고 믿음을 지킬 것과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지켜나가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갈 것을 권면하기 위해서 이 세 편의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이 마태, 마가, 누가 복음과 차원을 달리하는 요묘한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1장이 시작되는 것처럼 요한 사도의 첫 편지인 요한일서 1장 또한 그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렇게 편지를 시작한다. 이는 마치도 요한복음 1장 1절이 그러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다 같이 읽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시다”라는 내용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1절의 시작 부분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시작하고 있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며 그는 태초부터 계시던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자, 그러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도록 하자.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라.

2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분의 말씀을 친히 듣고, 눈으로 그 분을 보고, 손으로 만지기 까지 했다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예수의 성육신 즉 육체로 오셔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수 많은 천국 비유를 말씀하신 역사 중에 살아 계시던 예수를 부정하였으면 이런 강조를 반복한 것일까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2절과 3절에 보면“보았다. 들었다. 나타내신 바 되었다. 증언한다. 전한다.” 왜 이런 표현을 이렇게 거듭해서 시작부터 쓰고 또 쓴 것일까. 그 당시 역사 중에 살아 계시던 예수를 부인하고 배척하는 이단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나를 알게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까지 편지의 시작부터 “나는 예수를 보았고 그 분의 말씀을 친히 들었고 손으로 만지기 까지 예수와 접촉하며 지내던 제자이며 증인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땅에 생존해 있는 예수의 마지막 제자로서의 절규와 같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첫 강조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그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본문이며 특권이어야 한다는 강조이다. 


그렇지 않나. 요한일서 1장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사귐’이란 단어이다. 사귐이 무엇인가. 3절과 6절과 7절에서 계속해서 ‘사귐’이란 표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귐이란 교제한다는 말이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사귐’이나 ‘누림’ 대신에 ‘교제’라는 단어를 썼다. 그렇지 않나. 남녀간에 전혀 사귀지 않고 결혼한 부부가 있나. 사귐이란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중매로 결혼한 부부라도 살아가면서 10년, 30년, 50년 살아가다 보면 서로를 알아가는 사귐의 정도와 깊이가 달라지지 않나. 


우리가 신문이나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어느 유명 인사의 이름을 아는 정도를 가지고 그와 사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귄다는 것은 시공(時空)을 같이하며 시시때때로 손을 맞 잡고 대화할 수 있는 같은 공간 안에서 상대방과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하는 것이 사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친구라는 사이도 좋을 때만 같이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참다운 친구는 삶의 우여곡절과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어려움의 매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아닌가.


이는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간에도 마찬가지이고 부모자녀간의 관계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성 간에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나. 지난 3월 23일의 노원구 중계동 세 모녀 살해 사건의 범행을 보라. 이건 사귀는 것이 아니다. 사귀는 것은 이런 게 아니다. 만나 주지 않고 사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죽이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나. 


요한 사도가 강조하는 사귐이란 것은 교제(交際)하는 것을 말한다. 사전에 보면 “교제란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내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제라는 것은 상호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귀어 가는 것이다. 3, 7절의 사귐의 바탕은 6절의 ‘하나님과의 사귐’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서로의 사귐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생 사역한 태백의 예수원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인 성공회 사제였던 대천덕( R. A. Torrey, 루번 아쳐 토리 III, 1918-2002)신부는 교회를, 


교회(敎會)라고 하지 말고 

교회(交會)라고 하여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의 산둥성에서 사역하던 장로교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과 평양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1965년에 태백의 산골짜기에 예수 공동체를 설립하고 예수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 사회를 꿈꾸고 실현하려고 평생 씨름하였다. 성경과 성령 중심의 신앙생활과 영구히 사고 팔지 않는 레위기 중심의 토지개념을 주창하였다. 그의 책 중에 <나와 하나님>, <대천덕 자서전, 개척자의 길>,<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 정의> 같은 책은 기독교인이라면 꼭 읽어 볼만한 책 중의 하나이다. 


그의 또 하나의 강조는 교회는 가르치는 곳이라기 보다는 사귀는 곳이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3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하였다. 사귐과 누림 이 두 가지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계속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의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돌보고 섬기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다. 그것이 성도들의 사귐이다. 성도는 주 안에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그 어떤 고난이라도 함께 더불어 누리며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와 물을 쏟아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사귀며 살아가는 성도의 참 모습인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라.

5절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장 8절, 16절)는 말씀도 요한 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에 빠져서 이단의 미혹에 휩싸여 있는 그 당시의 수 많은 안타까운 영혼들을 향하여 사랑이시며 빛이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돌아 올 것을 권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초대교회 성도들마다 영지주의와 같은 어리석은 이단에 빠지지 않고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진리를 행하는 빛의 자녀가 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6절),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서로가 사귐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7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8절)


이런 교훈들을 논리적으로 강조해서 교훈하고 있다. 요한일서 1장을 차근 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성찬식 시간에 자주 묵상하는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에서 눈길이 멈추게 된다. 다 같이 읽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초청인가. 신앙생활이란 나의 죄인 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연신내 사거리나 구파발 사거리에 길목을 막아서서 큰 소리로 “회개하라 죄인들아”하고 소리친다면 지나가는 시민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 보겠나. 그러나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의 바탕이다. 우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이나 예수처럼 그렇게 세상에 나가서 큰소리를 외쳐 전한다면 옳은 말이고 바른 말인데 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외치는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우리는 그런 방법을 택하는 대신에 잠잠히 내 삶의 주변에서 끊임이 없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점을 증거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죄인됨을 자백하고 시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빛의 자녀의 삶으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 성도는 어둠을 행하면 않된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어둠이란 죄와 악을 말한다. 죄의 두려움과 악의 끝을 알면서도 죄를 행하고 악을 반복한다면 그 끝은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증거는 어둠에 행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나. 502장 <빛의 사자들이여>라는 찬송가의 1절 가사를 보라.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이렇게 찬송만 부르지 말고 이렇게 세상 중에서 빛의 사자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 


서울 강남의 큰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하는 어느 젊은 목사의 글을 보았다.


그는 하루에 마을버스가 5번 지나가는 강원도 시골에서 목회하다가 선배 목사의 소개로 강남 큰 교회에 부목사로 갔다. 그는 강원도 시골에서 태어 나서 목사가 된 후에도 강원도 시골에서만 목회하던 중이었다. 


“아, 나도 서울에 가서 사는구나” 희망이 부풀어 서울로 이사 왔는데 금방 후회했다. “아, 내가 못 올 데를 왔구나” 왜냐면 그는 완전히 촌놈인데 서울 강남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남자 성도들은 거의 다 판사, 변호사, 검사 의사, 약사, 회계사 등등 ‘사’ 자 들어가고 뒤에 ‘사’ 자가 안 들어 가면 앞에 ‘사’들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사장님, 사모님으로 불렀다. 사모님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별로 춥지 않아도 겨울이면 거의 다 밍크 코트 입고 교회 다니고  사탕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다녔다. 나중에 보니까 가짜 다이아 반지를 낀 이들도 많기는 많더란다.


대하면 대할수록 출신 신분이 너무나 달랐다. 서울대 연고대, 이대 숙대가 보통이었다. 그래서 “아, 이거 사람이 누울 자리를 봐가면서 다리를 뻗으라고 했는데 완전 잘못 판단했구나”하면서 주눅이 들고 너무 위축이 되어서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그래서 그를 소개한 선배 목사께 상담을 했다.  그랬더니 그 선배 목사는 한 술 더 뜨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네는 사투리는 안 쓰지 않나.”이 분은 경상도 분이어서 ‘쌀’ 발음이 안되고 ‘살 살’이라고 말하고‘경제’ 가 ᄇᆞᆯ음이 안돼서 ‘겡제’ 이렇게 발음하는 분인데 강남에서 목회하다 보니까 청소년 애들이 쫓아다니면서 “목사님 쌀 해보세요. 겡제 해보세요.”하고 놀리는데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한 일 년 쯤 지내면서 각 가정에 방문해서 심방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강남 생활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집집마다 사연을 들어 보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을 안 가진 가정이 없는 거였다. 교회 다니면서도 부부가 그렇게 외도를 하고 각 방 쓴 지는 몇 년이 넘고 자기 남편이 어쩌다가 자기 몸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몸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회 와서는 안 그런 척하고 다정하게 앉아 있고 성가대를 하고 우리 속회처럼 구역 예배도 하고 여기저기서 봉사도 하고 그러는데 집에만 가면 남남처럼 사는 가정이 한 두 가정이 아니었다. 


강남이라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었다. 햇빛이 거의 안 드는 지하 단칸방에 사는 교인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무허가 비닐하우스에 사는 교인들도 있었다. 끼니 걱정하는 교인들, 경제 파탄 난 가정들도 적지 않았다. 


남편이 돈 잘 버니까 경제적으로는 넉넉한데 바람피우는 남편도 한두 집이 아니었다. 둘 중의 하나는 흔했다. 돈도 못 벌어다 주면서 게다가 바람까지 피우는 경우가 너무 많아 충격이었다. 


그런데 돈도 잘 벌어다 주면서 바람도 안 피우는 외계인 같은 그런 남편도 있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집은 애가 속을 썩였다. 아들딸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보내고 가출하고 소년원 가고 그래서 다 좋은데 자식 하나가 속을 썩여서 집안을 풍비박산시키는 경우를 보았다. 


어떤 집은 돈도 잘 벌어다 주고 바람도 안 피우고 거기다가 애까지 공부 잘하는 집이 더러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집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아서 울상이 되는 집도 보았다. 


그런데 어떤 집은 돈도 잘 벌어다 주고 바람도 안 피우고 애들도 공부도 잘하고 몸도 건강한데 가족 중에 누군가에게 우울증이 찾아 왔다. 

  

또 어떤 집은 돈도 잘 벌어다 주고 바람도 안 피우고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건강한 것 같은데 괜스레 불안증이 찾아와서 도대체 불안하고 죽을 것만 같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며 하소연하는 가정을 만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사도 요한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나. 


“어둠에 행하지 말고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라”

“죄를 자백하고 예수의 피로 죄 용서받고 불의에서 깨끗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누리며 살아가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런 찬양이 생각나지 않나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가 알게 되리 주님의 사랑


이렇게 끝나는 찬양 말이다.  



화목 제물이신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으라.

2장 2절에 보면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라고 교훈하였다. 뿐만 아니라 2장 1절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대언자”이시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화목 제물’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7장 11-34절에 보면 화목제물에 대하여 교훈한다. 무교병과 유교병에 대하여 자세하게 교훈한다. 화목제물은 감사제물이며 동시에 피 뿌림의 희생 제물이어야 했다. 문자 그래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제물이 가슴을 흔드는 요제, 뒷 다리는 드는 거제 등은 대제사장의 몫을 구분하는 제사의 과정들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 26-2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로마서 3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을 삼으셨다고 하였다. 신앙 생활은 이 진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히브리서 2장 17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시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贖良)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요한 속량이란 이 단어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죄의 값을 다 해결하였다”는 뜻이다. 세상에 기쁨 중에서 가장 큰 기쁨은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이다. 감사 중에 가장 큰 감사는 죄 사함을 깨달은 감사이다. 감격 중에 가장 큰 감격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감격이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가장 큰 소망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의 최고의 소망이어야 한다. 


죄 사함 받고 거듭난 성도라면 283장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이런 찬송을 감격스럽게 부르며 빛의 자녀답게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죄와 악을 멀리하며 넘치는 찬송과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보혈의 공로로 

내 주의 은혜 입으니 늘 평안 합니다 

나 속죄 받은 후 나 속죄 받은 후 주를 찬미하겠네 

나 속죄 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하겠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된 기쁨을 누리며 삽시다. 빛되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행하며 삽시다.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 갑시다.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주님 과의 사귐이 점점 더 깊어가는 은혜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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