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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잉태하여 낳을 아들 예수(눅1:26-38)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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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1-06 07:20 조회 17,248 댓글 0
 
어느 나라의 말이든 ‘엄마’를 부르는 말처럼 따뜻하고 만감이 교차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 평화, 안식, 위로, 격려, 용서, 용납, 희생, 돌봄’ 이와 같은 의미들이 갖는 온갖 좋은 것들이 ‘엄마’라는 호칭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일생 중에서 엄마가 되는 일처럼 숙연해지고 긴장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여성으로서 각 분야에서 능력 있게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귀하다. 그러나 소위 워킹맘(working mom)이 되어서 결혼과 함께 찾아오는 임심과 출산과 육아와 함께 무엇인가 사회에 나가서 일을 병행한다는 것은 결코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더더군다나 태교와 함께 어린이들에 대한 조기 교육의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에 건강한 자녀를 잘 낳아서 균형 있는 심심이 건강한 자녀로 키워내는 일은 나라 살림을 잘하는 정치 이상으로 크고 막중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붕어빵이란 프로그램에 보니까 어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민폐’를 주제로 자기 엄마에 대하여 말했다. 엄마가 엄마 친구와 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에 맥주는 모자라고 아들은 과외 공부할 시간이 다가 오자 집으로 아들 과외 공부 가르치러 오고 있는 과외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어디 쯤 오고 계세요. 그... 미안한데 동네 슈퍼에서 맥주 몇 병만 사다 주실래요. 미안해요,” 아들이 나서서 참견했다. “엄마 그건 아니다. 어떻게 과외 선생님께 그런 부탁까지 다 할 수 있어요.” 결국은 취기가 오르던 엄마가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아니 선생님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부탁한 맥주 안 사 오셔도 될 것 같아요.”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신사임당 같은 엄마와 이율곡 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기를 키우는 힘은 엄마에게 있다. 엄마의 생활 태도와 엄마의 평소의 모습과 엄마의 지혜와 엄마의 관심과 엄마의 정서와 엄마의 감정변화와 엄마의 식생활과 엄마의 취미 생활과 엄마의 기도와 엄마의 그 모든 것이 마치도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아기를 잉태하고 낳고 제대로 잘 키우고 기르는 그 모든 수고 곁에 아빠가 있어야 한다. 이 땅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깨닫고 믿고 따르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탄생하셨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 자신이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하신 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인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를 가만히 생각하고 깨닫기 시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 절기는 오묘한 절기인 것이다.

미국 새들백 교회의 담임 목사인 릭 워렌(Rick Warren)은 <만나고 싶은 예수>라는 책에서 ‘사랑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한다.

“하나님이 새와 소통하기 원하셨다면 새가 되셨을 것이다. 소와 소통하기 원하셨다면 소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기 원하셨고, 그래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분은 천사나 예언자나 정치가나 대사를 보내지 않으셨다. 직접 오셨다.”

그렇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신 사건이 곧 성탄인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역사적인 현장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한지 여섯 달 뒤에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나사렛이란 동네에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하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를 찾아 갔다. 그리고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놀라고, 당황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마리아에게 천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고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순복하게 되었다.

본문의 천사 가브리엘과 동정녀 마리아의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성령이 누구이신지를 자세하게 입체적으로 교훈해 주고 있다. 마리아는 유대 땅 갈릴리의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태어나고 그 마을에서 성장한 지극히 평범한 시골 소녀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천사 가브리엘이 방문한 것이다.

은혜를 입은 동정녀 마리아의 하나님의 아들 잉태.
마리아를 만난 천사 가브리엘은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충격적인 말을 듣고 당황해하는 마리아에게 다시 천사가 말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그렇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의 편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총인 것이다.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돕는 배필 하와를 만들어 그의 곁에 짝 지어 살게 해 주신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에녹이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믿음 생활의 바탕도 하나님이 그에게 평생토록 베풀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동행해 주신 전적인 은혜인 것이다. 노아가 그 긴긴 세월을 산꼭대기에 방주를 건설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순종해서 가족들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그의 여덟 식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살에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방문을 거역하지 않고 따라 나서서 평생토록 나중 100년의 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었던 힘도 하나님이 그에게 베풀어 주신 크고 큰 은혜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 같은 은혜는 모세도, 여호수아도, 기드온도, 사무엘도, 다윗도 다 마찬가지로 한 결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은혜인 것이다.

어떻게 그 평범한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는 축복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역사의 사건인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나중에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탄생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큰 자의 탄생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다. 이렇게 보면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또한 대단한 어머니의 축복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와 비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주인공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은혜 받은 자를 통하여 은혜의 본체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에 대하여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자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 그 자체인 것은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서 61장 2절의 예언처럼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나중에 누가복음 4장 19절이 이를 인용하지 않는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은혜로운 천국의 말씀을 비유로 선포하셨다. 예수는 가는 곳마다 각색 병자를 고쳐 주시므로 은혜로운 하나님의 아들의 본체의 영광스러움을 언제나 환히 드러내셨다. 예수가 가시는 곳에는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해 졌고, 귀신이라도 잠잠해 졌다. 예수가 계신 곳에는 벳세다 광야와 같은 들판에서도 먹을거리로 넘쳐 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그 자체이셨다. 그 은혜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날 갑자기 마리아에게 임했고 마리아의 태중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고관대작의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나사렛의 목수로 생활하던 남편 될 다윗의 후손 요셉의 아내 될 마리아에게 은혜를 덧입혀 주시므로 찾아오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의 은혜가 임하면 가정이 변하고 인생이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고 나면 실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존 비비어(John Bevere)의 <은혜>(Extraordinary)라는 책에 보면 그런 말을 한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그렇다. 성도가 은혜를 받은 자로 살고, 은혜를 입은 자로 산다는 것은 대단히 숭고한 것이다. 단순히 세상의 그 어떤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극복하며 유혹을 뛰어 넘어 가며 살아가는 것 이상이다. 은혜의 능력으로 우리는 평범함을 초월하여 살 수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렛의 마리아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8절에서도 이 같은 은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을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연보 생활 즉 헌금생활에 관한 언급이며 칭찬이며 격려다. 그러나 그 누구나 뒤돌아보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빠듯한 은혜가 아니라 모든 은혜가 넘치는 은혜요 넉넉한 은혜요 풍성한 은혜인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처럼 풍성한 은혜의 근원이시다.

주께서 함께 하신 아들 예수의 잉태.
마리아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은 하나님이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하신 은혜의 절정이다.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했다. 어디에서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무서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게 되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부터가 아닌가. 우리의 믿음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임마누엘의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영원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이 땅에 태어나셨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어 내시는 구세주의 권능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의 모든 약속의 바탕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신앙이다.

금번에 남산교회 이원재 목사의 담임 목사 취임 예배에 화분을 선물로 보냈더니 그 교회에서 우편으로 태양열로 충전을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는 태양광 손전등을 답례품으로 보내왔다. 처음 대해 보는 제품이다. 신기하다. 그러나 원리는 간단하다. 작지만 집광 판을 통해서 햇빛을 모아들이고 전등을 밝힐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함께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살아갈 때에 지치지 않는 능력과 힘과 만물을 다스리고 헤아리는 지혜와 총명이 공급되는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내 맘에 모시고 살아가면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의 범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 나사렛의 마리아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가 무엇인가. 역사를 바꾸는 그 중심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고 골고다의 그 참혹한 고난을 모두 다 넉넉히 이기고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긴 부활의 주님으로 영원히 우리 곁에 영존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도 모세 때에 광야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것처럼 밤과 낮, 봄과 가을, 여름과 겨울 언제나 항상 함께 하시는 영원한 동반자이시다. 시간으로 하면 함께 하지 아니하시는 때가 없고 공간적으로 하며 언제나 함께 하시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성도라면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나 믿는 자의 모든 출입과 범사에 늘 동행하시고 늘 함께 계시는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시다.
주님은 어제도 함께 계셨고 지금도 함께 계시고 장래에도 늘 함께 하실 영원한 주님이시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할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아기의 잉태.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으신’ 은총의 축복 받은 여인이 동정녀 마리아였다. 그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였다. 35절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보라. 성령이 임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 임한 것이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아주 단순하게 기록한다. 31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처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미 천사가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마리아를 축복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의 선언 그대로 그런 주인공으로 태어난 것이다.

큰 자가 될 아기 예수가 태어 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예수가 탄생할 것이다.
조상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아기 예수가 장차 네 몸을 통해서 오실 것이다.
야곱의 집에서 영원한 왕으로 다스릴 아기 예수가 네게서 날 것이다.
끝이 없이 무궁한 나라의 왕이신 아기 예수가 바로 네 복중에서 자라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거룩한 아기 예수가 너의 태에 잉태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은 때가 되니 온전하게 다 이루어졌다. 마태는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분명하게 밝힌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자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누군가에게 계속하여 전하여야 한다. 성탄 절기는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절기이다.

세계적인 과학자요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냈고 명지대학교 총장도 지낸 정근모 박사는 장로이다. 그는 제 5공화국 시절에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이었던 김재익 박사와 절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예수를 안 믿는 김재익 박사에게 예수를 전할 기회를 찾던 중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서로 바쁘다 보니 김재익 박사는 대통령을 따라서 동남아 순방길에 동행하여 나섰다. 다녀 온 뒤에 만나자고 약속을 미루게 되었다. 정근모 박사도 당시에 중국을 다녀 올 일이 있어서 두 사람 다 한국을 떠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남아 순방길에 미얀마 아웅산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진 테러를 당하여 그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결국 전도할 기회를 놓쳤고 전도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금번에 세상을 떠난 대한민국의 보국철강의 신화의 주인공인 철강왕 박태준(1926-2011) 씨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였다. 물론 좌경론자들은 그 마저도 철강 산업 발전 신화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한 5. 16 혁명 정부의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1990년대 초기에 정치의 일선에서 찬바람을 맞고 국외로 나아가서 낭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에 미국 뉴저지의 따님이 출석하는 길벗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자녀들의 가족과 함께 교회 생활이 시작되었고 재미 언론인 출신인 김민웅 목사를 통해서 신앙생활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박태준 씨의 부인도 불교에서 개종해서 내외가 미국 이민교회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꼼꼼히 성경 말씀을 받아 적어 가며 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결국 그들의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성령이 역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본문에 돌아가 보자. 그렇게 당황해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 떨던 마리아는 반복되는 천사 가브리엘의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듣고 마음에 침착과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

이 얼마나 대단한 격려의 말인가. 역사는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성령을 사모하고 흠모하여야 한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된다. 오직 여호와의 성신이 임해야만 하는 것이다.(슥4:6)

만군의 여호와께서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그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신 능력이 임하여 덥힐 때에 기적도 일어나고 표적도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찾아가 그를 통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선언했던 지극힌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전능하신 은총과 권세가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열방의 구석구석에 정오의 강한 빛으로 비추어 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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