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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의 이름을 높이면(시34:1-8) 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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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21-10-27 20:54 조회 6,817 댓글 0
 

항상 그의 이름을 높이면(시34:1-8)         2021. 10. 24



이스라엘의 역사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생이 다윗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넘치는 은혜를 입은 주인공이다.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처럼 다윗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생이었다. 그에게도 부족이 있었다. 그에게도 숨길 수 없는 죄와 악이 있었다. 다윗이 죄를 범할 때에 보면 사악하고 어리석기까지 했다. 그런 다윗인데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다. 다윗에게 기름 부음이 계속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점점 흥왕하게 하셨고 점점 존귀하게 하셨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다윗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하였다. 이는 사무엘상 13장 14절에 있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라”라고 하였다. 시편에도 보면“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시89:20)라는 말씀이 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은혜와 복을 받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계절에 열매를 내는 밤 한 톨, 대추 한 알이 거저 된 열매가 아니듯이 다윗은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죽음의 위기를 수 없이 넘긴 오뚜기와 같은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시편에는 각 편에 제목이 있다. 시대 상황과 지은이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걸 ‘표제어’라고 한다. 시편 34편의 표제어 내용이 무엇인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 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무엘상 21장 10절 이하의 내용을 배경으로 한 시편이다. 다윗은 그를 죽여 없애려는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하여 광야 생활을 계속하였다. 다윗의 피신처는 엔게디 광야였고 다윗이 누워 잠을 청하는 곳은 들짐승들의 은신처인 막벨라 동굴 속이었다. 그런 세월이 하루 이틀, 한 해 두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앞날이 묘연한 고난과 두려움의 날들을 견뎌내야 했다. 한번은 국경을 넘어가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다윗이 누군지를 알아 본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는 그 주인공 다윗이라 보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낌새 챈 다윗에게는 국경을 넘어 도망할 때보더 더한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가 보는 앞에서 미치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다. 이런 광경을 몹시 언짢게 여긴 가드 왕 아기스는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며 크게 화를 내었다. 


실로 다윗은 하루 하루, 매 순간마다 그의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연속이요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그런 착잡하고 민망하고 두렵고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난 후의 다윗인데 어떻게 이렇게 침착한 시편의 고백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된다. 실로 다윗은 하나님께 매 순간 기름 부으심을 받던 은혜의 사람, 성신의 사람,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시편 34편은 “지혜의 찬양시”로 구분된다. 특히니 22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어순을 따라 22구절의 ‘답관체’로 쓰여진 정해진 문장 형식 속에 가히 상상 할 수 없는 심오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항상 그의 이름을 높이면’이라고 정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강조가 시편 34편의 전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죽음의 위기를 겪은 다윗이지만 자신이 겪은 고난의 경험을 마음 속 깊게 다스리며 이런 심오한 교훈의 시편을 고백하고 있다. 시편의 시작인 1-3절에는 주관적인 자기 신앙을 표현하면서 온 백성들이 자신과 같이 다 함께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고 기뻐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자고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3절에 보면 ‘나와 함께’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고 높이는 일은 너무나도 귀하고 누구에게나 권면해야만 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1절에거 ‘항상’이란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 드릴 때에만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밤이든 낮이든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언제 어디서는 하나님을 항상 송축하고 항상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 이런 은혜의 체험과 일상 가운데 살아가며 매 순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 내던 다윗은 온 민족, 온 백성을 향하여 이러한 찬양과 경배의 생활을 더불어 함께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3절에서 대하듯이“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라고 말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나. 

 


간구하면 응답하신다.

다윗은 체험의 사람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절절하게 경험한 생동감이 넘치는 은혜의 사람이다. 그래서 찬양하고, 그래서 송축하고, 그래서 여호와를 자랑하고, 그래서 여호와는 광대하시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라고 하였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요 응답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계속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도망자로 살던 중에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때문이다. 


오늘 날의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나는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다.” 이렇게 쉽게 말 할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나. 그 동안 무슨 기도를 드려 왔나. 요즘은 무슨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고 있다. 


기도가 무엇인가. 4절의 ‘간구’(懇求)라는 표현을 다윗은 10절에서는‘여호와를 찾았다’, 6절과 15절과 17절에서는 ‘부르짖었다’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평소에야 일상적인 기도를 드리지만 정작 위기와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와 도전 앞에서는 부르짖고 절규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지금 내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기도문을 썼다 지웠다 하면 예배 시간 대표 기도문 다듬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이가 어디 있겠나. 기도의 사람인 다윗은 그가 부르짖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들어 주셨다고 자기 체험을 말하고 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6절) 이 것이 실감나는 표현이다. 지금 이러한 시편을 역사 속에 남길 때의 다윗은 화려한 왕의 옷을 입고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긴 소년 다윗은 임금 사울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사울 왕은 다윗을 정적으로 여겼다. 어느 순간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죽여 없애야 자신의 왕의 입지가 안정 될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다윗은 사울 왕의 곁을 떠나서 엔게디 광야에서 피신하는 세월을 버티며 지내야 했다. 그렇게 지내다가 광야의 이슬처럼 역사 속에 잊혀져 갈 지도 모르는 운명의 사람이 다윗이었다. 그런 다윗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식지 않는 하나님 신앙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이었다. 이는 마치도 창세기의 요셉이 그러하였고, 출애굽기의 모세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다. 여기 ‘곤고한 자’란 ‘가난한 자’(poor man)란 뜻이다. 맞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하고 미친 자처럼 침을 흘리며 문에 기대어 몸을 극적 거릴 때의 다윗은 다 해지고 땀 범벅이 된 광야 생활에 지친 거지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의 흐트러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모습과 깎지 못해서 덥수룩한 수염 모습이 곤고한 자요 가난한 자의 행색 그 자체였을 것이다. 실로 다윗은 6절의 그의 고백처럼 ‘곤고한 자, 가난한 자’였다. 그는 한 끼 음식을 어디서 해결해야 할지, 하룻 밤 잠을 어디서 자야 할지 모르며 국경을 넘나드는 자, 도망자의 신세였다. 시편 34편의 배경이 되는 사무엘상 21장 10절을 다시 보면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라고 하였다. 맞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였다. 그런데 그렇게 곤고하고 가난하고 지쳐 있고 두려움 가운데 지내며 부르짖던 다윗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 시편 34편 15절을 보자.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이런 믿음과 기도 응답의 확신과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자.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지 않나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 합니다 내 삶을 다해”라고 말이다.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라는 찬양의 일부이다. 



깊어 가는 가을.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신다.

청년 다윗인데 그의 마음에 꽉찬 생각과 믿음은 너무나도 분명하였다. 비록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환난과 두려움의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죽음과 위기의 순간마다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건지시리라는 분명한 믿음과 기대가 있었다. 


“주를 앙망하면 그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신다.”(5절)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다.”(6절)

“여호와의 천사가 둘러 진치고 건지신다.”(7절)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17절)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절)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절)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신다.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않게 하신다”고 찬양하고 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다른 죄수들의 관례대로 예수의 뼈를 꺾지 아니한 것의 예언적 근거로 인용하는 유명한 본문이다. 


참으로 위협과 두려움과 불안이 계속되는 사고와 사건이 끊임이 없는 세상 중에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살아가자.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 앞에까지 도망가서 피신하려 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과 백성들 앞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더불어 다 함께 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9절에 보면,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말하였다. 11절에서는 온 민족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하나님 신앙을 촉구하고 있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이는 마치도 다윗 자신이 민족의 신앙을 영도하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존경 받는 왕의 모습을 드러내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실로 하나님은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그런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셨다. 다윗은 두려움과 고난이 끊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은 다윗을 정금처럼 빛나게 다듬어 가셨고 진주처럼 영롱하게 만들어 가셨다. 사무엘 하를 읽다보면 사울 왕과 다윗을 비교하는 분명한 문장들을 주목하게 된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


무슨 말씀인가. 사람이 스스로 강성해 질 수 있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스스로 높아지려 하면 바벨탑 사건처럼 되고 만다. 타락한 천사가 마귀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간절히 의지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신다.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의 2절 가사를 보라.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처럼 두려움과 한숨을 떨치고 기도와 찬양 가운데 멀고 험한 인생 길에서 승리하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다윗은 젊어서부터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세상 권력자에게 줄서고 세상 명예만 좇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피하여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8절에 보면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10절에 보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다. 마지막 절인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만이 믿는 자의 피난처이시다. 


놀랍지 않나. 하나님은 도망자 신세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광야의 청년 다윗의 입을 통하여 장차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贖良)의 은혜를 찬양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다윗은 오늘날로부터 삼천년 전의 인물이다. 하나님은 사천년 전인 아브라함 때에도 살아 계셨고 삼천년 전인 다윗 때에도 살아 계셨다. 신약 성경이 시작되는 마태복음 1장 1절이 무엇인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다. 주님으로부터 속량의 은혜, 죄 사함의 은총을 덧입고 항상 여호와의 이름 만을 높이며 살아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복이 있게 하신다. 못 들어 보던 낯 선 용어가 뉴스에 도배를 하고 있다. 화천대유(火天大有), 천화동인(天火同人)이란 말 말이다. 무슨 사자성어인가 했더니 주역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한다. 주역에는 64괘가 있는데 열세번 째와 열네번 째 나오는 괘라고 한다. 화천대유(火天大有)란 “해가 하늘 위에 높이 떠서 만물을 두루 비추어 큰수확을 거두는 모습을 상징”하는 뜻이라고 한다. 천화동인(天火同人)이란 “잘못된 세상을 타파하고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대동세상을 이룬다.”는 목적의 “높은 뜻을 품은 밝은 사람들을 모으는 형상의 괘”라고 한다. 그런데 저들이 세상을 반대로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다. 


만약 재물에 대한 탐심이 권력과 결탁하고 불법과 거짓말을 일삼으면 그 결국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편 1편의 말씀을 제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한다. 시편 1편의 마지막 절인 6절은 분명하게 교훈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다윗은 오늘 시편 34편의 21절에서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사아가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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