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히4:12-16) 2021. 10. 10
개인적으로 히브리서 4장 12절을 암송한지는 무척 오래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말씀 말이다.
1984년에 개척교회 전도사였다. 주일을 지내고 월요일이면 초교파 목회자 10여명이 오전 내내 함께 둘러 앉아 성경 연구를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그 모임은 계속되었다. 기독교 서적을 읽은 후 함께 나누고 성경 연구를 계속하는 모임이었다. 거기서 알게 된 ‘성서 유니온’세미나에 참석해서 일주일 내내 성경 집중 연구에 시간을 쏟은 기억이 새롭다. 거기서 강사로 처음 만난 분이 성서유니온 한국 총무였던 윤종하 선교사이다.
성서유니온선교회는 1867년, 조시아 스파이어스가 이끈 영국의 어린이 선교회로 시작되었다. 본래 이름은 어린이 특별집회 선교회(Children’s Special Service Mission)였다. 1868년 8월에는 영국 북웨일즈 란두드노 해변에서 해변 전도(Beach Mission)가 시작되었다. 휴가를 맞아 해변을 찾았던 조시아 스파이어스가 어린아이들을 모아 놓고 모래 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GOD IS LOVE)”라고 썼다. 그것을 해초, 돌, 조개 껍질로 장식하게 한 후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복음을 전한 것이 시작이다.
1970년대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지만 영적으로는 말씀의 기초가 깊지 못하였다. OMF 배도선 선교사는 이런 한국 교회의 영적 필요를 파악하고, 한국 교회가 ‘매일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2년 성서유니온 동아시아지구 총무 데이빗 찬을 초청했다. 이어서 한국 성서유니온의 초대 총무로 윤종하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성경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설립 정신에 따라, 1973년 1월부터 「매일성경」을 출간하고 지속적으로 성경읽기 사역을 진행해 가고 있다. 첫 출간 4000권이 오늘날은 매달 22만 부를 발행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2007년에 주님 앞으로 돌아간 윤종하 선교사는 한국 성경 연구와 매일 묵상의 원조격인 분이다. ‘QT’라는 단어를 모르던 시절에 ‘QT’운동에 불을 붙인 분이다.
그 때 세미나에서 배운 것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하나 있다.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자”라는 구호였다.
우리나라 6. 25 전쟁 때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미국 군대의 한국 참전에 적극적이었던 이는 33대 헤리 트르먼(Harry S. Truman, 1884-1972) 미국 대통령이다. 부통령이던 그는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3선으로 취임한지 3개월 만에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그리고 재선된 대통령이었다. 그는 은퇴 후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더스에 기념관을 짓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한 번은 행색이 초라한 소년이 기념관을 찾아와서 트루먼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대통령 할아버지는 제 나이 때 어떤 아이였습니까? 항상 1등만 하고 반장만 하셨겠지요?” 트루먼은 그 소년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란다. 나는 형편없었단다.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면 겁이 나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고, 운동도 못해서 늘 따돌림을 당했지. 그래서 이러다가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까 걱정이 많았단다.”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되셨어요?” 트루먼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나를 용기 있게 하고, 강하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쓸모 있게 한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이 나를 강하고, 지혜롭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단다.”
“대통령 할아버지로부터 이런 멋진 이야기를 들은 이 소년은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성경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감사장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분이 데일 로저스((Dale Rogers)이다. 녹음 예술, TV 프로그램 재적, 영화 제작 등으로 큰돈을 번 그녀는 재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아나 정신박약아와 같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려 5,000번 이상이나 자선행사를 열었다. 그때마다 감사장을 받았다. 그녀는 <어려운 때의 하나님>(God in Hard Time)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권한다. “나는 마약에도 빠졌었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었다. 버림받은 인간,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부터 인생이 새로워졌다. 성경 속의 인물은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여러분도 어려울 때 반드시 성경을 읽어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기 바란다.”
하나님은 형편없는 밑바닥 인생도 회복하여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쓰시는 분이시다.
사 복음서 외에 과연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누구신지를 좀 더 제대로 깨달아 알려면 히브리서를 알아야 한다. 물론 사도 바울의 13편의 서신들이 강조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씀하고 예수 안에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길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사 복음서의 예수가 마치도 퍼즐 조각 맞추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듯이 복음의 참가치를 깨닫게 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 알려지지 않은 신약의 유일한 책이다. 히브리서 1장부터 오늘 본문으로 일부를 읽은 4장 13절까지는 히브리서의 전반부인데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소상하게 교훈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며, 모세보다 위대하신 것을 밝히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결코 인간과 같은 죄는 없으시다. 모세를 따르며 출애굽하고 광야로 나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심판을 받았다. 출애굽 세대 중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
불순종의 결과는 고난과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순종의 열매는 안식과 기쁨이다. 히브리서 3~4장은 ‘안식’(安息)에 대한 교훈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안식이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구원의 감격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이다. 신자의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세상에는 눈물, 슬픔, 울부짖음, 아픔, 사망이 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21장의 내용처럼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참 안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 출발은 믿음으로 인한 열매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따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하여 교훈하던 히브리서 기자는 4장 12절에서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가르침을 교훈해 주고 있다. 진정한 안식, 참 안식,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첫 교훈이 히브리서 4장 12절이다.
말씀의 위력을 체험하라.
히브리서 4장 12절을 풀이하면 이런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이 선 그 어떤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뜻을 알아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며 활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부터 그런 위력을 체험하며 생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빛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창조되었다. 우리는 엿새 동안 하나님의 창조를 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존재였다. 그러나 불순종과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서 순간 안식이 사라지게 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참 안식을 다시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는 말씀이 나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활동력’이란 ‘에네르게스’(ἐνεργὴς)인데 그 뜻은 ‘효과적이다. 정열적이다. 힘차다’는 의미이다.
의외로 세상에는 나약하게 사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미신에 빠지고 그래서 무속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요즘처럼 입시 철이 다가오거나 대통령 선거 분위기에 열기가 더해지면 후보들 곁에 오가는 얘기들을 보라. 어디 가서 물어보고, 누구에게 찾아가서 굽신거러며 자신의 장래를 점치려 한다. 무속인의 말에 마음을 빼앗긴다. 왜 그럴까. 인간은 누구나 다 나약하다. 특히 장래사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다. 사람은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유명해 지려 하고, 더 가지려 한다. 그러나 그 끝이 무엇인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찬탈하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이 어떻게 살아가다가 어떻게 생을 마쳤는가.
늘 그런 예를 들지만 “내가 만약에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나이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하고 질문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나. 우린 누구나 그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작가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작가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9-1910)는 그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랑의 가치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나갔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요 활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내 안에 찾아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게 마련이다.
지난 주중에 40살이 넘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변화될 가능성은 “달리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바꾸어 뀌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접했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나. 아내가 남편을 바꿀 수 있나. 남편이 아내를 바꿀 수 있나. 자식이 부모를 바꿀 수 있나. 나이 들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고 자신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자신이 바꿀 수 있나. 전혀 그렇지 않나. 인간은 다 제 잘난 맛에 산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달랐다. 그는 평생 늘 새로운 변화의 삶을 추구하였다. 그는 부모를 일찍 잃고 친척 집을 전전하며 연명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명석하였다. 글도 잘 썼다. 말도 논리적으로 잘했다. 역사는 톨스토이에게 작가, 개혁가, 도덕 사상가, 소설가 등의 호칭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따라 오는 작품 수입을 뒤로하고 농촌에 들어가서 농사하며 지냈다. 스스로 밭을 갈고 온갖 것들을 심고 가꾸었다.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채식을 즐겼다. 불쌍한 이웃들을 돌보는데 관심이 많았다. 그를 만나보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그의 시골 마을에 찾아 들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 그의 하나님 신앙에 의구심을 갖는 질문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해 한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화려하고 유혹이 많은 도시를 떠나서 농촌에 머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씨름을 계속하였다.
시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처럼 기도하며, 사랑하며, 홀로 자신의 주변을 묵상하며 지내자.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이렇게 이어지는 그의 시의 묵상처럼 말이다. 가을이다. 가을은 열매로 대답하는 계절이다. 13절이 그런 내용을 교훈한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할 그분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가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계절이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계절이지 씨앗을 뿌리는 계절이 아니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시며 무화과 열매를 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생활하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각 사람의 영과 혼과 육에 역사하셔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
히브리서는 예수를 ‘큰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NIV 영어 성경에 보니까 “great high priest”라고 하였다. 맞다. 예수는 구약 시대에 접하던 그 많은 대제사장 중의 한 사람이 아니시다. 예수는 히브리서 9장 28절의 내용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큰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내셨다. 예수는 부활 후 사십일을 이 땅에 너무 시다 승천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인생들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도리는 결코 흔들리면 안 된다. 우리는 굳건한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만 한다. 14절 끝의 “굳게 잡을지어다”라는 말씀은 “굳게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법을 많이 알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 법을 잘 지키고 순종할 때에라야만 그 법이 내게 의미가 있지 않나.
마태복음 7장의 산상 수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고 경고하셨다. 믿음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지키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모두 다 될수 있기를 축원한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서 도우시고 은혜 주신다.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스럽고 위엄에 가득 찬 보좌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여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 히브리서 8장 1절이 그런 예수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는 하늘에 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영광스러운 승천 후의 권세를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영광스러움을 보고 이렇게 묘사하였다. 요한 사도는 보고 들었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었다. 큰 음성이 들렸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그래서 주를 믿는 성도인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는 것이다.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실 하나님
나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능력대로 우리들의
간구함을 넘치도록 능히 하실 주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님은 때를 따라 도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 된 우리는 항상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平安)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所望)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기도하면 들으시고, 찾으면 만나 주시는 하나님은 재앙과 절망 대신에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날마다의 믿음 생활이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