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막8:27-38) 2021. 9. 12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일마다 때마다 매사에 언제나 예수의 마음가짐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는 것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것인가>라는 챨스 셀던의 책의 내용처럼 말이다. 그 책의 원제목은 이다. 챨스 셀던 목사는 그가 목회하던 미국 캔사스의 헨리 맥스웰 목사의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형식으로 이 책을 썼다. 레이먼드 교회의 담임 목사인 헨리 맥스웰은 미국의 자녀들을 키우는 가정의 모든 부모들이 원하는 명문대학 출신이다. 소위 엘리트 목사이다. 그가 어느 날 주중에 교회 사무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었더니 너무나 남루한 행색을 한 낯선 이가 자신의 가정 사정을 말하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때에 헨리 맥스웰 목사는 설교 준비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더 이상 그의 긴 이야기를 들어 주려 하지 않고 냉대하여 돌려보냈다.
그 몇 주일 후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헨리 맥스웰 목사는 “그리스도의 시련, 고난, 죽음 그리고 죄 사함인 대속(代贖)”등을 주제로 열변을 토하며 설교하고 있었다. 설교를 마치고 찬송을 부르는 중에 몇 주 전에 자기를 만나고 돌아갔던 그 남루한 행색의 노동자가 예배당 중앙 통로로 걸어 들어오더니 푹 쓰러지고 말았다. 은혜롭고 평온했던 예배 시간의 분위기는 갑자기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예배가 끝나기 전에 예배당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실직한 인쇄공이었다.
병든 아들과 병든 아내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던 실직자였다. 이 교회 저 교회, 이 목사 저 목사,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이 회사 저 회사의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그를 따뜻하게 환대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일자리를 다시 구해 보려 했지만 실업자가 늘어나던 그 당시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 쉽게 일자리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점점 지쳐 가고 허약해져 가던 그는 누구에게서도 따뜻한 위로나 격려를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채 그 날 그 교회의 예배 시간에 예배당 중앙 통로에 쓰러진 채로 죽음의 순간을 맞고 말았다.
책에서는 그 날 그 예배당에서 죽어간 그 인쇄공 출신 노동자의 입을 빌려서 질문한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여러분에게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나는 술에 취한 사람도 아니고 미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어떤 해를 끼치려고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오늘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고 설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 믿음, 사랑 등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절규하듯이 예배하는 회중에게 소리치고 쓰려져 그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헨리 맥스웰 목사와 그 날 그 예배 시간에 참석했던 교인들을 누구나 할 것없이 다 같이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 헨리 맥스웰 목사는 교인들에게 앞으로 일년 동안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질문하고 그 대답을 찾아 나서는 생활을 하자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예배 후에 그 신앙 실천 운동에 동참하기 원하는 교인들로부터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성도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한 인쇄공 노동자의 죽음 이후로 교회와 성도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레이먼드 시의 시민들의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1899년 출판 이후 3,300여만 권이나 팔린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기독교인의 사회 윤리 실천 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실제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 중의 한권이다.
몇 주일 전에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한 바 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영혼의 구원 문제에만 집착해도 문제이고 그 반대로 너무 구제, 복지, 나눔, 돌봄이란 명목으로 사회 구원에만 비중을 두어도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범사에 “예수라면 어떻게 할것인가”를 묻고 그 대답을 매 순간마다 찾고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에 가신 적이 있다. 그 곳의 여러 마을을 방문하셨다. 그 곳의 원 지명은 ‘파니아스’이다. 오늘 날은 ‘바니아스’(baniyas)라고 불린다. 요단강의 수원지인 헐몬산의 남서쪽 자락에 위치한 성읍이다. 주전 20년에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그 지역을 헤롯 왕에게 주었다. 통치권을 위임한 것이다. 헤롯은 그곳에 웅장한 대리석 신전을 세워 황제 아구스도에게 바쳤다. 주전 4년에 헤롯이 죽자 그의 아들 빌립이 대를 이어 그곳의 왕으로 통치하였다. 빌립 왕은 그 성읍을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당시의 황제인 ‘디베료 가이사’와 자기 이름을 붙여서 ‘가이사 빌립보’라는 새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에 읽던 개역 한글 성경에는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했는데 요즘 읽는 개역 개정 성경에는 한결같이 “빌립보 가이사랴”로 고쳐 기록한 것을 보게 된다.
그 지역은 대개가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헬라와 로마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헐몬산 자락의 비옥한 땅에 농사도 잘되고 자연이 아름다웠다. 예수께서 그곳에 가셔서 마을마다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마가복음 8장 22절의 벳세다를 지나서 요단 계곡을 따라서 제자들과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시면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지나시게 된 것이다. 누가복음 9장 18절에 보면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이런 질문을 하신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예수는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와 반응을 질문하였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그리고 12제자에게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가 복음서의 내용 중에 익숙하게 잘 아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마태복음 16장, 마가복음 8장, 누가복음 9장에 골고루 실려 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 아들이시며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 즉 메시아인 것을 분명히 전할 기회를 늘 찾고 있었다. 예수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방문하던 그 당시에 그런 결심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질문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로 이해하느냐 혹은 예수를 어떤 인물로 보고 있느냐의 관심 보다는 12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더 큰 비중을 갖고 있었다.
특히 12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가 예수께 대하여 어떻게 깨닫고 있느냐에 관심이 컸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께 있어서 12제자 중에 제자의 한 사람으로 항상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자.
베드로의 신앙고백.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물으신 예수께 제자들이 전한 내용은 이것이었다.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로 이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태복음 16장 14절에 보면 예레미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보는 시각은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눅9:19)는 정도의 반응이었다.예수는 예수의 오실 길을 예비하며 광야에서 소리 높여 외치던 세례 요한도 아니고 말라기 4장에서 언급된 엘리야도 아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도 아니다.
예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마가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9:20)라고 되어 있다.
자, 그러면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이었나.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내용의 대답을 한 것이다. 여기 ‘그리스도’라는 ‘크리스토스’ ( Χριστοσ)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 מָשִׁיחַ)를 일컫는 말이다. 유대 사회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자란 ‘제사장, 선지자, 왕’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 예수는 제사장 중의 대 제사장으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왕 중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이 땅ㅇ 오신 목적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는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막8:30)고 경고하셨다. 마가복음의 기록자인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베드로는 그의 스승과 같은 인물이다. 아마도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베드로는 매우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의 이 같은 본문에서 소개된 예수께 칭찬받은 내용이나 장차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질 교회의 탄생에 대한 내용들을 과감하게 모두 삭제하였다. 단지 아직 예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함부로 소문을 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신 내용만을 담담히 기록해 두고 있다.
베드로의 항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이신 예수는 이때를 놓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질 장래에 대하여 중대한 교훈을 말씀하셨다. 장차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되고 죽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에 대하여 차근차근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을 선포하는 엄청난 순간이다. 물론 마가복음을 앞뒤로 묵상해 보면 마가복음 2장 20절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라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은유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러나 그 후로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에 일어날 장래의 일들을 이렇게 분명하게 언급하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가복음 9장 31절에 보면 예수는 갈릴리 지역에 가셨을때에 다시 한번 분명하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삼일 후의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는 마가복음 8장 31절과 9장 31절에서 ‘인자’(人子)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의 천하 만민을 죄에서 구원할 그리스도로 보내셨음을 분명히 하신 표현이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 그렇지 않겠나.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각색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라도 살려내는 권능을 덧입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왕으로 등장하셔야 할텐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한 것이다. 여기서 ‘붙들고’라는 이 동작은 자기 맘에 들지 않으니까 상대방을 붙잡아 흔들면서 자기 이야기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동작을 말한다. 당황한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아 밀고 흔들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항변한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이 모두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배드로를 책망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렇게 정한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앞서 인용한 책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작가 찰스 셀던이 질문하는 대로 우리도 수 없이 날마다 이런 질문을 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일이 과연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하고 말이다. 즉 “이 생각가 이 판단과 이 결정과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일인가 아니면 내 욕심을 채우고 내 명예를 높이고 내 이기심을 채우는 일은 아닌가”하고 수 없이 질문하고 그 신앙적인 대답을 찾아가야 만 할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
이날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을 중심으로 예수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만나려고 찾아온 수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런 교훈을 말씀하셨다. 34절에 보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무슨 내용을 가르쳐 주셨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대하며 사는 길이란 말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그 후의 내용은 설명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며 살아가는 길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예수는 세상을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이라고 규정하셨다. 그리고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라야 구원을 이루게 되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람이 천하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질문도 던지셨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다.
죽음이 없는 생명은 없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의 영광이란 없다.
이것이 이날 예수께서 제자와 무리에게 가르치기 원하셨던 교훈의 핵심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 각 사람이 이렇게 예배자로 살고 예수 믿으며 사는데 나중 구원과 영생과 천국 백성의 택하심에서 제외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는 이 교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라”하고 촉구하셨다. 오늘날 나는 어떤가.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럽나. 예수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 부끄럽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나. 예수 믿으며 사업하고, 예수 믿으며 직장 생활하고, 예수 믿으며 누군가를 대하는 것이 부끄럽나.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스러워하자. 예수와 예수의 말씀 안에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충만한 삶을 살아가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답게 살아가는 성숙한 믿음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자.
범사에 주님의 도우심이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