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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 안에서 갇힌 자의 권면(엡4:1-16)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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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8-09 22:55 조회 7,234 댓글 0
 

주 안에서 갇힌 자의 권면(엡4:1-16)         2021. 8. 1



에베소서 2-3장의 주요한 내용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으로 읽은 4장의 내용은 ‘건강한 교회’를 이룩하려면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서로 간에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에 대하여 교훈하는 실천 사항을 가르치고 있다. 4장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구체적인 성도의 생활 강령은 마지막 장인 6장까지 이어진다. 


그 유명한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말하였다. 교회의 구성원인 나 자신이 가정과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하여 말씀한 내용들이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바울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 환경에서 쓴 편지임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 1절과 4장 1절은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 편지를 썼다는 점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2년, 로마 감옥에 첫 번 투옥 되었을 때에 2년 그리고 나중에 다시 또 로마 감옥에 갇히는 세 차례의 투옥 생활을 해야 했다. 우리가 소위 ‘옥중서신’이라고 말하는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모두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들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슨 연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가. 에베소서 3장 1절에 보면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라고 하였다. 즉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전파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전하는 이유때문에 붙잡혔고 옥에 갇혀 지내야 했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무슨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교회의 소중함과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 각 사람이 어떠한 믿음과 어떠한 생활 태도를 갖고 서로를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부르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을 부르셨다. 요셉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셨다. 그렇지 않나. 12제자를 예수께서 부르셨다.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께 찾아간 것이 아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인데 그들 자신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찾아가서 자신들을 제자로 택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저들 열두 제자에게 일일이 한 사람씩 찾아 가셔서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다. 사울의 이름은 사도행전 8장 1절에 처음 등장한다. 그때의 사울은 집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던 엄격한 바리새파 율법주의자였다. 사울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던 이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자였다. 그런 그를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셨다. 강한 빛이 하늘에서 사울에게 비취이자 사울은 땅에 엎드려졌다. 그 때에 그를 부르시는 소리가 있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앞을 못 보게 된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하고 질문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해 주셨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부르심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교회와 성도됨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부르심, 교회의 지체로서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하다가 내가 예수 사랑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나”하는 의구심을 가지면 안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지난 주일에 묵상한 에베소서 3장의 말씀처럼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질 수가 없다. 그렇지 않나. 이 교회에 잠시 넘석거리고 아니면 저 교회에 가서 잠시 넘석거리고 하며 봄바람에 수양버들 가지 흔들리듯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면서 어느 한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 된 이들을 보았나. 그런 경우란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일편단심으로 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우여곡절을 굳굳하게 이겨내며 참아낸 이들이 교회의 일꾼이요 주의 일꾼이 되는 법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이 분명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속한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분명하게 할 때에 주님이 그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그의 범사를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다. 


늘 비교하여 묵상하지만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베드로도 부름받은 제자이고 가롯유다도 부름 받은 예수의 제자였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기독교 역사, 사도행전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가롯유다는 교회 역사에 불행한 오점을 남긴 아겔다마 즉 피밭에서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오고 피를 쏟고 죽은 자가 되었는가. 사도행전 1-2장이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는 매우 중요한 장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 18절과 19절은 괄호 안에 닫혀 있는 내용을 삽입해 놓았다. 거기에는 말로 옮기기에도 마음이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 왜인가. 가롯 유다의 비참한 마지막 죽음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참담한 죽음, 비참한 죽음을 택하겠는가. 그러나 가롯유다는 사탄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자신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량에 팔아 버렸다. 그는 뻔뻔하게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의 맞은편에 앉아서 예수와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그 시간 이전에 이미 가롯 유다는 마귀의 꼬임에 빠져서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 버린 상태였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까지 말씀하셨지만 가롯 유다는 제자로의 거룩한 부르심을 지키지 못하였다. 가롯 유다는 그 유월절 만찬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새벽에 칼과 몽치를 든 대제사장들의 맨 앞에 서서 예수께 입 맞추고 예수를 팔아넘겼다. 


1절의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는 교훈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 각 사람이 거의 다 가정의 답답한 환경에서 영상으로 예배드리고 있지만 나 자신을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처신하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삶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하나님 편도 아니고 세상 편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박쥐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이것이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이다. 베드로는 달랐다. 베드로에게도 신앙의 위기는 여러 번 찾아 왔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때마다 그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을 점점 더 분명하게 해 갔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통해서 초대 교회 시대에 성령 충만한 부활 복음의 전도자가 되게 하셨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이 돈을 모으고 재물을 모으고 주식을 사 모은들 카카오의 김범수 회장만큼 거부가 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하면 국민들이 여러분에게 몇 표나 주겠는가. 여러분이 노래와 춤을 배운다고 방탄소년단처럼 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지금부터 양궁 연습을 한들 20살 청년 안산이나 17살 청소년 김제덕처럼 할 수 있겠는가. 못 한다. 안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각 분야에서 열심과 성심을 다하여 살아가야 하지만 그런 정도의 세상적인 목표 앞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려고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부르심을 받은 일”이란 교회의 지체로서의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의 부르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교회 문밖에 나가면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한 주간씩 분주한 날마다의 일상을 살아간다. 직업도 다르고 업종도 다르다. 수입도 다르고 역량도 다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세상의 직업이나 어떤 분야에서의 경제적인 여건의 부르심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주 안에 갇혀 지내는 옥중의 바울처럼 나 자신을 향하신 믿음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 부르심이 어떠하냐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그 부르심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나를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을 깨달았다면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 겸손함으로, 온유함으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여야 한다. <새번역성경>은 2절을“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라고 쉽게 번역해 주었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니까 “언제나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교훈하셨다. 헬라 사람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겸손을 노예가 주인에게 굽신거리는 모습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비우시고 복종하셔서 인류를 섬기셨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추고 상대방을 귀하게 대하는 자세를 말한다. 


‘온유’란 “친절하고 너그럽고 온화하고 정중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그러므로 온유하다는 것은 남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섬기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우리가 아는 바울은 거칠고 사납고 혈기가 등등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의 마음을 본받는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사도가 되었다. 그는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히 거론하고 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하였다. 여기 “유순, 온유, 관용” 이런 덕목들은 원래 변화 받기 이전에 사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사납고 거칠고 과격하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사울이 유순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정도의 성숙한 은혜의 사도로 살아갔다. 


그렇지 않나.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그 만큼 오래 믿었으면서도 화낼 것 다 내고, 신경질 부릴 것 다 부리고 “난 그래도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하고 떠들어 댄다면 누가 나를 좋게 보겠는가. 남들 무시하고 깔보고 함부로 대하고 잘 난체하고 교만 떨고 그러면 누가 나를 좋아하겠나. 더군다나 주님이 나의 그런 다듬어지지 못한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귀하게 여기시겠는가. 


‘오래 참음’이란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마음가짐이다. 상대방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이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지 않나. 겸손하게, 온유하게, 너그럽게, 오래 음으로,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용납한다면 천국이 따로 있겠나. 가족들 사이에, 내외지간에, 고부간에, 동서지간에, 형제자매 간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 집안이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하겠나. 


목회자와 성도 간에, 성도와 성도 간에 이런 모습, 이런 태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그 교회야말로 얼마나 화목하고 행복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내가 앞장서서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 가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늘 본문의 3절 이하에서는 가장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한 단어가 있다. ‘하나’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유일신이란 뜻이다. 신명기 6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 내용을 분명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고 하였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란 말이다. 많은 신들인 다신(多神)이나 여러 신들인 잡신(雜神) 중의 하나가 아니란 말이다. 다신 신앙이나 잡신 신앙은 모두가 다 우상 숭배이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즉 유일한 여호와시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신 것을 몰랐다. 알고 보니, 깨닫고 보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한 분이신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부터 사도 바울은 이방에 부활 복음을 전하는 담대하고 성령 충만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나. 3절에서 교훈하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이 무엇인가.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시기를 받고 배척을 받았다. 저들을 예수를 죽어 없애려고 늘 음모를 꾸몄다. 드디어 어느 해엔가는 예수를 붙잡아 심문하고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세워서 사형언도를 받게 하였다. 그 날 아침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역대 대 제사장들은 그 해의 대 제사장 가야바를 앞장 세워서 예수를 골고다 언덕 꼭대기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시켜 죽였다. 


예수만 죽여 없애면 역사가 바뀔 줄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자기들의 세상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나. 하나님은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를 바꾸는 시작이 되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시체를 누군가가 무덤 속에서 훔쳐 갔다”고 헛 소문을 퍼트려 보려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사실은 그렇게 한다고 덮어지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다. 11제자가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강림은 역사를 더욱 더 새롭게 바꾸어 갔다.


성령의 강림은 마치도 끌 수 없는 들불처럼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그 복음이 115년 전인 1906년에 강화도 시골 마을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마을에서 5대째 복음이 이어져 가던 여건에서 태어난 섬마을 시골 아이가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이다. 복음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내가 어쩌다가 지(池) 목사와 인연을 가졌는가. 우리 가족이 어쩌다가 예수 사랑교회와 인연이 되었는가. 더 이상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의 계획으로 하는 일도 아니다. 이제는 매사에 범사에 크고 작은 대소사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물을 줄 알아야 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의심 없이 예절 있게 서로를 겸손으로, 온유함으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으로, 너그럽게 대하며 서로의 관계를 주님 대하듯이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스데반의 죽음을 바라보던 사울의 모습처럼 어리석고 사나운 모습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동안도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 가운데 하나되게 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됨으로 설명해 주었다. “몸, 성령, 부르심,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되게 하셔서 깨닫게 하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가.


7절의 말씀 그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는 말씀의 교훈이 절절히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은 8절 말씀대로 우리 각 사람을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 

그 이유와 목적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13절의 말씀대로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각기 다른 직분을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서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 가시려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이란 없다. 

그리함으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나이 값을 해야 한다. 성인 아동으로 유치하고 미숙하게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된다. 이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의 그 어떤 속임수나 그 어떤 간사한 유혹에 빠져들면 안된다. 그 어떤 거짓된 교훈의 풍조에 귀가 얇아져서 바람에 밀려 다니듯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 안된다. 


오직 복음의 진리 안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든든한 건물로 견고하게 세워져 가야 한다. 한번은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유럽 서부의 포르투칼 해변의 산악지대 포도 농장을 소개하는 다큐물을 보았다. 60도 경사의 깎아지른 비탈진 산 언덕을 일일이 개간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대서양의 바람과 작열하는 태양 볕을 받은 포도나무마다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열렸다. 포도 농장 주인이 설명해 주었다. 눈에 보이는 포도 넝쿨은 키 높이가 불과 사람 키 정도도 안 되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의 뿌리는 땅 속 깊이 20m 정도씩이나 깊게 깊게 뿌리 내렸다고 했다. 보기에는 바위 투성이의 열악한 여건의 악조건이었다. 그러나 포도나무 한 그루 하 그루마다 그 뿌리를 땅속 깊게 깊게 뿌리 내리고 세계적인 최고 수준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을 보았다. 


계속되는 코로나 19의 답답한 환경은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오히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주님의 명령대로 세워나가는 기회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요즘처럼 자유롭게 예배당에 모여 예배할 수 없는 때일수록 부르심을 더욱 분명하게 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성령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 되게 하신 그 부르심을 분명하게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 버려야 할 것이다. 

15절 이하의 말씀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든든한 교회의 주역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15-16절을 <공동번역성경>으로 대하면 이런 내용이다.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 면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하여야 합니다.

우리 몸은 각 마디가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사랑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이런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 든든하게 세워져 가야만 할 것이다. 

수 많은 영혼을 구원해 내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 세워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은혜가 날마다 달마다 계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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