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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롬8:12-17) 20210530 삼위일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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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6-26 15:31 조회 7,381 댓글 0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롬8:12-17)         2021. 5. 30 삼위일체주일


교회는 성령강림주일을 지낸 그 다음 주일인 오늘을‘삼위일체주일’로 지킨다. 성경에 ‘삼위일체’란 표현은 없다. 구약성경인 신명기 6장 4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떠한 분이신지를 하나님 자신이 선포하신 성경 말씀 중의 하나이다.


신약성경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 28:19)라는 선교대위임명령에서 천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보냄 받은 성령님에대하여 구분한 말씀을 접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마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라는 축복의 말씀을 남겼다. 어느 신학자는 삼위일체를 “세분스러운 한분, 한분스러운 세분”이라고 재미있게 해석해 주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의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요단강물에서 나올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서 예수 위에 임하였다. 그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오늘 묵상할 로마서 8장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분하는 표현들이 계속되고 있다. 로마서의 꽃과 같은 8장의 전체 내용은 육신을 따르는 자와 성령을 따르는 자의 삶을 구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 중의 한 곳인 지난 주에 묵상한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열매에 관한 교훈이 그러하였듯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일관된 주제의 교훈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활동하셨다. 육신은 온갖 욕망을 갖고 있다. 먹고 싶은 식욕, 자고 싶은 수면욕, 이성을 향하는 성욕, 물질 소유에 대한 탐욕 등등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죄가 없으시다. 예수는 육신의 욕구대로 시신 분이 아니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에서 이렇게 편지로 가르쳐 주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의 교훈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을 믿는 자 안에 거하여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깨우쳐 주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구주로 영접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둠을 이기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고, 예수의 부활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외의 모든 대제사장 문중이 나선 재판자리에서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란 없다”(행4:12)고 힘있게 반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맞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의 가사처럼 “나의 죄를 씻기고, 나를 정케하고, 나의 죄를 속하고, 나에게 평안과 소망을 주고, 내가 영원히 찬미할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다. 나를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은총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로마서 8장 12절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총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은 성도라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라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것이 아니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13절의 교훈이 무엇인가.

너희가 육신의 요구를 따라서 살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산다.


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14절에 보니까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고 정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 그대로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누구의 아들딸로 태어나느냐, 누구의 아들딸로 자라나느냐는 태생적 환경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태어났는데 엄마아빠가 집도 없이 사는 노숙자였다. 내 생명이 노숙인인 아빠와 노숙인인 엄마를 통해서 지하철 화장실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이 나의 탄생의 운명이다. 반대로 내가 왕궁에서 왕의 아들인 왕자로 왕의 딸인 공주로 태어났다면 그것이 나의 탄생의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은혜이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이신 마리아를 통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비천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통해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지금 미얀마란 나라는 민주화를 향하여 엄청난 내홍을 겪고 있다. 마치도 우리나라의 4. 19때나 1980년대 민주 항쟁 때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미얀마의 북서부에 자리잡고 살아 온 로힝야 족은 100만명이 넘는다. 원래는 200여만명이었다. 미얀마 군사 정부는 저들을 개돼지 이하로 취급한다. 대량 학살을 불사한다. 종족 말살, 종족 대 학살을 감행한다. 이미 40여만명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흩어졌다. 난민으로 살아간다. 대부분인 이슬람 신앙을 가진 무슬림들이다. 생각하여 보라. 태어나 보니 로힝야 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환경적으로 핍박과 학대와 살상이 이어진다.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대답이 없다. 미얀마의 장기 독재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로힝야 족과 미얀마의 모든백성들에게 민주화의 봄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내정 불간섭 운운하며 그 어떤 외부의 개입도 막아서려는 저들 가운데 모세같은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요즘 접하고 있는 출애굽기의 배경이 그러하지 않나. 200여만명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 중이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430년간 이어졌다. 그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이 여호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호렙산 떨기나무가 불 붙는 듯한 환상 가운데서 부르셨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된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렇게 광야로 불러낸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 관계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언약 관계이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며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도 없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란 존재가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차라리 없으면 좋을 것 같은 존재로 기억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섬기고 경배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가사처러“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는 찬양을 부른다.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아버지

주는 내 맘을 고치시고 볼 수 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영혼 새롭게 세우시네 


초등학교 시험 문제 중에“길에서 소리 지르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떠들며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것을 네 글자로 무어라고 하는가”하는 문제가 있었다. (고성방가)(高聲放歌)인데 앞의 세 칸은 비워 두고 마지막 한 칸에만 ‘가’자를 미리 채워 넣어 놓아서 앞의 빈칸 세자만 채우면 되는 문제였다. 어떤 학생이 답을 채워 넣었다. (아빠인가)


우리가 믿고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나님을 나의 삶의 아버지로, 내 영혼의 아버지로 영접하고 모셔드리고 살아 보라. 놀라운 삶이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양자(養子).

15절에 보면 ‘종의 영’, ‘양자의 영’이란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일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로마서 8장 5절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하였다. 6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에베소서 2장 3절의 말씀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베푸셔서 아들딸이되는 자녀의 권세를 선물해 주신 것이다. 


사회적인 신분이 문제가 아니다. 마태복음 3장 7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심하게 일갈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와 불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맞다. 신앙생활은 성령 세례를 받고, 불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養子)됨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양자로 받아 주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복인가. 우리는 죄와 악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들여진 것이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둘째 아들에 관한 비유의 교훈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반기면서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라고 반겨 주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백번 천번 만 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감격이며 영원한 복인가. 


20년 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벤살렘교회를 목회하며 유학 생활하던 때에 우연히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찬양을 처음으로 들었다. 수 없이 따라 부르며 은혜를 사모했던 기억이 새롭다. 다 같이 부르자. 






우리는 다 집 떠난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이었다. 세상에서 주색잡기를 즐기며 허랑방탕하게 살던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혜와 은총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 이 구원의 감격, 이 영생의 약속, 이 자녀됨의 권세 즉 양자됨의 은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운 복이며 큰 복이며 영원한 복이며 비교할 수 없는 복인 것이다. 



상속자(相續者).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는 관계의 시작이다. 우리가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면 남의 집 냉장고를 내 맘대로 못연다. 그러나 아들딸은 하루에 열 번 백번 얼마든지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어머니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나의 소유이다.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나이 많고 늙은종 엘리에셀이 아니다.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다.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상속자이다. 상속자의 영광은 그런 것이다. 


오늘 날 성도된 우리들이 누리는 상속자의 영광이란 부활을 상속받고 구원을 상속받고 영생을 상속받는 것이다. 


2021년 초의 큰 뉴스는 삼성가의 이건희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게 된 상속에 관한 내용이었다. 26조가 상속되었다. 상속세만 12조가 넘는다. 상속된 것들 중에서는 세계적인 미술품들이 즐비하다. 국립 박물관과 각 곳의 미술관에 기증 되는 작품의 수가 23,000점에 이른다. 미술품의 가치만도 3조가 넘는다고 전해졌다. 


우리는 산업 발전을 이룬 삼성가의 이야기만 들어도 놀라워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로 살아가는 자녀의 권세,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 아버지를‘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는 영원한 영광은 그런 정도의 숫자나 액수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세계가 아니다. 


해와 달과 별들과 우주 삼라만상에 가득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라. 하늘과 땅과 바다에 충만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충만하신 충만을 보라. 공중을 나는 새, 땅에 기고 뛰고 달리는 온갖 동물과 짐승들, 물 속의 각종 물고기 떼를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들에 핀 백합화 꽃 한 송이의 영광 만도 못한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이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는 자녀의 권세, 양자의 영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 성령이 친히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상속자의 영광이란 이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이며 영원한 복인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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