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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다른 보혜사(요14:16-24) 20220605 성령강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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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6-09 00:26 조회 5,048 댓글 0
 

다른 보혜사(요14:16-24)            2022. 6. 5성령강림주일

 

16절의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란 예수께서 ‘변호자, 보호자, 돕는자, 위로자, 상담자, 치유자’로서 이 땅에 계셨던 것처럼 예수님과 같은 그 역할을 하실 또 다른 도울 자를 보내 주시겠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곁으로, 부르다’라는 합성어인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보호하고 은혜 주시며 가르치시는 영’이란 뜻을 담고 있다. 

 

성령 강림이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내용대로 일회적으로 그날 그때에 그 현장에서 있었던 역사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령 강림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지속적인 일이다.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면” 기도의 응답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란 “알았다. 안 된다. 기다려라. 다른 것으로 응답하마”(yes, no, wait, alternative) 이 네 가지의 울타리 안에 있다. 그러나 성령은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렇지 않나. 바람이란 것이 공기인데 착한 사람에게만 좋은 공기가 임하고 나쁜 사람에게는 심각한 미세 먼지만 공급되는게 아니지 않나. 하나님은 해와 비를 선인과 악인의 밭에 골고루 비추시고 내리시는 것처럼 이 땅의 천하 만민들이 누구나 다 성령 받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성령을 받아야지 악령을 받으면 되겠나. 지난주 중에 어디를 지나는데 “방금 내린 신. 00 도사. 연락주세요. 010-0000-0000” 라고 쓴 현수막을 보았다. 무당도 ‘강신무(降神巫), 학습무(學習巫), 세습무(世襲巫)’가 있다고 한다. 귀신에 붙잡혀서 무속인으로 살면 되겠나. 사랑하는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길 소원한다.

 

요한복음 14장은 8절의 빌립의 질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신 내용이 15절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을 포함해서 마지막 부분까지에 성령 받아야 할 것과 성령이 임하고 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교훈해 주신 내용이 담겨 있다. 자, 그러면 예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이 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함께 묵상하도록 하자. 

 

영원토록 함께 있는 영.

하나님은 영원하신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 안에서 영존하신다.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되면 이 땅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열한 제자에게 남기신 말씀 중에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 중에 늘 예수라는 이름만을 즐겨 사용하지만 사실은 ‘임마누엘’이란 또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을 안다. 임마누엘(Ἐμμανουήλ)이란 ‘임(with), 마누(us), 엘(God)’의 합성어이다.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하였다. 예수는 이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사야 8장 8절에 보면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이사야서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것처럼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며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생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요한복음 14장 16절의 말씀처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처럼 성령님과 더불어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며 살아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된 활동을 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셨다. 때로 이 고을과 저 고을을 방문하셨다. 각 마을의 회당에도 찾아 가셨다. 예수의 날마다의 일과가 사 복음서에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12살 때에 절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지 않으시고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 계신 동안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사흘 동안이나 아들 예수를 찾아 헤메었다. 그처럼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사셨다. 그러나 부활 승천 하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신 이후에 성령과 함께 하는 생활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렇지 않나.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성령은 믿는자의 마음에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질문해 보자. “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는가” 젊음, 건강, 외모, 지식, 인기, 돈, 재물, 권력, 명예 등등 그 어는 것 하나 영원한 것이 있는가.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이라도 영원하지 않다. 세상의 주목을 받던 미모라도 영원하지 않다. 남들의 부러움을 받던 학력과 지식이라도 영원하지 않다. 물론 과학, 의학 분야 등의 연구의 업적이나 학문의 힘이란 그 열매가 후대의 문명 발전에 이바지 하고 남는 것이니 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연구의 실적을 가진 그 누구라도 그 자신의 삶이 이 땅에서 영원하지는 않다. 다 지나간다. 4-5월에 만발했던 화려한 꽃들이 흔적이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아침 햇볕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가.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계시던 분이 임마누엘 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 임재의 약속이 바로 “하나님께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는 영을 보내 주시겠다”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 성령의 능력을 덧 입는다. 성령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나와 늘 함께 영원히 동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 받은 성도의 찬양은 42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란 찬송의 가사처럼 그래야 한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진리의 영.

요한복음 14장 6절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는 말씀을 보라. 맞다. 예수가 곧 길과 진리와 생명 즉 영생이신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 진리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영이시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다. 또한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성도들은 진리의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서 끊임이 없이 내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여야 한다. 그것이 대화이든 간증이든 문자이든 편지이든 복음을 전하는 책자이든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의지하고 힘 입어야만 한다.

 

지난 목요일 새벽 기도 후에 감독, 연회 총무, 13개 지방 서울 연회 감리사 15가정이 45인승 버스를 타고 충남 당진의 동일교회와 전남 광주시의 예향 교회를 중심으로 이틀 동안 먼 거리의 강행군을 하고 돌아 왔다. 우리는 보았다. 우리는 들었다. 진리이신 성령님은 서울에도, 당진에도, 전남 광주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당진 동일교회는 1-6학년이 골고루 섞여서 반 형성을 하다 보니 언니와 동생, 형과 동생 간의 공동체 생활의 큰 유익을 어려서 체득하는 간증을 듣게 되었다. 

 

이천년 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진리의 성령의 임하시면 우리 중에 그 누구라도 각 사람이 다 존귀하게 진리의 성령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각 사람의 직업, 직장, 사업, 삶의 정황이 다 다르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성령 안에서 진리의 성령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각 사람이 계속하여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다 선교사의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만 선교의 사람으로 사는게 아니다. 일상생활 중에서 내 가족이든 자녀이든 일가친척이든 친구이든 그 누구에게든지 사도행전 10장의 백부장 고넬료처럼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계속 감당해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성령 받은 증거이다. 그것이 진리의 성령과 동행하는 모습이다. 17절에 보면 세상은 진리의 성령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17절 후반부의 강조를 보라.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얼마나 귀하고 영원한 약속의 말씀이신가.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시며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함께 거하시는 영원하신 영이시란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진리의 성령님을 의지하고 꾸준히 계속해서 그 누군가에게 복음을 소개하고 전파하고 또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사랑의 영.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랑의 영이신 성령 안에 사는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라고 하셨다.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분리수거제도가 정착되기 까지 초기에 짧지 않은 홍보 기간이 있었다. 안전밸트 매기 의무화도 초기에는 단속만으로 다 되지 않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안전 벨트 매기를 의무화 하는 일이나 분리 수거를 의무화 하는 일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생명을 지키는 일이며, 자연을 보호 하는 일이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첫 발걸음인것처럼 무엇을 지키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23-24절의 교훈이 그러하지 않나. 사람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과 천국 비유의 말씀들을 지켜나가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의 말씀을 지켜 사는 자라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동거동락(同居同樂)을 말씀하지 않나.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이 내 안에, 예수께서 내 안에 영원히 동거동락하시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영원토록 함께 있으리라

너희와 함께 거하시리라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 오리라

세상은 나를 못 보아도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리라

너희가 내 안에서 영원히 살리라

그 날에는 하나님과 예수 안에서 너희가 함께 있는 것을 알리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거처에서 함께 하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나. 24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내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라고 하셨다. 10절 중반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느니라.”라고 하시지 않았나. 그러므로 사랑이신 성령님의 임재와 충만을 의지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26절에 보면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께서 말씀 하신 모든 것이 생각나게 하신다.”라고 하셨다. 27절에 보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다. 더 이상 세상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런 은혜와 평강이 성령 안에서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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