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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하시는 일(롬8:26-39)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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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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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01 12:17 조회 2,852 댓글 0
 

                           성령이 하시는 일(롬8:26-39)               2023. 7. 30

 

 

로마서 8장을 주일마다 세 번째 나누어 묵상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두 주일 동안 로마서 8장 1-25절까지의 내용에서 다양한 주제의 교훈을 나누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정죄 받지 않는다. 

성령은 성령의 임재와 동행과 역사를 믿는 성도를 죄 와 사망에서 해방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한다.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은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입고 참고 기다리므로 보이지 않는 소망을 이루어 가는 자들이다. 

 

남은 분량으로 읽은 오늘 본문의 제목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정하였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懇求)하시는 성령.

26-27절에 보면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존칭을 사용한 것을 관찰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에 존칭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예수님 이렇게 존칭을 부르는 것처럼 성령에 대하여도 성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지난 주일에 부른 찬양 가사 중에 <아버지 사랑합니다> 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 

아버지 채워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경배합니다 

예수님 채워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성령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경배합니다 

성령님 채워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을 동일하게 존칭으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하시는 일 첫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늘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 각 사람의 기도 생활의 부족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시며 친히 간구하시는 영이시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니까 26-27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성령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의 생각을 아십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맞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생각도 아신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은 내가 스스로 기도하는 것이 옳기는 하지만 매 순간 성령님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성령님 나의 형편을 아시지요. 성령님 나의 생각을 아시지요. 성령님 나의 소원을 아시지요. 성령님 나의 약함을 아시지요. 성령님 나의 체질을 아시지요. 성령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의 범사를 헤아려 도와주시고 지켜 주시고 힘과 지혜와 능력이 되어 주시길 간구합니다.”

 

라고 끊임이 없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22절과 26절의 ‘탄식’(歎息)이란 단어가 있다. 영어성경인 NIV에서는‘groan’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음하다, 괴로워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신음하며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라.“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는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이 세상의 만민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영원한 탄식의 기도요 영원한 신음이요 영원하신 부르짖음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할 그 어떤 죄와 흠과 티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짊어지신 것이다. 로마서 8장 34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령님과 예수님은 한결같이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시다. 

 

 

영화(榮化)롭게 하시는 성령.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자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다운 성도의 삶이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마련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다.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자들이다. 

이런 눈으로 로마서 8장을 묵상해 가다 보면 30절의 말씀에 시선이 고정되게 된다. 다 같이 읽어 보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정(豫定) – 미리 정하심/ predestination

소명(召命) – 부르심/ calling

칭의(稱義) – 의롭다 하심/ justification

성화(聖化) - 거룩해져 감 / sanctification

영화(榮化) – 영화롭게 하심/ glorification

 

어느 신학자는 로마서 8장 30절을 가리켜서 “기독교 진리의 황금 사슬(golden chain)” 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도의 삶이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그 시작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예정(豫定)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평생토록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성도가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나중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라고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요한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요한 계시록 19장 9절에 보니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요한 계시록 21장 6-7절에 보니까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도 각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관리를 잘 해야 점점 그 나중이 존귀해지지 않나. 이처럼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세례를 받은 정도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나. 평생토록 점점 성도다운 생각과 말과 삶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야만 택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거쳐서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칭찬 받고 상급 받는 영화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천주교라고 호칭하기도 하는 가톨릭에서는 성인(聖人) 칭호를 사용한다. 교황청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서 기독교 역사의 인물 중에서 성인을 선정한다. 시성식이란 행사도 갖는다. 사료를 찾아보면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는 1984년 5월 6일에 한국 천주교회 전파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했다. 103명이 복자에서 성인의 품위로 오르게 되었다. 성인이 된 유일한 한국인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와 평신도 92명,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으로 주교 3명, 신부 7명이다. 저들은 천주교 한국 선교 초기의 순교자들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는 25살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 당하였다. 천주교를 일찍이 받아들인 김대건의 증조부는 1814년 충남 해미에서 옥에 갇혀 지내다가 순교했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도 순교자이다. 김대건의 아버지는 1839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프랑스 선교사였던 피에르 모방(Pierre P. Maubant, 1803-1839)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23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부제 서품을 받았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다가 붙잡혀 25살이던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로 하면 주기철, 손양원, 유관순, 윤동주 같은 인물이 그런 분들 중에 포함될 것이다.  

 

요한 계시록 20장 4절에 보면,

예수를 증언하며 살아온 이들과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이들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요한 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생존해 있는 인물을 예로 들기가 조심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그의 남은 생애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지 빛낼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여호수아 시대의 아이성 전투 때의 아간의 범죄와 그와 그의 가족이 당한 아골 골짜기에서의 심판을 안다. 우리가 사울 임금의 마지막 모습을 성경에서 자세하게 보아서 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의 마지막을 안다. 우리가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지막을 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시작이 소중하지만 과정은 더욱 더 소중하다. 그 마지막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참으로 소중하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를 세계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뭔가. 토기장이가 토기 그릇 하나를 만들어도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역사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은 그의 수십년 도예가의 혼을 쏟아 붓는 일이다. 

 

지난 주일부터 여름 성경 학교가 시작되었다. 성경학교가 무엇인가.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은 안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라고 하였다.

 

“우리 애들은 성경 한 구절 안 가르쳤어도 다 명문대학 나와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사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로마서 8장 22절과 26절에서 ‘탄식’(歎息)이란 단어를 보았다. 성령님의 탄식, 주님의 탄식 소리가 들려져야 한다. 515장 <눈을 들어 하늘보라> 라는 찬송가 가사에도 있지 않나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 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메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나의 가족과 친척과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탄식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성령님이 탄식하시듯이 나도 탄식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신음하고 안타까워 하며 괴로운 심정을 갖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신앙 생활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각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그런 중보자의 삶을 이어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장차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성령.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 사탄은 끊임이 없이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를 고발하려 하고 정죄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그 어떤 것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으셨으나”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늘 간구하신다. 

 

37절을 보라.“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도는 간신히 이기는 자들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확신 말이다. 그렇다. 성도는 이런 확신과 믿음 속에서 살아가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렇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각이나 이념이나 철학의 울타리 안에서 말 장난과 언어의 유희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다.”십자의 사랑이요 부활의 사랑이요 승천하신 사랑이요 성령님을 보내 주신 사랑이다. 그 성령님 안에서 성도는 나 자신과 내 안에 시시 때때로 일어나는 죄악의 욕망과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 사랑의 마음과 마음이 담겨 불려진 찬양이 “we shall overcome”이란 찬양이다. 편견과 불의에 맞선 싸움 현장에서 언제나 불리고 또 불리어질 노래가 ‘We shall overcome’이다. 우리는 이 찬양을 한국말로 번역하여 부르고 있다. “우리 승리하리”라는 찬양으로 말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성도의 삶인가

 

인도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마더 테레사(Theresa, 1910-1997)의 기도문 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제목의 기도문은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 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루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의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성령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나날과 평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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