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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받으신 예수(마4:1-11) 202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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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2-27 22:01 조회 3,962 댓글 0
 

                              시험 받으신 예수(마4:1-11)            2023. 2. 26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내 하와와 함께 에덴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고린도전서 14장 45절에 보면 에덴의 아담을 ‘첫 아담’이라고 했고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살려주는 영’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차례차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대적하여 넉넉히 이기셨다. 

 

성경이 말하는 시험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서 시험하시는 시험이다. 영어로는‘test’라고 한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이 그 한 가지이다.

 

또 하나의 시험은 마귀가 인간을 시험하는 시험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한 시험이 그런 경우이다. ‘temptation’이다. 마귀가 나서서 하나님의 백성을 죄의 유혹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시험이 마귀의 시험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에 의한 시험이 ‘시련’이라면 마귀에 의한 시험은 ‘유혹’인 것이다. 유명 배우인 유아인이 지난 일년 동안 마약류로 구분되는 프로포폴을 무려 73회 투약한 사실이 어느 방송사에서 추적 조사한 결과 밝혀졌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유명 배우 유아인이 마약 복용의 유혹에 빠져 버린 사건이다. 

 

학생이 학교의 교실에서 받아 든 시험 문제를 잘 답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 드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을 시험하실 때에 그 시험을 넉넉히 통과햐는 것은 복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학생이 교실 밖에서 음주, 흡연, 마약, 절도, 강도, 도를 넘는 이성 교제 등등의 유혹을 피하고 그 미혹을 극복하지 못하면 해맑게 성장해야 하는 10대 청소년이라도 큰 불행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어른이나 청년이나 어린이나 그 누구든지 시험을 잘 이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때는 언제이며, 시험을 받으신 장소는 어디인가.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 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여기, 광야란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변의 여리고 산지를 일컫는다. 여러 해 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에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요단 강 가까이 가 보았다. 사십일간 금식하신 여리고의 광야 지대에 있는 산지도 멀리서 바라다 보았다. 그야말로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광야였다. 

 

우리는 대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에 주목하지만 사실은‘성령에게 이끌리어’라는 대목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에덴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있는 것이 마귀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의 시험 이전에 성령에 이끌리고 계셨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 위에 임하였다.”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셨다. 누가복음 3장 16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예수는 성령과 불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였다. 

 

생각해 보라. 예수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신데 감히 그 어떤 상대가 예수를 시험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능력과 권세는 곧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능력과 권세이신데 감히 이 세상의 그 어떤 영적 존재가 예수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지혜와 분별력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분별력 그 자체이신데 감히 그 어떤 영적 상대가 예수를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신 예수를 마귀는 시험하고 또 시험하려고 달려 들었다.

 

1절에서 말하는 ‘마귀’란 ‘디아볼로스’라고 한다. 그 뜻은 ‘중상, 비방, 의심, 이간질 하는 자’이다. 마귀의 다른 이름은 ‘사탄’인데 그 뜻은 ‘공격하고 대적한다’는 뜻이다. 디아볼로스가 마귀의 역할이라면 사탄은 마귀의 신분을 설명한 단어이다. 

 

자, 그러면 여리고 산허리의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께 나타난 마귀의 시험을 차례대로 관찰하면서 그 교훈을 통해서 유익을 얻도록 하자.

 

 

첫째 시험 –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2절에 보면 “사십일 밤낮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는 못 먹으면 배가 고프고, 못 자면 졸리고, 못 쉬면 고단하고 피곤하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인 육체를 갖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십일 밤낮을 금식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체력의 극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마귀가 맛있는 죽을 끓여 오거나 좋은 보호식을 꾸려 가지고 와서 대접한 것이 아니다. 빈손으로 찾아와서 예수를 시험하는 말을 걸었다. 그게 마귀의 속성이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이게 무슨 말인가. 마태복음 3장 17절에 보면 불과 사십일 전에 하나님이 예수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냐”하고 ㅅ시비를 걸어 왔으니 얼마나 불경스러운 장면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는 예수 자신도 분명하게 알고 예수를 시험하려고 달려드는 마귀도 안다. 그러면 왜 예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일까.

 

예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프고 지쳐 있다. 물론 따뜻하고 속에 편안한 보호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런데 마귀는 ‘돌로 떡 덩이를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하였다. 예수는 필요하시면 직접 하나님을 향하여 떡을 요구하실 수도 있다. 생각하여 보라. 모세 때에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과 만나를 공급한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물차를 보내셨나. 하나님이 제빵 공장의 트럭을 동원하셨나. 아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고 언제든지 하실 수 있다. 그릿 시냇가의 로뎀 나무 아래에 지쳐 누워 있던 엘리야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시고 까마귀를 동원하여 먹을 떡을 공급하신 하나님이신데 뭔들 못하시겠는가.

 

그렇지 않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신데 하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 밤낮을 금식하신 예수를 버려 두시겠는가. 그런데 마귀란 자는 고작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명하라’라고 시험하였다.

우리는 나중 베세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던 그 많은 광야의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도 오히려 부스러기를 거두었을 때에 열 두 광주리나 되게 하셨던 기적의 장면을 안다. 

그런 예수께서 무엇이 부족하고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며 왜 마귀를 상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마귀는 사십일을 금식한 후에 예수 곁에 찾아 와서 이런 말을 쏟아 놓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삼일 금식, 일주일 금식 혹은 사십일 금식을 마치고 나면 만사가 형통하고 매사가 술술 풀려나갈 것 같은 충동이 있는가. 금식을 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금식했다면 며칠을 금식했느냐의 차이 문제도 아니다. 마귀란 존재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령 충만한 예수께까지도 찾아가서 시험하려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침입해 들어가면 감염자가 되고 마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 마귀가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네가 만일 목사(장로, 권사, 집사, 속장, 교사, 성가대원, 새벽 기도 대장)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우리 믿음 생활하는 각 사람에게 접근하고 시험하려 할 것이다. 

 

예수는 마귀의 이런 시험을 따를 이유가 하등 없는 분이시다. 사십일을 금식하시고 주리신 예수께 마귀가 말을 걸듯이 떡이 필요하냐 빵이 필요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는 그런 문제를 갖고 사십일간 금식하신 것이 아니셨다.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신 예수께 왜 금식이 필요하였겠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 무슨 금식이나 철야가 필요하였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는 사십일간의 금식을 통해서 인간의 육체의 연약함의 극한 상황을 경험하셨다. 예수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연약한 인생들과 하나가 되신 것이다. 그러나 마귀라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시험할 수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향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셨다. 그렇다. 신앙 생활이란 말씀생활이다. 우리 몸이 무언가를 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요즘은 ‘에너지 음식, 에너지 음료’가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성경 쓰기 대신에 날마다 일정한 분량의 성경을 읽고 관찰해서 문제에 답을 쓰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주보에 삽지하지 않은 이유는 참여 하지 않는 이에게는 종이 낭비이기 때문에 예배당 뒤에 비치해 두었다. 관심이 있으면 각자 챙겨다가 날마다 몇 장씩의 성경 말씀을 잘 읽고 영의 양식을 삼으며 답을 써나가자. 이런 일들이 계속 쌓여서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도 어쩌다 오고, 주중에는 성경을 멀리하고 기도는 식사하기 전에 30초쯤하는 것으로 전부인 하루하루를 산다면 그 정도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너무나도 많지 않겠는가.

 

논어에 있는 글 중에“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이라는 교훈이 있다. 응칠 안중근의 글씨체로 세상에 잘 알려진 글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본의 주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몇 장의 유묵을 쓴 것 중의 하나이다. 글을 쓴 마지막에 자신의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 후에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초대 일본 통감이다. 안중근은 그를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방문 길에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엉겅퀴와 가시나무가 자랄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사십일간 금식하신 예수께서 마귀를 그렇게 물리치셨다. 떡이냐 빵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멋지게 마귀를 대적하셨다. 성도의 삶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마귀의 속삭임처럼 먹는 문제로 인하여 시험에 빠지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 경건함을 지켜가야만 할 것이다. 

 

 

둘째 시험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 육체적인 한계를 시험하는 시험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은 명예에 대한 시험이며 정신적인 시험일 수 있다. 5절과 8절에 보면 마귀가 예수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우린 쉽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 왜 마귀가 가자고 하는 곳에 어린아이를 유괴범이 데리고 가듯이 그런 곳에 가셨을까”

 

그러나 우리는 성전 꼭대기나 지극히 높은 산 위에 함께 갔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마귀를 상대하는 예수의 태도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이 천사들을 명해서 천사들의 손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예수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유혹했다. 하나님이 균형을 잘 잡도록 하고 새처럼 사뿐히 땅에 착지하게 하실 것이니 한 번 멋진 장면을 연출해 보여 달라고 시험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험이 예수의 귀에 들릴리 만무하였다.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 예수를 세운 마귀의 말이 무언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여기 보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시험을 다시 반복하려 달려 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마귀는 예수께 시험하던 이런 방법을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계속하여 사용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도 은근히 명예심이 있고 자기를 드러내서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인정받고 인기를 누리고 싶은 유혹과 충동이 언제나 스멀스멀 찾아 들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날마다의 말씀 묵상의 힘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셨다. 돌들로 떵 덩이를 만들라는 시험을 신명기 8장 3절로 물리치신 예수는 두 번째 시험은 신명기 8장 16절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사실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 서신 예수를 향해서 시편 91편 11-12절의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시험하려고 달려 들었다. 이게 무슨 장면인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 꽤나 한다는 이들에게 이단과 사이비가 달려들어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시험하려고 한다. 내게도 매달마다 손 편지로 자기 주소를 써서 이만희 강좌를 배우러 오라고 편지하는 신천지 아류가 있다. 개봉하지도 않고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런 이들을 상대해 봐야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예수께서 사십일 금식 후에 마귀에게 당하신 세 가지 시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가령 마태복음 16장 1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하고 대답하신 후에 그들 곁을 떠나 가셨다. 상대하려 하지 않으셨단 말이다. 

 

우리는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세상 중에서 얼마나 다양한 명예욕에 대한 시험과 유혹을 경험하게 되는가. 죄 없으신 예수께서 그처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셔야 했다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히브리서 4장 16절은 불 같은 시험이 계속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격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양 시험을 분별하고 이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라고 선언하였다. 마귀가 아무리 성도를 대적하고 고발하고 정죄하려고 달려 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 뿐>3절에 보면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라고 찬송하고 있다. 이런 은혜와 권능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넉넉히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셋째 시험 –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첫째 시험과 둘째 시험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시험이라면 셋째 시험은 영적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이시다. 예수는 창조 이전에 하나님 안에 계시던 하나님의 본체시다. 그런 예수께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렇지 않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께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권능과 지혜와 영광이 똑 같은 충만으로 충만한 상태이셨다.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라나고 세례 받고 사십일 금식하신 것이다. 예수는 성령의 충만을 벗어나신 적이 일 순간도 없으시다. 예수는 요한 계시록 7장 12절의 모든 천사의 경배 찬송 가사처럼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그 자체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그 전부이시다. 그런 예수를 마귀가 감히 시험할 수 있는가. 우주 삼라 만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히 마귀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라고 시험하려 하였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다. 그런데 감히 마귀가 나서서 예수를 우습게 여기며 자기에게 경배하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예수는 세상 통치와 세상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 보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 예수는 이 땅을 다스실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셨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하여 이 땅의 인류 가운데 그를 영접하고 믿는 자를 저들의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때에 예수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담대하게 마귀를 물리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그렇다. 우리가 경배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6장 13절을 인용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세 차례 이어지는 마귀의 시험에 철퇴를 때리셨다. 쐐기를 박으셨다. 성도는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 6장 11절 이하의 권면처럼 항상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여야 한다. 말씀의 검을 들어야 한다. 요한 1서 4장 1절 말씀처럼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라는 말씀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그 어떤 마귀의 시험이라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예수는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는 어느 바리새인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교훈해 주셨다.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는 몇 마디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 없는 민족적인 참극이요 시련이었다. 6.25 전쟁은 겪지 않은 이들은 실감할 수 없는 처절한 비극이요 완전한 폐허였다. 그런 이 땅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라나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번영만이 대답은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대답이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의 요셉처럼, 다니엘 서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복된 사순절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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