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의 탄생(눅2:1-14) 20251225 성탄절 본문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눅2:1-14) 2025. 12. 25 성탄절 우리는 성탄절기에 즐겨 찾아서 읽는 익숙한 성경 말씀을 이 시간에 함께 읽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아의 남편된 요셉은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의 명령을 따라서 조상들의 마을에 호적을 하려고 베들레헴을 방문하였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은 170km의 거리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가 140km이니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힘도 많이 들고 지칠대로 지친 만삭의 마리아가 아기 낳을 곳을 찾고 있었다. 요즘처럼 숙소 예약 문화가 없던 때의 일이다. 고향을 찾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요셉은 마리아의 몸을 부축하며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 강보에 싸서 말구유에 뉘었다. 그 날 밤중에 천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나타났다. 주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었다. 목자들은 크게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천사가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0-12) 갑자기 더 많은 천사들이 나타났다. 수 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우리는 천사들이 나타나서 전해 준 몇 마디의 말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하는 충분한 내용을 대하게 된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질문해 보자. 우리는 어떤 경우에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가. 무엇이 나에게, 무엇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연세 드신 분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이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런 큰 기쁨의 날이었을 것이다. 6.25 전쟁이 휴전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 그런 큰 위로와 안식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물론 평화롭게 통일이 되었다면 더욱 더 기뻤겠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면 출애굽의 순간이 그런 큰 기쁨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 던 순간이 그런 큰 기쁨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광야 생활 40년을 뒤로 하고 모세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후에 여호수아를 앞장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육지처럼 건넜다. 가나안에 첫 발을 디뎠을 때에 감격이 그런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길갈에 12개의 돌을 세워 기념비를 세우던 그날의 감격이 그런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칼과 창으로 전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였는데 여리고 성을 함락하던 그 날의 감격도 그런 큰 기쁨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뒤로하고 유다 땅,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감격의 날이 선물로 주어졌을 때에 그런 감격과 큰 기쁨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언제 그런 큰 기쁨을 경험해 보았는가. 언제 그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듣고 기뻐하고 또 기뻐해 보았는가. 어찌 생각해 보면 세상의 기쁨이란 영원하지 못하다. 아무리 대단한 기쁜 일이 생겨도 그 기쁨이 그렇게 오래오래 가는 기쁨이 별로 없다. 아들딸 낳을 때의 기쁨인가. 시집 장가가던 날의 기쁨인가. 나 자신이나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했을 때의 기쁨인가. 내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쁨인가. 수백대 일의 경쟁을 딛고 소위 말하는 역세권의 아파트가 당첨되었을 때의 기쁨인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외제 승용차를 마련했을 때의 기쁨인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 기업에 취직 되었을 때의 기쁨인가. 장사가 잘 되고 사업이 번창해서 기대 이상의 어머 아마한 돈을 벌었을 때의 기쁨인가.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세상의 고위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인가. 사망 선고를 받듯이 어려운 병을 발견하고 죽을 고생하며 투병 생활을 하였는데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을 때의 그런 기쁨인가. 그렇다. 맞다. 살아가다 보면 이런 기쁨 저런 기쁨이 없지 않다. 그런 기쁨의 기회가 더러 있다. 적지 않다. 어떤 사람, 어떤 가정에는 경사가 넘쳐 나기도 한다. 겹경사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세상을 살 만큼 살아 본 분들을 아실 것이다. 그런 대단한 것 같던 기쁜 일들이 내게 가져다 주는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가나. 그 기쁨이란 감정이 도대체 얼마나 유지되나. 세상살이, 인생살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뒤섞여 있다. 기쁜 일 뒤에 슬픈 일이 찾아오기도 하고, 슬픈 일 뒤에 기쁜 일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사방 십리 반경 안에 사는 이웃들을 일일이 조사 할 수 있다면 해 보아라. 평생을 살면서 슬픈 일, 속이 상한 일, 충격적인 일, 두려운 일, 무서운 일, 괴로운 일, 답답한 일, 억울한 일, 화 나는 일, 열불 나는 일, 뚜껑 열리는 일, 어려운 일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평생토록 꽃길만 걸은 인생이나 그런 가정이 있나 찾아 보아라. 사실 어찌 생각해 보면 세상살이라는 것이 좋은 일, 기쁜 일 보다는 어려운 일, 나쁜 소식, 속이 상한 일들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개인이든, 가정사이든, 세상 돌아가는 일이든, 나라의 형세이든 다 거기서 거기이다. 평생을 군악대의 빵빠레(fanfare)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격조 있는 의전을 받으며 레드 카펫 위만 걷는 인생이란 사실 없다. 어느 나라의 왕이라도 날마다 그런 순간만 계속되는 권력자란 없다. 별을 네 개 단 사성장군이라도 국가 경제와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국제적인 대기업가라도 언제나 그런 기쁨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나타나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전하여 준“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이 바로 그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이다. 좋은 소식이 영어로 ‘good news’이다. 맞다. 좋은 소식이 복음(福音)이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다. 그렇지 않나. 깨달은 분들은 안다. 믿어지는 분들은 안다. 영접한 분들은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보다 더 큰 기쁘고, 더 좋은 소식이 이 세상에 있나. 동서고금에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이란 없다. 석가모니(BC 563-483)는 인도 북쪽의 네팔 국경에 있는 카필라파스타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석가모니(釋迦牟尼)란 그가 속한 ‘샤키아 족속의 성자’라는 뜻이다. 안 해 본 일이 없다. 안 경험해 본 일이 없다. 즐거움도 찾아 보았고 극기도 해 보았다. 나중에는 6년 동안 하루에 보리쌀 한 톨만 먹으며 절식하며 보리수 나무 아래에 가부좌 하고 앉아서 고행에 고행을 계속하였다. 지식(止息)이라고 해서 숨을 멈추는 고행도 했다. 가시밭에 누워서 명상도 하였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은 고행으로나 쾌락으로 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나중에는 뱃 가죽이 척추에 붙을 정도로 야위었다. 뼈만 남았다. 그렇게 한다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다고 인생의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생이란 극단의 쾌락을 추구해도 소용없고 극단의 절제와 고행을 다 해 보아도 대답이 없는 법이다.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도 그런 체험이 있었다. 그는 무릎으로 로마의 빌라도의 계단을 기어 오르며 양쪽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고행을 해 보았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는 그런 고행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깨달음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다. 예수를 만나면 “큰 기쁨”이 찾아온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큰 기쁨이 샘이 솟게 된다. 예수님은“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요7:38)라고 말씀하셨다. 믈론 예수를 믿는 이에게도 슬픔도 있고 고난도 있고 질병도 있고 실패도 있다. 예수 믿는 이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요 죄 사함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인 것이다.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기쁨인 것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양의 3절은 이렇다.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 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의 기쁜 찬송 하늘 울려 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 찬양은 현세 도피적인 찬송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매 순간마다 주 안에서 누리는 큰 기쁨을 맛보며 전하며 증언하며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나그네 인생길에 붙잡혀 살지 말고 주 안에서 깨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구주(救主)이신 그리스도.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 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라고 하였다. 구주가 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을 “구주 그리스도 주”라고 삼중적 강조 어법을 사용한 곳은 성경에 이곳이 유일하다. 구주라는 ‘소테르’는 예수님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때로부터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다. 주라는 ‘큐리오스’는 상대방을 가장 존경스러운 극 존칭으로 높이는 표현이다. 언제부터인가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표현 대신에 큐리오스 즉 주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해 왔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시다. 그 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평강의 왕이시다. 지극히 큰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대속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주목해 보아라. 우리는 지난 헐몬산 기도회 기간 내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에 대하여 낱낱이 묵상하였다. 믿음의 조상들이 후대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 이 땅 위에 신앙의 유산, 믿음의 유산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애굽의 피라미트는 인류 역사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애굽의 그 거대한 피라미드를 다 합치고 그 안에 있는 왕들과 왕족들의 미라와 그 곁에 함께 매장된 온갖 보물을 다 합친다고 하여도 한 사람의 믿음의 유산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왜 베들레헴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의 동네라고 말하나.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베들레헴에 다윗 박물관이 있는가. 베들레헴에 다윗 기념관이 있는가. 그래서 유명한가. 아니다. 우리는 다윗이 누군지를 안다. 다윗의 신앙, 다윗의 믿음, 다윗의 시편의 고백들을 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가 위대하고 솔로몬이 대단하지만 다윗을 대신할 수는 없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이신 그리스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이런 믿음이 없이 교회에 다니고 교인들과 어울리는 것으로만 만족해 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복음을 깨닫고 나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깨닫고 나면 믿음 생활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2절과 3절의 말씀처럼 예수를 바라 보아야 한다. 예수를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께는 영광(榮光),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에게는 평화(平和). 유대인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할 줄은 몰랐다. 하나님의 아들은 왕궁의 화려한 환경에서 태어나시지 않았다. 부잣집의 대궐 같은 집에서 태어난 아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굿간에서 태어 났고 말구유에 뉘여지는 상황이 되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강보에 싸여서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하 만민에게 표적이 되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섬기려고 소였다. 목숨을 내어 주려고 오셨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려고 오셨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나면 나의 마음에 헤아릴 수 없는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영광과 평화 이 두 가지는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 그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 세상에 영원한 영광은 오직 주께만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말고 그 무엇이 인생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 그의 나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인간은 영광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존귀해 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에스더서의 에스더를 보라. 그가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는 왕비였기 때문에 대단한 것인가. 아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신앙으로 삵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닌가. 느헤미야는 어떤가. 그가 수산 성의 아닥사스다 왕의 곁에서 술 맡은 관원이었기에 존귀한 것인가. 아니다. 느헤미야는 선조들의 땅 예레살렘 성의 폐허 소식을 들은 후에 울며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고 기도 하였다. 느헤미야는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출세한 지위라도 연연하지 않았다. 1200km의 먼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에 평생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52일만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였다. 150여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도성, 다윗 성의 무너진 성곽을 중건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하나님은 느혜미야를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느혜미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변에 평화를 선물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쓰임을 받았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그런일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이다. 성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이들에게 평화가 임하게 하는 절기이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와 교훈이 마음에 간직되는 기쁨의 성탄, 평화의 성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3회 2025-12-28 23:18 목록 댓글목록 다음글 구원의 창시자(히2:10-18) 20251228 2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