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창시자(히2:10-18) 20251228 본문 구원의 창시자(히2:10-18) 2025. 12. 28 오늘 읽은 본문인 히브리서 2장 1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라고 하였다. ‘선구자, 개시자’라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룩하시려는 인류 구원의 창시자가 되신 분이다. 히브리서 1장 전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분이신 것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2장 3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안된다고 경고하였다. 2장 9절에서는 “예수님은 영광과 존귀를 관을 쓰신 주님”이라고 소개하였다. 2장 1절에 보면,“우리들은 복음에 유념하여 흘러 떠내려 가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바닷가에 정박한 배의 닻을 제대로 내리지 않으면 배가 파도에 떠밀려가 버릴 수 있다. 이처럼 깨달아 알고 믿게 된 복음을 유념하여 그 믿음을 지켜 가지 않으면 흘러 떠내려 가는 배처럼 되고 만다고 교훈해 준 것이다. 여호수아서의 아간은 탐심 앞에서 떠내려 간 자이다. 이스라엘이 초대 임금 사울도 교만에 갇혀서 하나님의 기대에서 떠내려 간 자이다. 므낫세 왕은 아버지 히스기야 왕의 하나님 신앙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가고 떠내려 간 자이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는 자기 의와 주관에 사로 잡혀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버리고 흘러 떠내려 간 자이다. 이처럼 성경에는 구원 받는 믿음을 평생토록 잘 지켜 간 자들의 일화와 세월과 함께 믿음에서 흘러 떠내려 간 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22:22)라고 고백하였다. 히브리서 2장 12절이 다윗의 그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시편의 회중을 히브리서는‘교회’라고 하였다. 그렇다. 오늘 날 우리들도 믿음의 조상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형제자매들 가운데에서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의 회중인 교회의 성도들과 더불어 계속하여 주님을 찬송하여야 한다. 늘 말하지만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동행하심에 대한 신앙 고백이 없다면 찬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록자가 전하는 구원의 창시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신가. 붙들어 주시는 분. 16절에 보면,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의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붙들어 주신다’는 표현은 ‘도와주신다,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나를 붙들어 주시는 엄마의 손길, 아빠의 손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였다.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돌보아 주며 나보다 힘이 있는 그 누군가가 나의 손을 붙들어 주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물며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고, 예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무슨 힘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의 손을 붙들어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를 찾아 오는 수 많은 사람들의 손을 붙들어 주셨다. 수 많은 병자들을 구원해 주셨다. 고쳐 주셨다. “네 믿음대로 되라”라고 믿음을 촉구해 주셨다. 각색 병자와 수 많은 이웃들을 도와 주셨다.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은 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4장에는 벳세다 광야에서 저녁나절에 예수님께서 배가 고파하는 무리들이 소개된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배불리 먹게 하신 기적 사건이 나온다. 그날 저녁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둘러 배를 타고 갈릴리 저편 마을로 가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 따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그 밤 중에 갈릴리 호수를 배로 이동하던 제자들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큰 풍랑을 만났다. 예수님께서는 새벽 2-3시 경에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 가까이 다가가셨다.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인가 보다”라고 반응하며 서로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다. 배에 가까이 다가가신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된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예수님은 “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베드로는 캄캄한 호수의 파도치는 물 위로 뛰어내렸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베드로는 소리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예수님은 그 순간에 손을 내미셔서 베드로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 배에 있던 제자들과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예수님께 절을 하였다. 그리고 한결같이“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지난날 그때,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왜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무엇을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주님 우리가 환난을 겪을때에 붙들어 주세요, 사고와 사건의 순간을 피하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생각을 붙드시고, 판단을 붙드시고, 발걸음을 붙들어 주세요.” “하나님, 우리 가족, 우리 자녀들을 범사에 붙들어 주세요. 악한 생각과 나쁜 마음과 더러운 생각과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피하며 살아가도록 붙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되지 않나.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2장 14절 끝에 보면,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라고 하였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매 순간마다 마귀의 세력을 멸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1347년부터 3년 동안에 페스트라고 이름하는 흑사병으로 죽은 유럽 사람의 수가 2,000여만 명이라고 한다.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 영국 런던 인구의 잘 반이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지구 인구로 하며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이 쥐와 쥐벼룩이라고 한다. 무섭지 않나. 마귀의 궤계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마귀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예수님도 넘어뜨리려고 달려들었다. 잘 생각해 보라. 믿음을 가지고 신앙의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마귀는 더욱더 집요하게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꼭 헬스클럽에 가지 않더라도 추운 겨울이지만 실내에서라도 근육 운동을 계속하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루 5천보 이상을 꾸준히 걸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치매 위험을 7년 이상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하버드 의대 매스 제너럴 브리햄(Mass General Brigham) 연구팀이 네이쳐지(Nature Medicine)에 발표한 내용이라고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꼭 그렇게 기도를 계속해야만 하나. 꼭 그렇게 성경 말씀을 계속하여 대해야만 하나. 꼭 그렇게 교회에 자주 와야만 하나. 꼭 그렇게 자주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 맞다. 그렇다. 예수님도 평생을 그렇게 기도하셨다. 예수님도 신명기와 시편의 말씀 등을 줄줄이 외우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고 물리치셨다. 예수님은 한 순간도 하나님 아버지를 잊고 지내신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 계셨다.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였다. 일체였다. 분리된 적이 없으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라고 하였다. 기도할 때에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 찬송하고 봉사하고 전도할때에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님이 내 안에서 힘이 되어 주신다. 젊은 커플들이 손을 잡고 가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연세가 지긋한 노인 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라는 찬양을 부르자.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붙잡아 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시다. 우리를 손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이시다. 죄를 속량(贖良)해 주시는 분. 17절에 보면, 예수님은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는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시라고 하였다. 자비하신 대제사장, 신실하신 대제사장이란 뜻이 무엇일까. 모세 시대 이후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집전하였다. 그처럼 히브리서는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인애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시다. 예전에 보던 성경인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자비롭고 충성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속량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죄 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요즘도 이러저러한 죄로 인해서 형량이 확정되는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의 소식을 계속하여 접하며 지내지 않나. 세상에서도 지은 죄가 드러나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지은 그 죄로 말미암아 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원죄에 갇히고, 자범죄에 갇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량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요즘처럼 금 값이 치솟는 때에 생각해 보라. 나 한 사람이 속량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그 은혜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금을 다 합친 것의 값어치보다도 귀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을 “천하 보다 귀하다”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셨다. 내년, 2026년 대한민국 국가 예산이 728조원이라고 한다. 숫자가 실감이 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귀하고 귀한 나의 생명의 구원과 속량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진리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은 자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매사가 달라야 한다. 시간 사용이 다르고, 재물 사용이 다르고, 돈의 씀씀이가 다르고, 취미아 관심사가 달라야 한다. 삶의 목적과 의미가 날달라야 한다. 이런 믿음을 갖기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 어느 식당 빌딩을 지나다가 술집 앞에 세운 스탠드 배너 간판을 보았다. 과일 안주 포함 양주 한 병 값이 87만원이라고 큰 글씨로 내어 건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술 한 병을 그렇게 마셔 댄다. 그 정도면 술값이면 싼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섞여 있을지 모른다. “제가 과거 한 창 잘 나갈 때에는 그것보다 훨씬 비싼 술자리를 하룻밤에 이차 삼차 했는데요.”라고 속으로 말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히브리서 2장 17절이 말씀하는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예수님이 오늘, 지금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질문해 보라. 십자가의 우편 강도는 자기 곁에 계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좌편 강도는 일관되게 예수님을 조롱하다가 죽고 말았다. 복음은 기회이다. 복음은 상급이다. 복음은 능력이다. 복음은 대답이다. 복음은 신비한 것이다. 동서고금에 예수님을 대속의 주님, 속량하시는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살았던 개인과 가정과 문명과 역사를 주목해 보라. 늘 예로 들지만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 1703~1758)와 맥스 쥬크(Max Jukes, 1720~?)는 나이 차이가 좀 있기는 하지만 한 마을에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 교회에 같이 다녔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신실한 신앙을 지켰고 믿음 좋은 아내를 맞아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미국의 신앙 부흥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교회를 멀리하고 신앙을 떠난 맥스 쥬크는 예수님을 모르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갔다. 술을 가까이하고 방탕하게 지냈다. 알버트 윈쉽(Albert E. Winship)은 두 사람의 나중과 그 후손을 추적해서 <교육과 유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차이인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이들의 삶은 큰 차이가 났다. 그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도 엄청난 차이가 났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앨버트 윈쉽이 추적한 통계로 1390명의 후손을 두었다. 후손들 중에서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 13명, 교수가 65명, 의사가 56명, 성직자가 100명, 군대 고위직 장교가 75명, 저술가가 8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9명, 고급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 의원이 1명, 미국의 부통령 1명을 배출했다. 반면에 맥스 쥬크는 560명의 후손을 두었다. 그런데 유아 때에 사망한 경우가 309명, 거지와 노숙자가 310명, 매춘부가 50명, 도둑이 60명, 살인범이 70명이었다. 생각해 보라. 죄의 속량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며 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죄의 속량’이란 말씀 속에 다 담겨 있는 것이다. 2025년의 마지막 주일 예배 시간이다. 하루하루 순간마다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보람이 있고 가치 있는 나날을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 18절을 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믿음을 가지고 살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 받을 일은 점점 더 많아진다. 그렇지 않나. 세상을 적당히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타협하면서 살아간다면 설렁설렁 대강대강 살아가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받는 일과 유혹이 되는 경우는 점점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말씀하는 시험이란 ‘test’가 아니라‘tempatation’을 말한다. 학교 교실의 시험 문제와 같은 시험이 아니라 마귀(魔鬼)의 유혹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죄된 우리들과 예수님의 차이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를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마태복음 26장 3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을 위해서 간절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잠이 들어 있는 제자들의 곁에 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올 해의 남은 날들과 맞이할 새해에 매 순간마다 불같이 일어나는 각종 시험을 주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믿음 좋은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험받는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능히 도우실 예수님께서 항상 곁에서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분별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3회 2025-12-28 23:15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눅2:1-14) 20251225 성탄절 25.12.28 다음글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이(사11:1-10) 20251221 2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