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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대한 소회(素懷)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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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3-22 23:29 조회 4,812 댓글 0
 

예배에 대한 소회(素懷)

 

한국 교회 선교 135년 역사에 처음 겪는 일이다. 교회마다 텅텅 비어 있다.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큰 교회들도 최소한의 예배팀들이 모여서 예배를 진행하고 실시간 영상으로 예배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도처럼 몰려와 매시간 예배드리던 광경이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견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대 재앙이다. 누구에게서 비롯되었고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최첨단 IT 문명의 혜택을 입으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전 인류가 겪는 참담한 재앙이다. 만약에 코라나 19 바이러스가 아프리카에까지 번지는 날에는 의료 혜택이 열악한 저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크나큰 재앙이 되고 말 것이다.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은 일제 강점기 때에도 늘 예배드렸고 6.25 피난 시절에도 예배는 드렸다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렇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 극심한 환난과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예배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과 신앙을 지켜 가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러 날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하였다.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고 목 베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지하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믿음을 지켜 가던 이들의 카타콤의 흔적은 지금도 생생하게 보존되어 그 당시의 신앙이 얼마나 담대하였나를 보여준다.

 

다 같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예배 생활이 일순간에 멈추어져 버렸다. 물론 예배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 개인의 몫인 것은 맞다. 아벨이 그러하였고 에녹이나 노아도 그러하였다. 예배드리는 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태도가 그 사람의 예배 생활을 좌우한다. 아벨의 제사라는 것이 수백 혹은 수천 명과 더불어 예배드린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장에 소개된 믿음의 선진 들의 그 믿음 생활이 다 그러하였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 이삭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다.

 

그러나 광야의 모세 때의 서막이나 솔로몬의 성전 생활이나 나중 스룹바벨의 성전 생활을 비롯한 모든 예배 즉 제사는 부름을 받은 민족과 회중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더불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예배였다. 이것이 회중 예배의 감격이며 영광스러움이다.

 

물론 골방이나 산속의 동굴에 엎드려 기도하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과 예배 생활도 가능하다. 그러나 과거 여의도 광장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 초청 100만 전도 집회와 같이 거대한 회중이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대하고 서로 더불어 교제하는 연합의 힘이 주는 장엄함과 다른 은혜의 분량을 대신할 길이란 없다.

 

남성의 독창이 우렁차고 여성의 독창이 곱고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역시 성가는 합창이 주는 은혜가 크지 않나. 그처럼 예배란 서로 더불어 다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의 영광스러움이 분명히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출입의 두려움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사람을 가까이에서 대하는 대면과 접촉에 대한 불안과 염려는 온 나라와 열방의 경제를 마비시켜 버렸다. 길거리와 상가와 백화점과 음식점과 전통 시장 골목이 순식간에 한산해지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속단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현재의 바이러스 감염 상황이 언제나 수그러들지를 예측할 수 있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의료진과 담당자들과 섬기는 이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도들이 사회적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마스크를 쓰고라도 모여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건만 교회마다 텅텅 비어 있다. 물론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기도하는 그 누구의 기도라도 귀 기울여 주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때에 교회 생활을 등한히 하거나 예배 생활, 기도 생활, 말씀 묵상 생활을 게을리하며 주저앉아 있을 성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필자는 평신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면 마스크를 쓰고라도 교회에 달려올 것 같다. 그러나 개인마다 가족마다 형편과 입장과 처지가 서로 다 다르다 보니 요즘 같은 때에는 함부로 누구를 강권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그래서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필자는 이십 대 초반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휴전선 방어 부대의 소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아홉 달 동안 교회가 없는 환경에서 콘크리트 벙커 생활을 하였다. 주일이면 기독교 신자인 병사들과 함께 몇몇이 둘러앉아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은커녕 기독교 TV 방송도 없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나 극동 방송이 유일한 기독교 방송이던 시절이다. 그때에는 얼마나 예배가 그립고 설교가 듣고 싶던 시절인지 모른다. 그러던 중에 부대 이동이 있었다. 임진강을 건너와서 예배당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니 천국 같았다.

 

남 유다의 왕 여호야김 삼 년에 바빌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그때 바빌론에 끌려간 유다 청년 중의 한 사람이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바빌론의 왕이 내려 주는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고 열흘간 채소와 물만 먹고 지냈다. 그러나 다니엘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였다. 왕이 주는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였다. 다니엘은 주변으로부터 미움과 시기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넣어 죽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늘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다. 던져진 사자 굴에서도 그의 목숨을 보전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던져 졌는데도 죽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런 표적을 보여주시고 살려내신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요즘은 각자기 자신의 믿음을 점검할 때이다. 베드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편지하였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이러한 난세에 우리 각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라는 찬송가의 고백처럼 말이다.

 

주여 기도합니다.

 

이 땅과 이 민족과

열방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와 회복과 안정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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