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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容恕 201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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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10-25 12:25 조회 5,504 댓글 0
 

용서容恕

 

일 년 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 기사가 인터넷 뉴스에 실렸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사는 보텀은 지난해 9월 여성 경찰관이었던 앰버 가이거(31)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사건 당시 엠버 가이거는 3층에 있는 자기 집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녀의 집은 3층인데 남자친구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느라 4층인 보텀의 집에 잘못 들어간 것이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엠버 가이거는 어두운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보텀을 자신의 집에 들어온 침입자로 착각하고 권총 두 발을 쏴서 죽였다.

 

상식적으로 그 정황이 쉽게 이해되질 않는다. 아무리 불이 꺼진 상태에서 TV만 켜져 있는 거실이었다고 해도 자기 집 내실 구조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두웠다고 해도 가구 배치한 위치도 달랐을 것이고 현관의 신발 벗는 입구 상황도 낯설었을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현관문을 열어 놓고 남의 집 거실에 범인이 느긋하게 버젓이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TV를 볼수가 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현장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것으로 그 상황에 대처하는 것도 쉽게 이해되는 정황은 아니다. 물론 정당방위 운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지의 검찰 또한 거실로 들어가며 자신의 집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는데도 엠버 가이거가 이를 무시했으며 총기 발사 수칙도 어긴 것이라며 그녀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26살이었던 보텀은 카리브해 섬 세인트루시아 출신의 유능한 회계사였다. 댈러스 지역 언론은 여성 백인 경찰 엠버 가이거가 보템을 총기로 살해한 것은 인종차별이 아닌가 하고 심각한 사회문제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

 

재판부는 엠버 가이거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전날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에 의하면 엠버 가이거에겐 사실상 종신형인 99년형 선고될 것만 같았다. 검찰도 이미 28년을 구형한 상태였다. 그러나 댈러스 지방법원은 5년 뒤 가석방이 가능한 10년 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법정 안팎의 많은시민들이 야유를 보내며 분노했다고 한다.

사건 1년 만에 텍사스주 댈러스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정에서 피해자의 동생인 18살인 브랜트 진은 형을 죽인 엠버 가이거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현지 TV가 촬영한 법정 동영상을 보면 브랜트 진은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용서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할 수 있다. 또 하나님에게 귀의한다면 하나님께 당신을 용서해달라고 빌겠다. 다시 스스로 다짐하는데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는 아니지만, 당신을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사랑한다. 우리 형처럼 썩어 문드러지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최선의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실형이 선고되지 않길 바란다. 난 당신을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랑한다. 당신이 감옥에 가는 것조차 바라지 않고, 어떤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도 않는다. 형도 그러기를 바랬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남은 삶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기를 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브랜트 진은 판사에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녀를 조금 안아볼 수 있을까요고 말했고 판사는 잠시 후에 허락하였다. 두 사람은 1분 가까이 서로를 껴안은 채로 있었다. 법정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와 크게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판사도 눈물을 흘리며 엠버 가이거를 껴안았다. 그리고 이어서 희생자의 어머니 앨리슨을 포옹하였다. 희생자의 동생인 18살 소년이 그날 법정에서 피력한 말 한마디 한마디와 그의 행동이 언론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이 용기라면 용서받는 일은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그것이 사람을 죽인 경우이든 혹은 상해(傷害)에 관한 사건이든 혹은 경제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그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어떤 피해나 해악을 입혔을 때에 그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이 그리 쉽게 가능하리라고 여겨지는가.

 

용서(容恕)는 나에게 잊을 수 없고 쉽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슬픔, 아픔과 충격 그리고 피해를 입힌 상대방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그 어떤 사건에 대하여 앙심이나 보복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과 원망으로부터 스스로 자유해 지는 길이다.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평화와 사랑이 임하게 하는 길이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베푸는 나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임하게 하는 크나큰 사랑의 임재(臨在)의 시작이며 자비와 긍휼을 향한 마음가짐이다. 내가 누구를 용서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나 행위는 그 출발부터가 나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는 자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은 서로가 다 같은 존재이다. 사실 분노하고 미워하며 그런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쉽지 상대방을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사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숭고한 사랑의 가치이다. 용서를 구하고 싶어하는 상대방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번민이나 착잡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용서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프레드 러스킨은 그의 책 <용서>에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 준다. 용서하고 나면 두려워할 일이 적어진다.”고 말했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사람을 먼저 자유롭게 해준다. 용서하면 내 안의 화가 녹아내리고 상처와 분노와 보복심과 노여움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용서의 최고 수혜자는 상대방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용서는 상대방이나 사건에 대하여 자포자기하거나 잊어버리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위한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원망이나 복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만큼 내면의 성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내면의 성숙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게 되면 앙심과 원한과 분노 등의 감정이 독소처럼 자신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결국은 나 자신이 더 큰 고통 속에서 시달리게 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라고 기도하셨다.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저들 가운데는 가롯 유다, 대 제사장 가야바, 그의 장인 아나스, 가야바의 편을 들어 주었던 수많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좌편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며 예수를 조롱했던 그 강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복음(福音)이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죄의 값으로 인하여 죽을 인생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恩惠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救援)을 받아 영생(永生)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된 것이 복음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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