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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순신과 여수의 선소船所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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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6-01 21:07 조회 6,223 댓글 0
 

효자 이순신과 여수의 선소船所

 

여수 소호동 앞 바다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이틀을 지냈다. 그 바로 앞 바다가 선소(船所)였다. 여수선소유적(麗水船所遺蹟)은 전남 여수의 시전동 해변에 있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배를 만들던 터를 일컫는 말이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든 곳이어서 더 유명하다. 굴강세검정선소창병영 막사계선주대장간망해루망마 기마대궁장사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어머니인 변씨 부인을 모셨던 자당(慈堂) 기거지가 남아 있다. 좁은 만으로 형성된 자연 지세가 호수 같이 바닷물을 잔잔하게 유지하여 선소(船所)의 적지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과거에 두 차례 그 곳의 지방 연합 집회 인도 차 며칠씩 머문 적이 있지만 여행으로 가기는 처음이다. 여수의 동쪽은 여수수도(麗水水道)를 끼고 경상남도 남해군이고 서쪽은 순천만을 끼고 고흥반도의 동남쪽과 바다로 경계를 이룬다. 남쪽은 남해, 북쪽은 순천과 인접해 있다. 510m 높이의 영취산 이외에는 300-400m 정도 높이의 산들이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바닷가까지 이어진다. 그러하다 보니 평야가 적고 높고 낮은 산악으로 형성되어 바다와 이어진 경관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전봉산과 영취산의 서북쪽 산기슭에 그나마 넓은 여천평야가 전개되어 농경지로 이용된다. 북쪽 평지의 대부분 지역은 여천 공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여수반도와 돌산도 사이에는 여수수도(麗水水道)가 있는데 그 물 줄기의 흐름이 빠르다.

 

여수반도의 동남쪽 앞 바다에는 대경도(大鏡島소경도(小鏡島가장도(加長島야도(冶島오동도(梧桐島돌산도(突山島)등의 섬들이 천연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 여수 앞 바다가 아름다운 것은 이러한 섬들이 그림처럼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수 앞 바다에는 유인도 46, 무인도 268, 연륙도 3개 등 총 317개의 섬들이 있다고 한다.

 

여수의 기후는 온화하여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겨울도 있다. 연평균기온 15.0, 1월 평균기온 2.9, 8월 평균기온 25.6라니까 생활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기후이다. 연강수량은 1,433이다. 가로수나 정원수 중에는 종려나무 종류가 눈에 띄어서 제주도의 길거리와 풍경이 비슷하다.

 

여수는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일화가 많은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란이 심해지자 15936월에 아산에 사시던 어머니 변씨 부인(卞氏夫人)을 비롯한 가족을 여수로 모셨다. 전라좌수영 내 웅천동 송현마을에 거주하는 부하 정대수의 집을 빌려 임시 거처로 삼았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24개월 만이다.

 

이순신의 어머니가 거주했던 곳이라 하여 이순신 장군 자당 기거지(慈堂起居地)라고 이름 붙은 그곳은 고음천(古音川) 송현마을에서 어머니 변씨 부인과 부인 방씨가 4년 가까이 난을 피해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3715, 한산도로 진영(陣營)을 옮긴 불과 한 달 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한산도 통제영에서 수군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여수의 어머니와 다시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에 15972,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거역했다는 누명을 쓰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여수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 변씨 부인은 두 달 후인 그해 4, 아들이 전라좌수사에서 해임되고 한양으로 압송된 후 본가가 있는 아산을 향해 배편으로 가던 중에 아들을 보지 못하고 411, 배 위에서 눈을 감았다.

 

이순신은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는 조정(朝廷)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감옥에 하옥(下獄)되었다. 28일 후인 41일에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경상남도로 향했다. 그는 선산과 집이 있는 아산에 가서 조상의 묘와 사당에 인사를 고하면서 며칠을 묶고 있던 413일에야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의 해암(蟹巖)으로 달려가 보니 임종하신지 이틀이 지난 어머니의 시신(屍身)을 실은 배가 선창에 도착해 있었다. 15일에야 입관하고 16일에 배를 중방포(中方浦)로 옮겨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순신은 며칠 후인 419, 도원수 권율 장군이 있는 경상남도 합천을 향해 다시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 치열한 전쟁 중에도 날마다 일기를 썼다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효자 이순신의 면모가 곳곳에 담겨 있다. 그의 나라를 구하려는 충성심은 어머니를 대하는 지극한 효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계시고 나를 낳으신 분이 계시니 오늘 날 이 땅에서 그 어떤 역할이든 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이처럼 아름다운 땅을 지켜 오기 위해서 싸웠던 구국선열들의 희생 앞에 마음 깃을 여미게 되는 계절이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올해도 벌써 6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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