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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사랑의 힘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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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2-17 20:22 조회 11,279 댓글 0
 
사랑의 힘
 

예수께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표증으로 보내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시다. 예수는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시려고 오신 구주이시다. 엄밀히 표현하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성육신(成肉身)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내어 버리셨다. 예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스스로 사형 언도를 할 수 없자 로마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했다.
 

요즘 세간에서는 무질서한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빚어진 민망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로 도배를 하고 있다. 그것도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에게서 빚어진 추태의 숨겨졌던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어서 더욱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공부 잘하고 남들보다 앞서가고 똑똑하고 잘나서 일찍이 젊은 나이에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각 분야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던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타락한 아담과 같고 가인과 같고 에서와 같은 모습들이다.
 

사랑은 변질되면 안 된다. 그 사랑의 정의나 속성이나 표현이나 여운이 한결 같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사랑은 그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감상적인 사랑, 통속적인 사랑, 자극적인 사랑, 은밀한 사랑, 부적절한 사랑, 범죄로 이어지는 사랑이란 이름의 그 모든 행위들은 후유증이 너무나도 크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하진 그 모든 행위에 뒤 따르는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대속물이란 노예나 죄수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치루는 값이다. 예수는 온 인류를 죄로부터 대속하기 위한 대속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그 값을 상상해 보라. 한 사람을 감옥에서 풀어내기 위한 보석금도 만만치 않은데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창세 이후로 세상 끝 날 까지 죄에서 건져내기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다. 그 은혜(恩惠)의 값이란 그 어떤 값진 것으로도 환산 할 수 없는 것이다.
 

초콜릿 맛처럼 달콤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그 어느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 즐겁고 그런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자를 꾸준히 돌아보고, 갇힌 자를 찾아가 주고, 마음 아파하며 슬퍼하고 우울해 하며 세상을 이기고 살 기운을 되찾지 못하는 이들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 주고 격려가 되어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남이 안고 있는 가슴앓이의 넋두리를 서너 시간 혹은 자주 들어 주고 받아 주는 일은 진액이 빠지는 일이다. 남의 신세타령만 진지하게 들어 주려고 해도 내 안에 있는 진이 고갈 되는 것만 같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불태워 버리거나 방치하고 유기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설마라고 여기지만 세상은 그렇다. 한 어머니가 한 아기를 낳아 성인으로 키워 내기 까지 그 해산의 고통과 양육의 수고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랑으로 입히고 신기고 감싸고 먹이고 길러 내기 까지 끝없는 수고를 계속하여야만 한다. 육체의 양식만 먹여서는 안 되고 엄마 이게 뭐야라고 시작되는 궁금증 앞에서 천 가지 만 가지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 가며 어린 아이의 호기심에 불을 댕겨 주지 않으면 자녀들의 지적 능력이 정상적으로 발육될 수가 없다. 이것은 일찍이 부모를 잃은 고아라도 마찬가지다. 그 누군가를 통해서 필요한 만큼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공급받지 못하며 자라나는 날에는 그 나중이 심각해지고 만다. 사랑 받고 자라난 아이가 커서도 그 받은 사랑을 나누며 살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망하고 훈계하고 벌을 주는 사랑도 필요하지만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신데 말씀 한 마디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없으셨을까. 최고 통치자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지면 옥에 갇힌 자들 수천 명이라도 사면해서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쉬운 방법의 말씀 한 마디로 하지 않으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 그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으로 인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둘로 찢기듯이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여 주셨다.
 

그런 어마어마한 사랑을 덧입는 은혜의 초청을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된 12사도들 중에서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의 좌우편에 앉는 영광을 탐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이쯤에서 다시 질문해 보라. 사랑이란 무엇인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도 그랬고 두 아들도 그랬다. 이 상황에서 화를 낸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생각하여 보라. 나는 어떤가.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과 예수께서 받아 마신 대속의 쓴 잔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다시 질문하여 보라. 나에게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사랑의 힘이 이어져 흐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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