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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이야기... 201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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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7-05-06 21:01 조회 11,278 댓글 0
 

강화도 이야기...

 

 

강화도’((江華島)하면 단군 신화(神話)와 관련된 마니산 첨성대와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진 전등사, 고려시대 왕궁과 구한말 외세를 막기 위해 쌓은 돈대와, 한옥으로 지은 성공회 예배당, 고인돌, 인삼, 화문석, 밴댕이, 꼴뚜기 그리고 새우 젖 등이 생각 속에 떠오른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으로서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사료이다. 그 곳은 삼국 시대부터 군사 시설을 설치했다. 1232, 고려 고종 19년에는 해전(海戰)에 약한 몽골군의 침입을 피해서 왕이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에 대항하기도 했고 환도하기 전까지 39년 동안 왕이 머물렀다. 고려의 왕도였던 송도의 궁궐과 똑같은 규모의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몽골과 화친을 맺으면서 몽골의 요구로 왕궁과 성곽을 허물었고 지금은 그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의 별장을 짓기도 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 시대 말에는 그곳을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 등의 외세를 막는 군사 요지로 삼아 5, 7, 54돈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서양의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는 외국 함대가 쏜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는 외규장각세웠다. 정족산(鼎足山)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20미터인 정족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잘 알려진 전등사가 위치해 있고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인 정족산성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정족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 터가 남아있다.

 

최근에는 강화도 본 섬 곁의 석모도에 수질 좋은 온천이 개발되어 방문객들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건너던 석모도까지 올 여름이면 다리가 완공된다. 외포리 포구에서 석모도 까지의 뱃길은 껑충 뛰면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별로 멀지 않은 뱃길이다. 그래도 2. 2km이다. 자동차를 싣고 사람이 함께 타는 잠깐의 뱃길은 몰려드는 갈매기 떼에 새우깡 한 봉지를 뜯어 던져 주다 보면 어느 새 도착하는 한 뼘 거리의 뱃길이다. 강화도에는 마을마다 예배당이 보인다. 예배당이 없는 마을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강화도에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며 술장사를 하던 청년 이승환이 고향에 돌아가서 지내며 어머니에게 전도한 것이 시작이다. 그 당시 내리교회 제 2대 담임목사였던 조지 죤스(George Heber Jones, 1892-1903)선교사를 초청하여 밤중에 어머니가 먼저 선상세례를 받으실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893년에 오늘 날의 강화도의 모교회인 교산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서민층이었던 이승환과는 달리 과거의 급제한 양반 출신이 김상임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되면서 강화지역 복음 전파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독교를 믿게 된 김상임은 가신(家神)과 조상의 신주를 모시던 사당(祠堂)을 불사르고 자기 집 앞마당에 열두 칸짜리 예배당을 지어 시루미 이승환의 집에 모였던 교인들을 초청하였다. 이로써 교산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 곳에는 스크랜턴 선교사도 방문하고 지역 선교를 위하여 잠을 자고 가기도 하였다.

 

필자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마을은 바닷가 마을은 아니다. 넓은 밭과 논으로 이어진 들판을 5리쯤 걸어가야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다. 시골집의 바깥마당 앞의 연자간 언덕에 올라서면 저 멀리 하늘을 가리고 펼쳐 있는 해발 443미터인 진강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에 진강현의 진산을 후대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산자락에서는 이성계의 팔준마와 효종의 애마였던 벌대총을 길러 냈다고 한다. 강화군은 강화도인 본섬과 석모도와 교동도와 볼음도, 아차도 등 몇 개의 부속 섬을 포함한다. 뱃길이 험하여 아차하면 보름이나 걸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들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강화도에는 해발 472미터의 가장 높은 마니산을 비롯해서 높고 낮은 13개의 산들이 산재하여 있다. 봄철이면 진달래와 철쭉 축제가 장관인 곳이 고려산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리만큼의 진달래와 철쭉꽃으로 뒤 덮인 산허리와 능선 자락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룬다. 강화도의 모든 산들은 어느 산을 오르든 사방으로 펼쳐지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내륙의 산행과 전혀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산과 나무와 풀과 들꽃과 야생의 열매들과 새들과 논과 밭으로 이어지는 넓은 들판과 바다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듯한 평온함을 갖게 해 준다.

 

처처에 불교의 흔적과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는 강화도의 마을마다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갔고 예배당이 세워진 것은 놀라운 선교의 열매가 아닐 수 없다. 고향교회인 흥천교회는 데이밍(C. S. Deming)선교사1906년 첫 주일에 김용하의 내실에서 김용하. 전병규와 몇몇의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아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다. 데이밍은 그 당시 서울 지방의 감리사였고 그 해 823일에 김용하와 전병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한국 이름은 도이명(都伊明)이다.

 

그 해 103일에는 필자의 고조부와 증조부가 한 날 데이밍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필자의 고조모인 김마리아는 흥천교회 첫 세례 교인이 된 김용하의 뉘이동생이다. 김용하의 손자인 김종우(1883-1940)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으나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커 가며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정동제일, 동대문, 상동 교회 등에서 목회하였고 감리교의 존경 받는 감독도 지냈다. 사도 바울이 지나다닌 곳곳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처럼 외 딴 섬 강화도의 마을마다 그런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서 120년 동안 자라나고 있다.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가 깃들이듯”(13:31-32)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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