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볼 수 있다는 것 2015. 3. 15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3-15 16:34 조회 11,984 댓글 0
 
볼 수 있다는 것
 
 
최근에 안과에 다녀왔다. 어린 시절과 예전에는 시력이 좋았으나 최근에는 점점 성경과 책을 읽는데 불편이 더해져서 치료를 받았다. 오늘 날까지 건강한 눈을 갖고 살아 온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부모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크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처럼 안과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것 또한 얼마나 크나큰 혜택이며 축복인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체의 여러 가지 기능들 가운데 크나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몸의 그 모든 기능들은 실로 그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심이 그지없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오감(五感)이 골고루 건강한 사람은 그 얼마나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보건복지부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은 24만여 명으로 전체 장애인의 10%를 차지하며, 매년 약 13,000여 명씩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전 세계 인구의 4%31,400만 명이 실명 또는 시력장애를 갖고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에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의 사역자 한 분이 사무실에 다녀갔다. 그는 은퇴한 목회자의 자녀였다. 그의 어머니는 평소에 각막기증 서약을 하고 지내던 중에 돌아가시면서 양 쪽 눈을 기증하여 두 시각 장애인이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9년에 임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평소에 그 자신이 안구 기증을 서약하였던 대로 의료진은 그의 양쪽 각막을 적출하여 두 사람에게 이식하는데 성공하였다. <세상을 보여줄께>라는 책을 낸 주천기 교수는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이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안구를 적출할 당시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몹시 긴장하였었노라고 그의 책에서 회상하였다. 각막(角膜,cornea)은 안구의 매우 얇은 막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다. 우리 옛말에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볼 수 있다는 것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비유가 아닌가. 창세기 271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다. 야곱은 앞을 잘 못 보시는 아버지 이삭을 속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받고 싶은 축복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7-29) 야곱이 받은 나중의 복은 그가 평생토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복을 목말라하였다는데 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에 눈이 가리어져 있었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에 눈이 활짝 띄어 있었다. 야곱의 생애는 형 에서와 확연이 달랐다. 하나님도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1:2-3) 야곱은 형 에서와 다르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영의 눈을 떠서 볼 줄 아는 인생으로 점점 성숙해져 갔다. 평생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삼중고의 여인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1880-1968)의 삶을 숭고하게 바꾸어 놓은 것은 그의 곁에서 희망을 심어 주었던 하나님의 사람인 엔 셜리반 선생의 남다른 정성이었다. 헬렌 켈러는 평생 육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었으나 세계의 39개국을 방문하며 희망을 전하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한국인 중에도 시각 장애 가운데에서도 멋진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돌아 간 강영우 박사나 오늘 날의 실로암 안과 병원의 원장인 김선태 목사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보신 적이 있다. 제자들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자신이나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주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씼으라고 하셨다. 그는 구걸하며 살던 걸인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고 보게 되었다. 그 치유 과정 중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그렇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빛이 임한다. 예수님은 어둠과 절망을 이기게 하시는 강한 빛이시며 영원한 빛이시다. 예수님의 그 비추시는 진리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 다메섹 성을 향하여 가던 핍박자 사울의 눈을 가리어서 삼일 동안 못 보게 하였던 것도 예수님의 강한 빛이었다. 사울은 삼일 만에 보게 되었고 예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새로운 진리의 빛에 사로잡히는 복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6:22)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2:17)고 하셨다.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져서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결국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삼고 부끄러움을 가려 보려고 하였다. 눈은 사물을 인식하는 최고의 기관이다. 삼일 간의 실명(失明) 체험 후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를 계속하면서 에베소서 118절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육의 눈이 어두운 이들이 적지 않듯이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도 여전히 많다. 고대 전쟁 중에 상대편의 눈을 빼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사사 삼손을 붙잡은 불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눈을 빼고 끌고 가서 놋 줄로 결박하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다.(16:21) 열왕기하 25장에 보면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 20대 임금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군대에 사로잡혔다. 저들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보는 눈앞에서 죽였다. 그리고 나서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사무엘상 112절에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사울 왕과 이스라엘을 위협하면서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고 말하며 조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른 쪽 눈을 뺀다는 것은 상대방의 위엄을 빼앗아가고 굴욕 시키는 것을 말한다. 욥은 진노하여 찢고 적대시하며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16:9)라고 주께 대하여 탄식하기도 하였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22:9)라고 하였다. 예수님도 교만한 바리새인의 눈과 겸손한 세리의 눈길은 다르다고 하셨다.(18:13) 세상에는 교만하고 오만한 눈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6:9)라고 하셨다. 시편 1827절에 보면, “주께서는 교만한 눈을 낮추신다.”고 하였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131:1)라고 기도하였다. “교만한 눈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일곱 가지 경계할 것들 중의 하나이다.(6:17) 베드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벧후2:14)고 경고하였다. 여성이 눈 화장을 하기 시작한 역사는 그 기원이 오래다. 고대 애굽 여인들은 아름다운 색깔의 돌을 곱게 갈아서 눈 화장을 하였다.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도 그런 요란한 눈 화장을 즐겨 하였다.(왕하9:30) 아름다운 세상이다. 이 좋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안목의 정욕’(12:16)에만 가리어져 살지 말고 영원을 바라 볼 줄 아는 영의 눈을 떠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 눈이 밝아진 것처럼 말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촉구하셨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3:18)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설교문 [1]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성도의 부모 공경(행..최고관리자
"어머니"최고관리자
"요게벳의 노래"최고관리자
"성도의 부모공경"최고관리자
"어머니의 넓은 사랑..최고관리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어..최고관리자
"예수님의 어린양"최고관리자
"어지신 목자"최고관리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최고관리자
"오 거룩하신 주님"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