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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임플란트 2015.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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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1-04 08:09 조회 11,807 댓글 0
 
복음의 임플란트
 
 
오늘 날은 각 분야마다 의술의 발전이 경이로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과거로 하면 왕이라도 그 혜택을 입기 어려운 현대 의술의 엄청난 도움 속에 살아간다. 물론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나라나 지역도 여전히 적지 않지만 말이다. 그 중에 치아 임플란트 시술의 발전은 놀랍기 그지없다. 동양에서는 오복(五福)을 귀하게 여겨 왔다. 오복이란 수(), (),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말한다.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 귀()와 자손이 많은 것을 꼽기도 한다. ()란 주어진 목숨이 다하도록 살아가는 천수(天壽)를 말한다. ()란 남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하여 손 벌리지 않고 이웃에게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오히려 주변을 돌보고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강녕(康寧)이란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이 병행되는 균형 있는 강건함을 말한다. 즉 강()은 육체의 건강이요, ()은 마음의 평안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호덕(攸好德)이란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 덕을 쌓는 것을 말한다. 고종명(考終命)이란 존귀하고 평안하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복이란 것이 이처럼 골고루 귀하지만 건강하고 좋은 치아를 갖고 사는 것은 복 중의 복이 아닌가. 당장 내 치아에 이상이 생겨서 한 끼의 음식조차 제대로 맛있게 먹을 수 없는 형편이 된다면 그 불편이 얼마나 심각한가. 물론 이 대신 잇몸이란 속담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어진 두 발로 걷고 직접 화장실 출입하며 한 끼 음식을 달게 씹어 삼키며 모세처럼 죽음의 순간까지 시력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게 살다가 잠을 자듯이 임종하여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죽음인가. 게다가 하나님 안에서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 신앙을 갖고 살았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물론 성경은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죽어간 순교자들의 죽음을 남다르게 귀하게 여기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현대인의 오복(五福)건강하고, 배우자가 살아 있고, 재산과 일과 친구가 있는 상태라고 설명한 글을 보았다.
필자는 강화도 시골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자격 없는 치과 시설에서 충치를 때웠다. 문제는 6-7년 후에 일어났다. 보병 소대장으로 철책선 근무를 마치고 후방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였다. 여러 날 산 속에서 계속되는 훈련 기간에 엄청난 치통이 밀려 왔다. 치통의 아픔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심한 고통 가운데 훈련을 겨우 마치고 부대에 돌아 와서 의무대를 찾아 갔다. 군의관은 충치의 상태가 심하며 치료가 어려우니 발치(拔齒)해야 한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양쪽 위아래 어금니 한 개 씩을 뽑아내야만 했다. 말이 그렇지 위든 아래든 어금니가 없다는 것은 그 맞은편의 어금니도 마주 씹을 상대 치아가 없으니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25년 이상의 세월의 흘렀다. 어느 금요일 철야기도 시간에 의사의 실력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다가 무자격 돌팔이 치과 치료로 인하여 충치 치료는커녕 병을 키우고 말았고 결국은 발치했노라고 말했다. 실력 있고 자격을 갖춘 분야의 전문성을 구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다. 그 날 밤에 기도회에 참석하였던 이웃 교회 교인이 그 예화를 듣고는 다음 날 오전 시간에 사무실로 찾아 왔다. 조카 의사가 임플란트를 전공한 치과 의사인데 시술 받도록 섬기겠다고 하였다. 극구 사양하였으나 그 분의 간청에 못 이겨 임플란트 시술혜택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그런 시술이 보편화되기 이전이어서 시술비용도 만만치 않을 때였다. 그 후로는 딱딱하고 견고한 음식을 씹는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도 그 분의 사랑과 건강하게 잘 시술된 임플란트 어금니 두 개의 도움을 생각하면 늘 감사한 마음이 크다.
현대 치과학의 혁명으로 불리는 치아 임플란트’(dental implant)시술이 가능하도록 그 의술을 개발한 스웨덴의 잉바르 브레네막(Per-Ingvar Branemark, 1929-2014)박사가 지난 연말에 85세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류 역사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큰 공로를 세운 분이다. 그는 1965년에 인체용 임플란트를 개발했다. 그는 당시에 선천적 턱 기형으로 치아가 전혀 없던 34살 된 환자 요스타 라슨에게 티타늄 지지대를 심어 뼈와 섞여 자리 잡도록 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에 이 티타늄 지지대에 4개의 인공 치아를 단단히 결합했다. 치아를 갖게 된 요스타 라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식을 씹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음식의 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치아 임플란트 시술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잉바르 브레네막 박사가 그 동안 10년여 연구를 계속한 끝에 얻어낸 열매였다. 잉바르 브레네막 박사가 고문으로 몸담고 있던 의료업체인 노벨바이오케어는 그의 죽음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면서 그는 사람들이 다시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치과계의 거장이었다는 추도사를 전했다. 그 첫 혜택을 입은 환자였던 요스타 라슨은 지난 2006년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40년 이상 시술받은 임플란트를 잘 사용하며 살아 왔다고 한다. 초기에 개발한 임플란트의 수준이 오늘 날과 비교하여 크게 뒤지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임플란트는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세계적으로는 수많은 치과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었고 음식을 자유롭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시카고 텍사스의 스테이크 레스토랑에 고기를 타기 직전까지 완전히 익혀 달라고 -’(well done)으로 주문하는 손님이 있으면 주방장이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손님에게 달려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는 스테이크의 제 맛도 모르면서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촌스러운 손님을 빗대서 한 말일 것이다.
요즘처럼 복음이 왜곡되어 가고 있는 이단과 사이비의 횡포가 심각한 시대에 복음을 복음답게 증거하고 전파하며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 시대적인 사명인가. 복음의 왜곡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때로부터 그의 제자들이 사도(使徒)로 활동하던 때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다. 즉 영지주의(gnosticism)의 횡포와 그 미혹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믿음이 아니라 ’(gnosis)이 구원의 수단이라고 여겼다. 정통기독교에서는 구원은 믿음’(faith)을 통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데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은 ’(gnosis)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다윗은 시편 348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설명이나 이론으로가 아니라 체험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체험에 바탕 하는 것이며 체험 또한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 무엇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며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수박을 먹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잘 한들 그 맛을 알 길이란 없는 것 아닌가. 1952년 예테보리대 병원의 정형외과 의사였던 잉바르 브레네막 박사는 부러진 토끼의 다리뼈에 수술로 티타늄을 심어 고정하는 실험을 했다. 몇 달 후 티타늄을 제거하려 하자 티타늄이 뼈 및 주변 조직과 엉켜서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 현상을 골유착’(osseointegration)이라고 이름하고 이를 이용하면 티타늄이 인공 치아의 지지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 당시까지에는 치아가 없는 사람은 틀니를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의 연구는 개와 토끼 등 동물 실험에서 티타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다 해결 할 수 없었던 복음으로 인한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으로 오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인생들에게 완전하고도 영원한 복음의 임플란트를 가능하게 하신 복음의 말씀 그 자체이시다. 이는 복음의 틀니만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진리를 아는 자로서의 그런 자유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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