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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쓰신 글씨 2014.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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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0-18 16:10 조회 13,060 댓글 0
 
땅에 쓰신 글씨
 
 
10월 9일인 ‘한글날’은 폐지되었다가 복원된 공휴일이다. 세계의 그 어떤 나라에 그 나라의 글이 제정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 있을까 싶다. 북한조차도 한글과 관련하여 1월 15일을 ‘조선글날’이라고 정하였다고 한다. 남한의 ‘한글날’은 1446년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반포한 날을 기념한다.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의 6,900여개가 넘는 언어 중에서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가 분명한 유일한 언어라고 한다. 놀랍고 자랑스럽지 않나. 인류의 역사는 말과 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덴동산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며 지냈다. 그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길이 없다. 다만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사건 이전 까지는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창11:1)고 하였다. 인간에게 말이 없었다면 찬란한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후대에 구전(口傳)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글이 발명되지 못하였다면 각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문자화된 역사기록물이 전해지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말도 말이지만 특히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종이의 사용과 인쇄술의 발전은 인류의 문명 발전 속도를 가속화하여 왔다. 요즘은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스마트 폰과 같은 IT기기를 사용하여 문자를 기록하고 전송하기 때문에 젊은 세대나 어린이들의 글쓰기 솜씨가 엉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글씨라는 것이 손끝으로 개성이 있게 쓰든 혹은 정형화된 기기의 문자를 통하여 기록하든 문자가 있으므로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이 가능하고 과학과 의학을 비롯한 각 분야의 연구 과정과 그 결과가 기록으로 보존되고 확산되고 영향을 미치며 점점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글자의 모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과 지혜와 창의적 혜안과 교훈이니까 말이다. 나라 안팎에는 그 나라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친필 자료들이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보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글씨는 전해져오는 것이 전혀 없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활동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는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셨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 많은 천국비유의 말씀들은 한 결 같이 아람어로 선포하신 말씀의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예수께서 쓰신 그 아람어의 친필 글씨가 보존되어 전해 오는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를 잘 쓰고 사용하셨을 예수의 친필 자료 또한 역사에 전혀 전해오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모양의 글씨체를 쓰셨을까.” 궁금하지 않나. 동양에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여 말과 글씨는 그 상대방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여겨왔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용모, 언변, 글씨, 판단력’을 의미한다. 중국의 당 태종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을 급하게 등용하지 않았다. ‘신언서판’의 네 가지 선정기준을 마련하고 그 인물됨을 평가한 후에 관리로 등용하였다. 외모는 타고 나는 것이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 않나. 물론 요즘은 이마와 눈과 코와 턱과 볼을 비롯한 얼굴의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신체의 일부를 뜯어 고치는 성형이 유행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말이라는 것도 그렇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어떠하냐 혹은 그가 말을 얼마나 달변으로 잘하느냐 보다도 그 말에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과 감화력과 진실성이 담겨 있느냐의 비중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요즘 같은 컴퓨터 시대에는 덜 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문서 작성이 친필로 이루어지던 때가 있지 않았나. 그것이 개인적인 사신(私信)이든 혹은 그 어떤 공문서이든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평생 무관이었지만 그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그 내용 뿐만 아니라 그의 필력 또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판’(判)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광종 때부터 과거제도를 실시했다고 한다. 광종은 호족 출신의 공신세력을 누르고 충성스러운 문신관료를 얻기 위해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이 신언서판에 관한 것이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 또한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 신언서판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외모가 남들보다 약하거나 초라하고 말이 어눌하거나 글씨가 명필이 아니더라도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소중한 것은 ‘판’(判)의 영역이다. 그 ‘판’이라는 것은 삶의 지혜가 아닐까. 성경의 잠언과 전도서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지혜’ 말이다. 3천 년 전의 인물이었던 솔로몬의 외양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주인공이다. 20살에 왕이 된 솔로몬의 기도는 이러하였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부귀와 영광”도 덤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조건이 따랐다. “네가 만일...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3:14)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에 일어난 일이었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말씀대로 준행하여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그를 보내신 분,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대로 살아가신 메시아이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는 고백은 사명을 완수한 순종의 고백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 외모에 있어서는 ‘신언서판’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분이었다. 메시아 예언인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하였다. 예수는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유수한 대기업에 취직하기 어려운 관상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비롯한 성경기록자들을 통하여 선포되고 기록된 기독교의 경전이 성경이 아닌가. 그 성경의 번역이 점점 활발해 져 가고 있다.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 폴 에드워즈(Paul Edwards)는 “지금은 기독교 역사 상 성경 번역이 가장 빠르게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며, 컴퓨터와 인공위성이 이러한 성경 번역의 가속화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25년까지 세계 6,909개의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사랑의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완성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으신 구주이시다. 그 예수님이 한번은 땅에 쭈그리고 엎드리셔서 손가락으로 흙에다가 글씨를 쓰신 적이 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어느 날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성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끌고 예수 앞에 나왔다. 상대 남자는 도망간 것 같다. 아니면 도망가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저들은 예수께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에 예수는 땅에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셨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다. 무리들은 한 사람씩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 현장을 떠났고 오직 예수와 그 여인만 남아 있었다. 성경은 그 쓰신 글씨의 내용을 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마도 예수께서는 땅이나 돌보다도 천배 만 배 더 딱딱하고 완악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이런 글씨를 쓰고 싶지 않으셨을까. “남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이다. 언제나 그 분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으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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