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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처럼 일어나라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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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2-15 21:03 조회 14,075 댓글 0
 
요즘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원만하게 잘하려면 세 가지 필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첫째는 ‘소통’疏通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필통’必通이요, 그 둘째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잘 나누는 ‘feel통’通이다. 그리고 나중 하나는 필기구를 담는 ‘필통’筆筒이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몇 가지 기본요소가 필요하다. 그 중의 하나가 성도들 간에 서로를 돌아보아 일심一心으로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진리의 왜곡을 막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히 승리하는 신앙생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 더할 말도 뺄 말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꿩 잡는 것이 매다.’라는 식의 태도로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미혹하여 교회를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교회 일각에 소위 ‘신사도주의’라는 새로운 신앙운동이 스미어 들어왔다. 은혜 받는 집회 중에 자기 치아가 금이빨로 변한 것을 확인해 보라든지, 금가루가 손바닥에 떨어졌다든지, 더불어 예배 하는 성도들 앞에서 넘어트리고 쓰러트리고 자빠트리며 이것을 입신入神(?)이라고 하고 짐승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등의 희한한 영적 체험을 강요하고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등의 집회 양태를 교계가 심각한 눈으로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베니 힌(Benny Hinn,1952-)의 집회실태는 이미 그 위험 수위를 넘어선지 오래이다. 이 같은 현상이 국내에서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간간이 일어나고 있고 의도하는 사역자들이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행크 해너그라프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라는 그의 책에서 진리의 깃발 아래 자기 신분을 감춘 채로 호기심 어린 성도들을 신비한 경험으로 현혹시키고 미혹하게 하며 유혹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기만하며, 성경적인 기준에서 멀어진 거짓 경험을 부추기며 선동하는 등의 자기오류에 빠진 행위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이 책은 지난 얼마 동안 세계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켜 온 빈야드 운동과 신사도운동의 부흥 운동이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끼친 악영향에 대한 증거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행크 해너그라프는 국제기독교연구원(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대표로서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 변증가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잃어버린 기독교의 진리를 회복하고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의 문제점들을 샅샅이 파헤쳐서 가짜 부흥 운동과 진정한 교회 부흥 운동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해 준다.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에서 아내 캐시와 12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이 시대,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고 교회가 이단과 사이비의 세력 앞에 무너져 가며 자가당착에 빠진 변질된 성령 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물론 성령의 임재 현상을 몇 마디의 필설로 다 정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이천년의 교회 역사가 입증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 사도행전의 역사와 사도 바울의 사역이 증언하는 바대로 신앙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굳건히 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힘의 원리를 통해서 신앙생활의 진리를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까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11:20-21)고 교훈하였다. 간혹 성도들 중에는 성령의 신비현상에 지나친 집착을 가지므로 남다른 영적 체험을 흠모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의 일탈逸脫만을 꿈꾼다면 그 나중이 점점 위험하기 그지없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16:13)고 권면하였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는 38년 된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도록 회복시켜 주셨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하여 들어가다가 성전의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나이 사십 여세의 걸인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행3:6)고 말하며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에 그 걸인은 걷고 뛰고 찬양하며 성전 안에 출입하게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쳐 일으켜 세우며 벳세다 광야에서 삼일 동안 제대로 못 먹어 배고파하던 무리들을 배불리 먹게 해 주셨다. 배가 부르게 된 광야의 무리들은 일제히 일어나 예수를 왕 삼고자 하며 순식간에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6:14)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결집력을 보였다. 그러나 예수는 저들을 피하여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다. 예수께서 기대하는 바는 저들 각 사람이 자기 가정과 마을과 도성으로 돌아가 믿음으로 굳게 서서 진리 안에서 승리하는 일상의 삶을 계속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 6장에서 절정에 달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0-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몽롱한 영적 체험과 남들 앞에서 쓰러지는 정도의 신비 체험에 매어 달리지 말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여 이길 만한 말씀과 기도에 바탕을 둔 영적 능력을 덧입고 강건하여 져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살아가란 권면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이것이 무슨 뜻인가. 공동번역으로 보면 분명해진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성도들의 씨름은 곁에 있는 그 누군가와의 세상적인 씨름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혼미하게 하고 구원에서 멀어져 가게 하는 하늘의 악령들과의 싸움인 것이다. 바울의 권면을 조금 더 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엡6:13-14)고 하였다. 여기서 ‘서다’라는 말은 ‘이기다. 승리하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신사도주의 자들이 주창하는 그런 정도의 영적 체험에 가리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금가루면 어떻고 밀가루면 어떤가. 금이빨이면 어떻게 아밀감이면 어떤가. 그런 현상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자가 아니신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는 소위 입신 체험 이후에 삶에 어떤 변화와 성숙이 뒤 따랐단 말인가. 이제 웃기는 일 좀 그만하고 본질로 돌아가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 예수께서 멀쩡히 서 있는 사람 밀어 쓰러트려 가면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해 주신 적이 있는가. 언제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밀어 넘어트려 가면서 성령을 강론한 적이 있는가. 왜들 이러시는가. 정말 해도 너무한다. 연약한자, 곤고한 자, 힘겨운 자, 우울해 하고 슬퍼하고 나약해 하는 자에게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믿고 위로와 격려와 결단과 소망을 갖는 전도자로 살아가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혼자 성령의 사람인양 성령을 불러 모시는 양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어리석인 발람 선지자에게 나귀라도 동원하셔서 말씀하시고 저 돌들로라도 소리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신가.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2014년 제 22회 세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의 여자쇼트트랙 500m의 박승희 선수를 보라. 선두를 달리던 중에 뒤 따르던 선수의 실수로 부딪혀 넘어 졌으나 이내 곧 다시 일어났고 몇 발자국 달리려다가 다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러나 또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렇다. 넘어진 자리에서 훌 훌 털고 다시 일어나 온전한 구원을 이루도록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반칙하면 실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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